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남은 손마저 이렇게 아름다운데... 무슨 일 일어났나

성낙선 2023. 12. 25.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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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여행] 왕궁리 유적지, 고도리 석불입상, 미륵사지, 국립익산박물관

[성낙선 기자]

 왕궁리 유적지, 곡수로. 궁궐 내에 물을 공급했던 수로.
ⓒ 성낙선
익산에 다녀온 뒤로, 몇 가지 정경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백제의 왕궁이 있었던 왕궁리 유적지에서는 수로가 궁이 있었던 낮은 언덕 위를 여기저기 구불텅하게 지나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 광경이 내 눈에는 용이 되려다 만 이무기가 하늘에서 떨어져 사방을 미친 듯이 기어다니다 남긴 흔적처럼 보였다.
고도리에 있는 한 쌍의 고도리 석불입상 앞에서는 평생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으면서도 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존재를 보았다. 그 둘은 망부석처럼 가슴 위로 손을 모아쥐고 먼발치서 아득히 바라보기만 할 뿐, 상대방이 서 있는 곳으로는 발을 단 한 걸음도 떼놓을 수 없었다. 그런 상태로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흘려보냈다.
 
 왕궁리 유적지 모형. 국립익산박물관.
ⓒ 성낙선
기양리에 있는 국립익산박물관에서는 팔뚝이 부러진 채 본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가냘프고 여린 작은 '보살 손'을 보았다. 청동으로 만든 그 손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손처럼 부드럽고 따뜻해 보였다. 자연히 손을 뻗어서 그 손을 마주 잡아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유리 벽에 막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긁힌 상처가 숱하게 남아 있는 손마저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 손의 주인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을지를 상상했다. 그리고 그 손이 무언가를 애절하게 하소연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보살 손이 출토된 미륵사지에서는 온전한 형태로 남은 불상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부처들 대부분 작은 신체 일부분만을 남겼다. 보살 손을 보고 나서는 또 머리만 덩그러니 남은 부처들을 보았다. 어린아이 주먹보다 작은 그 부처 머리들은 온통 깨지고 뭉개진 상태였다. 그런 걸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팠다. 폐사지에서 느껴지는 정취가 말할 수 없이 착잡했다. 익산은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는 여행지였다.
 
 백제왕궁박물관 옥상에서 내려다본 왕궁리 유적지의 겨울 풍경.
ⓒ 성낙선
왕궁리 유적지

왕궁리 유적지는 백제 말기 왕궁이 있었던 곳으로, 백제가 남긴 대표적인 유적지 중에 하나다. 유적지는 사방이 확 트인, 낮은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왕궁리 유적지에서는 왕궁과 관련이 있는 유적보다는 사찰에나 있을 법한 석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백제 왕궁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석탑을 먼저 보게 돼서 당황할 수도 있다. 이곳에 왕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1980년대에 들어서서다. 1989년에 시작된 발굴 조사에서 비로소 이곳에 전형적인 궁궐 담장과 정전 등 여러 건축물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궁성은 장방형으로, 크기가 동서 약 240m, 남북 약 490m에 이른다.
 
 왕궁리 유적지, 남쪽 궁궐 담장.
ⓒ 성낙선
 
 왕궁리 유적지, 백제 왕궁 담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물. 백제왕궁박물관.
ⓒ 성낙선
 
발굴조사에서 상당히 많은 건물터와 유물이 발견됐다. 북동쪽 구릉 정상에 후원 건물이 있었다. 궁터 서북쪽에는 공방이 있었다. 그곳에서 불에 탄 흙, 숫돌 등과 함께 금속과 유리 원료를 녹이는 도가니 300여 점이 출토됐다. 서남쪽에는 부엌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부뚜막, 조리도구 등을 보관하는 공간과 함께 철제 솥, 음식을 담는 항아리와 병이 출토됐다.
그 건물터들과 유물들이 왕궁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 외에, 백제 왕궁을 특징짓는 유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곡수로'다. 궁터 곳곳에 남아 있는 곡수로는 동북쪽 구릉 서, 남, 북쪽 경사면에 독특한 문양을 그리며 설치돼 있다. 이 시설은 궁 내부에 물을 공급하고 보관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 풍경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왕궁리 유적지, 오층석탑
ⓒ 성낙선
 
그런데 백제 왕궁 안에 어떻게 해서 석탑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건 왕궁 안에 사찰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사찰이 원래부터 왕궁과 함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백제가 멸망한 후 그 터에 사찰이 들어선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사찰이 지어진 시기가 정확하지 않다 보니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석탑이 세워진 시기는 말이 더 많다.

탑의 형태는 미륵사지 석탑을 본뜬 백제계 석탑이지만, 그 시기를 보는 견해는 백제 말, 통일신라, 고려 초기 등으로 다양하게 나뉜다. 다만 석탑의 크기로 봐서, 이곳에 대규모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국보 제289호다. 그 안에서 1966년 국보 제123호인 사리엄장구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왕궁리 유적지는 2015년 미륵사지 등 다른 백제 유적들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왕궁리 유적지의 실체를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으면, 유적 전시관인 백제왕궁박물관을 관람하는 게 좋다. 그곳에서 백제 왕궁의 전모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고도리 석불입상(서쪽).
ⓒ 성낙선
 
 고도리 석불입상(동쪽).
ⓒ 성낙선
 
고도리 석불입상

왕궁리 유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도리 석불입상이 있다. 한 쌍의 석불입상이 개천을 사이에 두고, 약 200m 떨어진 거리에 세워져 있다. 석불이 서 있는 자리를 제외하고, 주변으로는 온통 농사를 짓는 땅이다. 쌍둥이나 다름없이 똑같이 생긴 불상을 구태여 그처럼 먼 거리에 따로 세워 놓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두 석불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서 있는 것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 석불입상에 전설이 내려온다. "두 불상이 평소에는 떨어져 지내다가 매년 음력 12월이 되면 만나서 회포를 풀고 새벽에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전설이다. 누군가 두 석불이 하나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만들어낸 전설일 것이다.

누가 무슨 이유로 이곳에 석불입상 한 쌍을 세울 생각을 했을까? 석불입상 앞에 설치된 안내문을 보면, "네모난 얼굴과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 등의 소략한 모습은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와 같이 신체의 표현이 지극히 절제된 괴체화된 거대한 석상이 많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미륵사지 석탑.
ⓒ 성낙선
 
미륵사지

미륵사지도 왕궁리 유적지만큼이나 너른 개활지에 자리를 잡고 있다. 동서 260m, 남북 640m로, 대지 면적만 16만 5289㎡다. 거기 다른 건물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평지 한가운데에 한쪽 면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거대한 석탑이 서 있다. 이 풍경이 익산을 대표하는 풍경 중에 하나로 꼽힌다.

미륵사는 백제 최대의 사찰지로, 백제 무왕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보면, 당시 왕비인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절을 짓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미륵사지는 1980년 발굴조사가 시작돼, 2만여 점의 유물이 수습됐다. 미륵사지 석탑에서는 미륵사지의 창견연대 등을 기록한 사리봉안 기록판과 금제사리 항아리 등이 발견됐다. 
 
 화려한 문양의 금제 사리 항아리.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 성낙선
  
이때 발견된 사리봉안 기록판에 무왕의 왕후가 백제 최고 관직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문구가 나와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는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됐다는 설과 다르다.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 것처럼, 무왕이 신라에 향가인 서동요를 퍼뜨려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 결혼을 했다는 내용과도 다르다.
미륵사지 석탑은 탑 한쪽이 무너진 상태였다. 현재 우리가 보는 미륵사지 석탑은 2018년에 복원이 끝난 것으로, 그전에 보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미륵사지 석탑은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탑으로, 1962년에 국보 제11호로 지정됐다. 근처에 미륵사지 당간과, 동탑지, 건물지 등이 있다.
 
 국립익산박물관, 입구가 지하로 걸어들어가야 나온다.
ⓒ 성낙선
 
국립익산박물관

미륵사지에 국립익산박물관이 있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다. 미륵사지 석탑 쪽에서 보면, 박물관이라고 할 만한 건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박물관은 특이하게도 관람객들이 지하로 걸어서 들어가게끔 설계됐다. 지붕에는 둔덕을 쌓아서 낮은 언덕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다른 박물관들이 거대하고 높은 건물로 지어진 것과 대조적이다.

박물관을 그런 형태로 지은 데는 미륵사지 석탑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있어 보인다. 문화관광체육부에서 펴내는 정책주간지를 보면, 실제 이 박물관은 "미륵사지가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기 위해 시설의 절반 이상을 지하화하는 등 지상 노출을 최소화하여 '보이지 않는 박물관'으로 설계됐다"고 한다.

국립익산박물관은 2020년에 개관했다. 부지는 3만 9695㎡로 지하 2층, 지상 1층 규모로 건립됐다. 미륵사지를 비롯해, 익산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유물은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와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 항아리 등이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보살 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성낙선
 
금제사리 항아리는 보기에도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다. 항아리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보통 섬세한 게 아니다. 보는 사람마다 넋을 잃고 바라본다. 하지만 이곳에서 정작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작은 '보살 손'이다. 유리관 안에서 팔뚝이 끊어진 손 하나가 은은한 빛을 발한다. 그 손이 금제사리 항아리 이상으로 정교하게 조각됐다.
손 모양이며 크기가 실제 사람 손과 흡사해 보인다. 손목에 달린 장신구까지 완벽한 조형미를 갖췄다. 생김새가 어찌나 부드러운지, 이렇게 우아한 자태를 가진 유물은 또 처음이다. 그 손이 내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손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지나간다.
 
 왕궁리 유적지에서 출토된 건축 재료들. 언젠가는 다시 쓰임새가 생길 것이다.
ⓒ 성낙선
미륵사지가 있는 금마면은 백제 무왕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이 지역이 한때는 '마한 전체 총왕의 도읍'이었다고 한다. 무왕은 이 일대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 백제 중흥의 꿈을 펼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꿈은 끝내 현실이 되지 못하고 전설로 남았다. 무왕 때 지어진 왕궁도 미륵사도 결국엔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마저도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백제 왕궁과 미륵사 모두 석탑 하나씩을 남겼다. 묘한 인연이다. 이 석탑들마저 없었으면, 왕궁리 유적지도 미륵사지도 남아 있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도리 석불입상처럼, 이 두 개의 석탑도 그동안 멀리서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전설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 둘이 결국엔 백제의 수호신이 되어 옛날의 영광을 되살리고 있는 걸 보면, 그런 생각도 공연한 망상은 아닐 것이다.
 
 치미. 미륵사지에서 출토됐다. 국립익산박물관.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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