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읽기 (11)
우체국에서 그리고 가끔 스프를 먹으러 가던 카페에서 생기 넘치는 눈빛을 가진 우체국 직원인 조셉 룰랭(Joseph Roulin, 1841~1903)을 만났다. 그는 우편물을 분류하는 일을 하는 직원이었으며, 일을 마치면 카페에서 매일 술을 마셨기에 주독이 올라 47살의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인다.
빈센트는 룰랭에 대해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로 말했다.
“룰랭은 쓴맛도 없고, 우울하지도, 완벽하지도, 행복하지도, 그리고 항상 완벽하게 정직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너무 좋은 친구, 소크라테스처럼 너무 현명하고, 너무 기분 좋고, 너무 충실해! 룰랭을 아버지 같다고 하기엔 그렇게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나에게 항상 진지하고 다정하단다. 마치 노병이 젊은 병사를 대하는 것처럼 말이야.”
룰랭을 만난 1888년 8월부터 1889년 4월까지 9개월 동안 그는 룰랭의 초상화를 6점의 유화로 그리고, 그중 3점은 배경에 꽃이 있고, 이후 세 점을 더 펜화로 그렸다. 그는 여름 꽃을 선택해 이 초상화를 화려하게 표현했다. 양귀비, 수레국화, 데이지, 그리고 장미 등 상당히 정밀하게 묘사되었는데, 이는 룰랭 얼굴에 가득한 수염의 컬이 양식화된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배경에 꽃을 그려 넣은 이유에 대해 빈센트는 “평범한 우체부의 초상화를 고귀한 신분의 초상화처럼 그리고 싶어 꽃을 넣었으며, 모델의 성격에 맞는 현대적인 초상화를 그리고 싶었다”라고 여동생 윌레미언에게 말했다. 그는 룰랭의 가족 모두를 여러 번 그렸다. 그들은 각각 러시아 사람처럼 보이는 특별한 유형이지만, 모두 프랑스 사람이다.
이 색채대비가 뛰어난 초상화에서 빈센트는 빠르고 유창한 붓질로 물감을 칠했다. 그는 항상 모델을 찾고 있었기에 룰랭의 아내와 세 자녀도 그의 모델이 되었다. 그는 룰랭 가족의 초상화를 총 20점이나 그렸고, 가난한 룰랭의 집안에서 빈센트가 주는 모델료는 큰 수입이었다. 룰랭 부부는 빈센트가 귀를 자르고 난 후 병원에서 그를 돌봐 주었던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이 그림에 대해 빈센트는 테오에게 이런 설명의 편지를 보냈다.
“이 그림은 싸구려 가게에서 파는 서툰 판화처럼 보일 수도 있다. 오렌지색 머리카락에 초록색 옷 입은 여인이 분홍색 꽃 그림이 그려진 초록색 벽지를 배경으로 앉아 있다. 생소할 정도로 거친 분홍색, 거친 오렌지색 그리고 거친 초록색이 눈에 거슬리게 부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단조로운 빨간색과 초록색 덕분에 나름의 온화함을 회복한다. 난 이 그림이 해바라기 그림들 사이에 걸려 있는 것을 상상해 본다.”
빈센트의 의도처럼 룰랭 부인의 초상화에 노란 해바라기를 양쪽에 놓으면 빨간색과 초록색의 보색이 해바라기의 노란색과 더욱 강렬한 이미지를 자아낼 것이다. 이전에는 어떤 화가도 대담하게 보색대비로 그리지 않았다.
빈센트는 룰랭의 아내 오거스틴 룰랭이 갓 태어난 딸 마르셀의 요람을 흔들며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녀는 끈을 잡고 있는데, 정작 요람은 그림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빈센트는 주로 그림의 분위기에 관심이 있다. 초록색과 빨간색의 다양한 색조들은 자장가의 음표처럼 편안함과 따뜻함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이전에 빈센트는 선원으로 일했던 고갱에게 막막한 바다에서 온갖 위험에 노출된 아이슬란드 어부들의 고독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어린 아이 같으면서도 순교자 같은 그들이 고기잡이 배의 선실에서 바라보면 좋을 것 같은 그림, 어린 시절의 요람에서 흔들리던 때의 감각이 살아나고 어릴 때 듣던 자장가가 떠오르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오거스틴의 커다란 가슴이 눈에 띄는 데, 이는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는 모성애를 강조했다. 꽉 잡은 두 손은 평범한 주부인 룰랭 부인을 성모와 같이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묘사했기 때문이다. 빈센트가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 이전까지 작업하던 '룰랭 부인의 초상'을 복제한 그림도 두 점 더 그렸다.
빈센트는 가족력인 정신병과 조울증, 뇌전증 등의 지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파리에서는 압생트(Absinthe; 당시 화가들이 즐겨 마시던 알코올 55도 정도의 독주)를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건강을 더욱 해치게 되었다. 거기에 빈센트가 그토록 원했던 고갱과 공동작업을 위한 동거가 둘의 성격차이로 깨지고, 고갱이 떠난다고 하자 빈센트는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 시달렸다.
급기야 그는 자신의 귀를 잘라 매춘부에게 주었다. 이를 알게 된 80명의 아를 사람들은 연명한 서류를 경찰서에 제출하며 빈센트와 같은 위험한 인물과 아를에서 함께 살 수 없다고 고발했다.
그때 동생 테오에게 빈센트는 자신의 처한 상황을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사랑하는 동생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 바로 나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리든지 아니면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내버려다오. 내가 정말 잘못했다면 나를 가둔다 해도 반대하지 않겠다. 그냥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준다면 약속한 주의사항을 모두 지키도록 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쩌면 우리의 자잘한 슬픔들을 농담처럼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떤 점에서는 인류의 거대한 슬픔들까지도 말이다. 사태를 받아들이고 목표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 예술가들은 부서진 컵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네게 내 그림들을 보내고 싶지만 그들이 내 그림에까지 자물쇠를 채우고 지키고 있구나.” 1889년 3월 19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이다.
빈센트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들어갔다. 증세가 심하지 않을 때는 병원 근처에서, 증세가 심할 때는 이층 병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고갱(Paul Ganguin, 1848~1903)이 그린 '밤의 카페 아를'에 빈센트가 세든 집의 여주인으로 그녀의 남편은 카페 주인인 조셉 지누이다. 지누 부부는 빈센트에게 친절을 베푼 몇 안되는 지인이었다. 이들 부부 역시 빈센트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지누 부인 뒤로 술을 마시고 있는 긴 수염의 모자를 쓴 조셉 룰랭이 보인다. 고갱은 아를에서 빈센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을 모두 술주정뱅이로 묘사했다.
지누 부인도 술잔을 앞에 놓고 유혹의 눈길을 보내고, 빈센트가 그린 군복을 입은 외젠 밀리에도 왼쪽 구석에 앉아있다. 이 그림처럼 고갱은 빈센트를 존중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고갱은 테오가 화상으로 그림을 팔아주고 타이티로 떠날 경비를 모으기 위해 생활비를 준다는 말에 아를까지 내려왔기 때문이다. 고갱은 빈센트에게 그렇게 큰 상처를 주고 떠났지만 그의 그림에 한가지 영향을 남겼다. 룰랭의 아내 오귀스틴에게 헌정한 자장가(룰랭 부인)를 보면 고갱에게 받은 클로아조니즘(Cloisonnisme)이 드러난다.
클로아조니즘은 회화 표현에서 모티브를 단순화해서 파악하고 그 윤곽선을 강조해서 그리는 기법이다. 주로 고갱을 중심으로 하는 종합주의 화가들에 의해 적용되었다. 클루아종(Cloison)은 프랑스어로 ‘구분’의 뜻으로 중세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색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말한다.
아를에서 9주간의 짧은 공동작업을 하는 동안 빈센트는 존경하는 고갱의 화풍을 따라 그리며 고갱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1895년 저명한 화상(畵商) 앙브르아즈 볼라르는 룰랭 가족을 찾아 그들을 추적했으며, 설득하여 그 집 벽에 걸려있던 빈센트의 초상화들을 매입했다. 그래서 룰랭 가족의 초상화는 뿔뿔이 흩어져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소장하게 된 것이다.
빈센트가 룰랭과 그의 부인 오거스틴의 초상화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그가 그토록 목말라 했던 ‘가족과 사랑’이었다. (12편에 계속됩니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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