[박영범의 이코노믹스] 노사정 합의 집착 내려놓고, 정부가 노동개혁 주도할 때

2023. 12. 26. 00:3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완전체 노사정 합의와 노동개혁


박영범 한성대 명예교수 경제학
윤석열 정부의 대표적 노동개혁 과제인 근로시간제도 개편이 좌초될 가능성이 커졌다. 정부가 지난 11월 발표한 근로시간제도 개편안에 따르면 2018년 2월 국회에서 통과된 주 52시간 제도의 틀은 유지되고 노사협의를 거쳐 일부 업종과 직종에 대해 연장근로 관리단위가 확대된다. 3월에 발표한 최초의 근로시간제도 개편안은 노사의 참여 없이 전문가 그룹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당초의 개편안을 거의 폐기한 수준인 이번 개편안은 노사협의를 거쳐 추후 확정될 예정이다.

폐해 많은 주 52시간제

노동계 편향적인 주 52시간제는 문재인 정부에서 별다른 준비가 없이 도입되어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2018년의 버스 대란 등 산업 현장의 혼란이 잇따랐다. 당시 여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의 노사정 논의를 통해 개편 방안을 도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3년간의 논의에도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노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력근로제·선택근로제의 단위 기간과 30인 미만 사업장의 연장근로 시간을 8시간 늘렸다.

「 노사 비판받은 근로시간제 개편
정부, 노사협의로 정하겠다지만
노사 동상이몽, 무산 가능성 커

1990년 이래 노사정 합의 시도
외환위기 때 말곤 번번이 좌초
합의 집착은 사실상 면피 행정

윤석열 정부는 국회에서의 의석 열세에도 불구하고 집권 초기부터 근로시간제도 개편을 세심한 준비 없이 밀어붙이는 전략적 실책을 범하면서 노사 양측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김영옥 기자

정부의 최근 발표대로 근로시간제도 개편이 노사 협의를 거친다는 것은 형식 논리로 보면 현장의 의견을 더 수렴하는 듯 보이나 실질적으론 상당 부분 물 건너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고통을 수반하는 노동시장 개혁안을 여론 조사 결과를 토대로 마련한다는 것 자체가 반개혁적 성격을 띠게 된다. 게다가 정부의 실태 조사결과에 대해 노사는 동상이몽 해석을 하고 있다. 과거 경험으로 봐도 노사정 협의를 통해 합의에 기초한 근로시간제도 개편안을 도출해 낸다는 것은 지극히 가능성이 낮은 영역에 속한다.

노사정 합의의 반복적 실패

근로시간제도 개편을 비롯한 노동개혁을 노사정 합의를 통해 추진하려는 시도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지속해서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기 상황이었던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1년 정도를 제외하면 반복적으로 실패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노동개혁을 지연시키면서 노동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박경민 기자

노사 갈등 해결에 사회적 합의 방식을 처음으로 시도한 정부는 노태우 정부이다. 호주 노총 위원장 출신인 로버트 호크 호주 총리의 조언을 받아들여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3월 노사정 관계자 200여명이 참가한 ‘사회적 합의 형성을 위한 협의회’를 청와대에서 개최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결실은 없었다.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사 및 공익대표로 구성돼 1996년 초 출범한 노사관계 개혁위원회에서는 전반적인 노동관계법 개정이 논의되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1996년 말 김영삼 정부는 거대 여당에 기대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는 노동계의 대규모 시위를 초래했고, 결국 1997년 3월 여야 합의로 노동관계법이 재개정되었다.

외환위기 극복 위해 정리해고 법제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초 민주노총까지 참여하는 노사정 협의에서 정리해고의 법제화 등이 합의되었다. 그러나 합의의 여파로 집행부가 불신임당한 민주노총은 전교조가 합법화된 1999년 초 노사정위원회(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전신)를 탈퇴하였다.

1999년 이후 지금까지 민주노총까지 참여하는 완전체의 노사정 합의는 없었다. 필요하면 경영계, 정부, 그리고 (노동계를 대표한) 한국노총만이 참여한 반쪽의 노사정 합의를 바탕으로 국회에서 논의하여 노동관계법을 개정하였다. 노조 존중 정책을 지향한 문재인 정부에서 민주노총이 참여하는 노사정 합의에 대한 기대가 있었으나 코로나19 상황에서 국가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를 추진한 김명환 위원장은 불신임을 당하여 물러났다.

대기업·공공 노조, 노동시장 양극화 촉진

박경민 기자

국가 발전에 대한 큰 그림 없이 노사 간에 나눠 먹는 방식으로 ‘합의를 위한 합의’를 하면 국가 전체로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된다. 1997년 법 개정 시 유예되었다가 여러 번의 추가적인 유예를 거쳐 13년 후인 2010년부터 시행된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 허용’이 대표적인 사례다. 국가적으로는 글로벌 기준을 회피했다는 이유로 OECD 모니터링을 10년 이상이나 받는 수모를 당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 가 13년간 유예되는 과정에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각각의 사업장 단위 독점 체제를 공고히 하게 됐고, 이는 경쟁 부재의 노동운동이 우리나라에 자리 잡게 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노조가 산별노조를 지향하나 실제적으로는 기업별 노조로 고착된 것은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 허용’을 유예하기 위해 사용자 측이 노동계와 교환한 ‘노조 전임자임금 지급 금지’ 유예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 14%의 노조 조직률, 대기업과 공공부문 중심의 기업별 노조가 노동시장 양극화를 더욱 촉진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노사정 합의를 한다면 호주, 네덜란드, 독일 등에서와 같이 국가 전체의 관점에서 노동시장 현안에 접근하여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고통이 따르더라도 중장기적으로는 국가발전을 위해 노사정이 고통을 분담하는 합의를 이뤄내는 노동개혁을 하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노사정 합의 방식에 의한 노동개혁의 실효성이 떨어진다. 완전체의 노사정 합의를 한다고 할지라도 노동 현장에서 합의가 제대로 실행될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없다. 네덜란드 등과 다른 점이다. 산하 지부 노조를 통제할 수 있는 산별노조와 전국 단위 노조가 없다.

산하 지부인 현대차, 기아차 등 주요 대공장 노조가 기업 단위에서 단체교섭을 하는 ‘무늬’만 산별노조인 우리나라와 달리 외국의 산별노조는 업종단위에서 주요 현안을 사용자 단체와 교섭을 하고, 교섭 결과가 산하 지부에 강제된다. 산별 교섭 결과에 반발하여 지부가 파업하면 산별 노조가 제재한다.

근로시간제도 개편은 노동개혁의 일부이고 시작일 뿐이다. 성과와 역량 중심의 노동시장 구축,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닫힌 노동시장의 해체, 과도한 노조 프리미엄 등 개혁과제가 산적해 있다.

노동·연금·교육 개혁은 서로 연결

윤석열 정부의 3대 개혁 과제인 노동개혁, 연금개혁, 교육개혁은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노동개혁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예컨대 국민연금 개혁의 쟁점 중의 하나는 연금수급 개시연령과 법정 정년의 차이이다. 법정 정년 60세를 상향 조정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연공급 임금체계이다. 법정 정년이 연장된다면 대기업, 공공부문 근로자가 주로 혜택을 보게 되어 노동시장 양극화는 더욱 심화한다.

교육개혁도 노동개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수학능력시험(수능)의 ‘킬러 문항’을 강하게 비판하였으나 올해 수능은 만점자가 1명뿐인 ‘불(火)수능’이었다. 좋은 학벌이 경쟁력인 학벌 중심 사회에서 수능의 높은 변별력을 탓할 수는 없다. 학력 중심 사회를 능력과 성과 중심의 사회로 바꾸어야만 수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폐단이 근원적으로 사라진다. 능력·성과 중심 사회로의 전환에는 노동시장 개혁이 필수적이다.

학력과 연공이 중시되는 대기업 중심의 폐쇄적인 노동시장이 채용, 교육훈련, 승진, 보상 등에서 역량과 성과가 중시되는 노동시장으로 바뀌어야 한다.

대립적이고 소모적인 노사관계 현실과 그간 노사정 대화의 경험은 우리나라에서 노사정 합의를 통한 노동개혁의 지난함을 시사해준다. 정부가 보다 선도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야 한다. 노사정 사회적 합의라는 상징성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내려놓을 때가 됐다.

완전체도 되지 못하는 반쪽의 노사정 합의에 집착하는 것은 근로시간제도 및 임금체계 개편처럼 반드시 시행되어야 하는 정책 현안의 결정을 지연시킬 소지가 크다. 이는 정부의 책임 있는 역할을 기대하는 국민에겐 ‘면피 행정’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정부가 보다 책임 있는 자세로 노사와 야당을 설득하여야 한다.

국가 부도 위기 상황에서의 1998년 1월 노사정 합의, 노사정위원회, 경제사회노사정위원회,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거쳐 온 노사정 합의의 역사와 경험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사노위는 합의 도출보다는 관련 현안에 대해 노사정이 대화하고 협의하는 틀로 활용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다.

박영범 한성대 명예교수·경제학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