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요즘전시
특정 작품과 처음으로 대면하는 순간은 오직 한번 뿐이기에, 최대한 아무런 정보나 편견 없이 마주하라는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느꼈던 깊은 울림을 여전히 기억한다. 누군가 하나의 작품과 물리적인 연결고리를 형성하게 된다면, 이후 그는 시간과 마음을 들여 작품과의 관계를 이어 나간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첫인상에서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감각 뒤에 작품의 숨은 의미가 지층처럼 날로 촘촘해 지고,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제작 과정에 의도를 담는 작가가 점차 늘어났다. 급기야 2023년 최대 화두인 AI가 그림에도 소질을 보이며 창작에 대한 논란을 가중시키자, 이미 다소 거리감을 느끼던 일부 관람객에게는 현대미술이 오르지 못할 산처럼 비춰지기에 이르렀다.
현대미술의 양상이 나날이 진화하면서, 예술가와 관람자를 이어주는 큐레이터의 역할이 여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지난 12월 7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공개된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전시는 미술관의 2023년 기관 의제인 ‘공유’의 관점에서 동시대 미술관의 역할을 생각해 보는 전시다. 서울시립미술관이 퀸즈랜드 미술관 | 브리즈번 현대미술관(QAGOMA), 싱가포르 미술관(SAM)과 함께 공동의 경험과 가치 형성을 위한 다양한 이야기 접근 방식에 초점을 맞춰 각 기관의 소장품을 탐구한다. 전시 외에도 연구 프로젝트, 퍼포먼스, 워크숍, 신작 커미션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되어 관람객과 작품의 관계 맺기를 흥미롭게 풀어나간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주도로 진행된 3자 간 협력은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보통 소장품 대여 혹은 순회전의 형식에 머무는 것이 큐레이터, 나아가 기관의 협업 방식이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서로 시간을 들여 대화를 나눈 참여 큐레이터들은 기관의 경계를 넘어서 모험을 감행해 시행착오를 겪었고,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공유를 실천하고자 새로운 통찰력과 성찰의 근거로 의도적으로 도출한 "실천어" 용어집을 공동으로 고안해냈다. 방문객은 세 기관 큐레이터들의 일련의 대화에서 파생된 6가지 유형의 "실천어(action words)"를 길라잡이 삼아 끊임없이 진화하는 현대미술을 탐색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소장품은 서로 다른 우리의 이야기를 공유하기 위한 실천의 ‘도구’이자 ‘촉매제’가 된다. ‘사랑하기’, ‘추상하기와 침묵하기’, ‘번역하기’, ‘세우기’, ‘섬하기’, ‘물갈퀴만들기’ 등 실천의 행위를 따라 군집을 구성하는 작품들은 ‘대화’와 ‘상황’과 ‘운동’을 만들며, 관객에게 공동의 경험과 가치를 짓는 실천에 함께 하기를 제안한다. 총 31명/팀의 아티스트가 참여한 이번 전시는 미술관, 나아가 삶 속에서 공유를 실천하고자 선행되어야 하는 움직임을 실천어를 토대로 상상한다.
#섬하기 #물갈퀴만들기 같은 익숙하지 않은 실천어 포화 속에서 오히려 혼란이 가중된다면 전시장에 마련된 의자에 잠시 앉아 숨을 고르자. 아직 현대미술이란 산을 더 오를 체력이 남아 있다면 자신만의 실천어를 고안해보는 것 역시 좋은 방법이다. 고지는 결코 멀지 않다.
장소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3층 (서울시 중구 덕수궁길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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