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남은 손마저 이렇게 아름다운데... 무슨 일 일어났나
[성낙선 기자]
▲ 왕궁리 유적지, 곡수로. 궁궐 내에 물을 공급했던 수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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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궁리 유적지 모형. 국립익산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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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긁힌 상처가 숱하게 남아 있는 손마저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 손의 주인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을지를 상상했다. 그리고 그 손이 무언가를 애절하게 하소연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보살 손이 출토된 미륵사지에서는 온전한 형태로 남은 불상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 백제왕궁박물관 옥상에서 내려다본 왕궁리 유적지의 겨울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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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리 유적지는 백제 말기 왕궁이 있었던 곳으로, 백제가 남긴 대표적인 유적지 중에 하나다. 유적지는 사방이 확 트인, 낮은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왕궁리 유적지에서는 왕궁과 관련이 있는 유적보다는 사찰에나 있을 법한 석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 왕궁리 유적지, 남쪽 궁궐 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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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궁리 유적지, 백제 왕궁 담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물. 백제왕궁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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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에서 상당히 많은 건물터와 유물이 발견됐다. 북동쪽 구릉 정상에 후원 건물이 있었다. 궁터 서북쪽에는 공방이 있었다. 그곳에서 불에 탄 흙, 숫돌 등과 함께 금속과 유리 원료를 녹이는 도가니 300여 점이 출토됐다. 서남쪽에는 부엌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부뚜막, 조리도구 등을 보관하는 공간과 함께 철제 솥, 음식을 담는 항아리와 병이 출토됐다.
▲ 왕궁리 유적지, 오층석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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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백제 왕궁 안에 어떻게 해서 석탑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건 왕궁 안에 사찰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사찰이 원래부터 왕궁과 함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백제가 멸망한 후 그 터에 사찰이 들어선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사찰이 지어진 시기가 정확하지 않다 보니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석탑이 세워진 시기는 말이 더 많다.
탑의 형태는 미륵사지 석탑을 본뜬 백제계 석탑이지만, 그 시기를 보는 견해는 백제 말, 통일신라, 고려 초기 등으로 다양하게 나뉜다. 다만 석탑의 크기로 봐서, 이곳에 대규모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국보 제289호다. 그 안에서 1966년 국보 제123호인 사리엄장구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 고도리 석불입상(서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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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도리 석불입상(동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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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리 석불입상
왕궁리 유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도리 석불입상이 있다. 한 쌍의 석불입상이 개천을 사이에 두고, 약 200m 떨어진 거리에 세워져 있다. 석불이 서 있는 자리를 제외하고, 주변으로는 온통 농사를 짓는 땅이다. 쌍둥이나 다름없이 똑같이 생긴 불상을 구태여 그처럼 먼 거리에 따로 세워 놓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두 석불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서 있는 것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 석불입상에 전설이 내려온다. "두 불상이 평소에는 떨어져 지내다가 매년 음력 12월이 되면 만나서 회포를 풀고 새벽에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전설이다. 누군가 두 석불이 하나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만들어낸 전설일 것이다.
▲ 미륵사지 석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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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미륵사지도 왕궁리 유적지만큼이나 너른 개활지에 자리를 잡고 있다. 동서 260m, 남북 640m로, 대지 면적만 16만 5289㎡다. 거기 다른 건물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평지 한가운데에 한쪽 면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거대한 석탑이 서 있다. 이 풍경이 익산을 대표하는 풍경 중에 하나로 꼽힌다.
▲ 화려한 문양의 금제 사리 항아리.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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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발견된 사리봉안 기록판에 무왕의 왕후가 백제 최고 관직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문구가 나와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는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됐다는 설과 다르다.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 것처럼, 무왕이 신라에 향가인 서동요를 퍼뜨려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 결혼을 했다는 내용과도 다르다.
▲ 국립익산박물관, 입구가 지하로 걸어들어가야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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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익산박물관
미륵사지에 국립익산박물관이 있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다. 미륵사지 석탑 쪽에서 보면, 박물관이라고 할 만한 건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박물관은 특이하게도 관람객들이 지하로 걸어서 들어가게끔 설계됐다. 지붕에는 둔덕을 쌓아서 낮은 언덕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다른 박물관들이 거대하고 높은 건물로 지어진 것과 대조적이다.
박물관을 그런 형태로 지은 데는 미륵사지 석탑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있어 보인다. 문화관광체육부에서 펴내는 정책주간지를 보면, 실제 이 박물관은 "미륵사지가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기 위해 시설의 절반 이상을 지하화하는 등 지상 노출을 최소화하여 '보이지 않는 박물관'으로 설계됐다"고 한다.
▲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보살 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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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사리 항아리는 보기에도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다. 항아리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보통 섬세한 게 아니다. 보는 사람마다 넋을 잃고 바라본다. 하지만 이곳에서 정작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작은 '보살 손'이다. 유리관 안에서 팔뚝이 끊어진 손 하나가 은은한 빛을 발한다. 그 손이 금제사리 항아리 이상으로 정교하게 조각됐다.
▲ 왕궁리 유적지에서 출토된 건축 재료들. 언젠가는 다시 쓰임새가 생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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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미. 미륵사지에서 출토됐다. 국립익산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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