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하다"는 느낌 받을 수 있는 책방, 대학로에 있습니다
[전윤서 기자]
▲ 풀무질로 내려가는 입구 |
ⓒ 전윤서 |
클럽이나 카페가 아닌, 책방이 '핫플'이던 시절이 있었다. 80년대 민주항쟁 시기의 인문사회과학서점에는 젊은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생각의 불꽃을 태웠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은 행동으로까지 이어지곤 했다.
오늘날 서울 대학가에 인문사회과학서점은 단 두 곳만이 남아 있다. 그 중 한 곳인 풀무질은 1985년부터 39년째 혜화동 성균관대 정문 앞에 장승처럼 우뚝 서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책방 입구에는 초록색 물감으로 온갖 사상가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조심스레 그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많은 책으로 둘러싸인 넓고 아늑한 공간이 등장했다. 이곳에서 지난 달 17일, 풀무질의 대표 김치현씨를 만났다.
성균관대 사회학과 12학번으로 혜화동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치현씨는 입사하기 한참 전부터 풀무질을 드나들었다. 이곳에서 책도 읽고, 대학 부전공에서 만난 동기들과 삼삼오오 모여 공부도 하는가 하면, 한때는 팟캐스트도 진행했다고 한다.
"그때 친구들이랑 '얘들아, 우리가 풀무질 살려야 해' 이러면서, 사장님이 책 정리하시는 거 거들고 그랬죠."
풀무질에 대한 애정이 이곳에 입사까지 하게 만든 걸까. 여성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그와 풀무질이 지향점은 어딘지 모르게 잘 어울렸다. 2020년 입사 후 2년 만(2022년 1월)에 대표 자리에 오른 그가 꿈꾸고, 색칠해 나가고 있는 풀무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봤다.
나 지금 여기 서 있는데, 당장 뭐 할 수 있어?
풀무질에서는 수년째 다양한 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 달에 한 번 금요일마다 모여 지정한 책에 관해 토론하는 '동물권 읽기 모임'과 '페미니즘 읽기 모임'이 그 예다. 햇수로 3년째 꾸준히 해오고 있는, 풀무질을 대표하는 정기 행사다. 밤 9시에 만나 다양한 이슈들에 관해 이야기하며 다과를 즐기는 '잡담밤'은 치현씨가 가장 좋아하는 행사다. 그 외에도 이곳에서는 다양한 세미나와 워크숍이 꾸준히 열리고 있다.
"올해는 강연식의 행사는 조금 줄이고 싶었어요. (강연식 행사를 하면) 다들 와서는 고개만 끄덕이다가 집에 가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죠. 그래서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이상한 행사를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연극 배우로 활동하면서 책방의 대부분 업무를 맡아 진행 중인 치현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어떻게 하면 풀무질의 더 큰 가능성을 발굴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그는 할당량을 채우기는 쉽지만,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행사는 더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2023년은 '도전의 해'였다고 한다. 강연은 줄이고,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행사를 많이 시도했다.
▲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인 풀무질 김치현 대표 |
ⓒ 김치현 씨 제공 |
풀무질에 오는 데 장벽이 느껴진다는 피드백을 종종 받는다는 치현씨. 그의 고민 중 하나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갖는 부담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데 있다. '~이즘(ism)'을 굳이 전면에 걸지 않는 이유도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그는 인문사회과학서점을 떠올리면 으레 가져야만 할 것 같은 '대단한 의식'도 필요 없다고 했다. 책방은 누구든지 쉽게 올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파리 데이와 같은, 사람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으면서도 실용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녹인 행사가 기획됐다.
"마로니에 공원 가서 시위하는 것도 중요하죠.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만 굴러가진 않으니까요."
의식을 바꾸는 것도, 제도를 고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에 자신이, 책방이 할 수 있는 건 따로 있다고 했다.
"의식 개혁 같은 큰 걸 바라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행사들에 참여하면, 자연스럽게 그 속에 든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죠. 그러고 집에 가서 자기 전에 또 떠올리겠죠. 그러면서 주변이, 사회가 조금씩 바뀌지 않을까요?"
극도로 분화한 현대 사회에서, 타인과 무언가를 공통으로 공유하는 경험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안정감을 느낀다. 이때 설령 의견이 합치되지 않고 서로 부딪힌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튀는 불꽃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는 이러한 감각을 모두와 함께 나누려 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과 사람이, 생각과 생각이 만날 수 있는 행사를 기획하고 싶다고 했다.
다 같이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대부분의 책방은 책을 구매해야만 읽을 수 있다. 그런데 풀무질의 구조는 조금 독특하다. 사면이 책장으로 빽빽하게 둘려 있고, 책방 정중앙에는 마치 도서관처럼 책 읽기 좋은 넓은 책상이 놓여 있다. 이런 개방된 구조를 유지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풀무질에서 판매하는)커피가 천 원이던 시절, 한동안 중년 여성분이 커피 한 잔을 시켜서 오후 시간 내내 책을 읽다가 가시는 거예요. 커피 가격을 2천 원으로 올리니까 다른 데서 사 오시더라고요. 쭈뼛쭈뼛 들어오셔서 볼 거 다 보세요. 그런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갈 데가 없으면 풀무질이라도 오는 게 어디야. 풀무질이 그러라고 있는 거 아닌가?"
풀무질은 생각들이 모이는 '사상의 아궁이'이자, 온정으로 사람까지도 포용하는 공간이다. 그러면서 그는 약 4년 전의 면접 날을 떠올렸다. 풀무질에 입사해서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이곳을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답하고는, 면접관과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안전함'은 그에게 중요한 키워드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과, 그들이 가진 생각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한 그는 최근 그 목표를 꽤 달성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모임이 끝나고 마무리를 할 때, 가끔 이런 얘기를 들어요. '이곳이 안전하다고 느껴요.' 저한테는 그게 최고의 칭찬이에요. 여기에 있는 시간 동안 내가 안전하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는 말이요."
결국 세상은 함께 살아가야 한다. 만남과 연결의 고리를 만드는 책방은 하나의 작은 세계다. 누구나,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는 그 세계 속에는 다양한 것들이 모여 만든 또 다른 현실이 있다.
세상이 발전하고 매체가 발전하며 대화보다 독백으로 가득 찬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시끄러운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차분하게 책을 읽고 자신만의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풀무질은 그 어떤 침입도 방해도 없는, 어느 곳보다도 안락하고 안전한 공간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풀무질 누리집 - '잡담밤' 소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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