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훈의 마켓 나우] 한국 팹리스에 퀄컴·노키아가 주는 힌트
메모리는 대한민국, 파운드리는 대만, 팹리스는 미국이 각각 해당 시장에서 65~70%를 차지한다. 반도체 분야마다 이 세 나라가 강력한 1, 2위를 하면서 시장을 장악하고 있으니 새로운 경쟁자의 시장 진입은 정말 어렵다.
어려운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팹리스 산업은 엄청난 내수시장과 대만 제조기반을 활용해서 2위 자리를 위협하는 18%까지 성장했다가, 미국의 제재 이후 9%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내수시장, 인력, 자본만 있다면 팹리스 산업을 키우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지난 20년간 우리나라도 팹리스 육성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시스템 IC 2010 사업, 시스템 IC 2020 사업 등 대규모 국책사업을 수행했지만, 시장점유율은 1% 내외다. 쉽사리 포기하기도 어려운 이유가 있다. 팹리스 산업 규모가 2022년 2048억 달러(약 230조 원) 정도로 메모리 시장보다도 크고, 계속 성장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가 2위를 차지하고 있는 파운드리 산업의 생태계를 완성하기 위해서라도 팹리스 산업이 꼭 필요하다.
왜 우리나라는 유독 팹리스 분야에서 기세가 약할까? 정부지원에도 불구하고 팹리스 기업 숫자는 급감했고, 각종 설계인력 양성사업도 중소·중견 팹리스 업체에 우수인력을 공급한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지금도 인공지능 반도체를 설계하는 팹리스 기업들을 지원하는 국책사업과 대규모 설계인력 양성 사업이 계속되고 있지만, 지금까지와 유사한 지원 방법으로 새로운 결과를 기대하기에는 그동안의 성과가 너무 미흡해서 불안하다.
세계 1위 팹리스 기업인 퀄컴은 지난 20년간 45개의 기업을 인수 합병했다. 인수합병된 기업을 만들었던 인력들이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새로운 팹리스를 창업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면서 팹리스 생태계가 발전했다. 한국의 팹리스 기업들이 창업과 폐업을 반복하면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인수합병을 주도할 만한 앵커 기업이 없거나, 있더라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팹리스 인수합병을 돕기 위한 펀드를 조성하기도 했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팹리스의 근간이 되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수합병이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자본 여력이 있는 대기업의 설계부문을 팹리스로 독립시키고, 인수합병을 통해 지적재산권을 기업가치로 만들어내는 선순환체계를 만들어내면 어떨까? 이렇게 되면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분사해야 한다’는 요구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노키아가 폐업하자 고급인력이 분산되면서 핀란드 IT 산업이 더욱 발전하게 된 선례도 있으니 고민해볼 만하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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