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환자는 성탄절을 가리지 않는다”… 휴일 문 연 소아과 현장
몰려든 환자·보호자로 복도까지 가득
의사도 휴일 반납…“힘들지만 보람”
정부, 달빛어린이병원 100곳 확대 계획
24일 오전 8시20분 경기도 광명 준소아청소년과의원의 불이 켜졌다. 간호사들은 접수용 키오스크 전원을 켜고 의료 장비를 점검하며 분주히 환자를 받을 준비를 했다. 벽 한쪽에 걸린 자그마한 산타 그림과 초승달 모양 전구만이 크리스마스이브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환자분들 들어오셔서 접수하세요!”
오전 8시33분 간호사의 외침과 함께 진료 접수가 시작됐다. 이미 복도에는 환자 5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첫 환자는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었다. 감기 증상으로 병원을 찾았다는 60대 A씨는 “동네에 문을 여는 병원이 없어 버스를 타고 왔다. 7시50분에 도착해 병원 앞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오픈을 기다렸다”고 말했다.
본격 진료를 시작하는 오전 9시에 가까워질수록 환자들이 밀려들었다. 김재현(32)씨도 아내와 일찌감치 접수를 마치고 대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23개월 된 아이가 새벽 내내 토를 해 병원을 찾았다고 했다. 오전 8시에 집을 나선 김씨는 “여기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라며 “다른 병원에서는 오전 6시 반부터 기다린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크리스마스에는 고양시로 가족 나들이를 가려고 했는데 아이가 아파서 어렵게 됐다”며 아쉬워했다.
오전 9시, 병원에는 환자와 보호자를 합해 36명이 대기 중이었다. 16명가량 앉을 수 있는 대기실 소파가 꽉 차자 사람들은 복도를 서성이며 이름이 호명되길 기다렸다.
9시10분쯤 병원에 도착한 B씨(32)도 복도에 서서 5개월 된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20명의 환자가 대기 중이었다. B씨는 “새벽에 아이가 39도까지 열이 올라 큰 병원 응급실에 갔지만, 환자가 너무 많아 진료가 불가능하다는 말에 그냥 돌아와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에 처방받은 해열제로 아이의 열을 낮춘 뒤 연휴 중 문을 여는 소아청소년과를 찾아야 했다.
‘소아과 대란’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휴일에도 환자를 맞는 병원은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이날 문을 연 이 의원도 그중 하나다. 최원준(59) 원장은 병원 문을 연 2000년부터 24년째 휴일 없이 진료를 이어오고 있다.
그의 병원은 지난 6월 보건복지부가 지정하는 ‘달빛어린이병원’으로 선정됐다. 이에 최 원장은 야간 진료를 편성하고 휴일 진료 시간을 연장했다. 달빛어린이병원이란 야간과 휴일에도 문을 여는 병원으로, 의료기관의 자발적 신청과 지자체의 승인을 거쳐 지정된다.
최 원장은 “맞벌이 부부의 어려움을 알기에 시작한 일이었다”며 “처음엔 일요일 진료를 6개월정도만 하려 했는데, 환자들과의 ‘약속’이라는 생각에 그만둘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쉼 없는 진료는 본인에게는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을 빼앗는 것이기도 했다. 최 원장은 “이미 다 커버린 아들과 딸의 입학식과 졸업식에 단 한 번도 가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며 “가족의 이해와 도움 없이는 이 일을 못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오후 6시까지 진료를 마친 뒤 모처럼의 가족 행사에 간다고 했다. 그는 “늦은 시간이지만 오랜만에 저녁이라도 같이 먹기로 했다”며 미소를 지었다.
같은 날 오후 1시 서울 서초구의 달빛어린이병원인 연세곰돌이소아청소년과. ‘콜록콜록’ 기침하는 아이들과 부모들이 점심도 거른 채 불 꺼진 컴컴한 병원 안을 지키고 있었다. 오전 접수가 마감된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대기하면서 진료 재개를 기다리는 것이다. 병원 측은 이날 오전에만 200명이 넘는 환자가 진료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기다리다 지친 몇몇 아이들은 대기실 한쪽의 소파에 패딩을 이불 삼아 누웠다. 한 남성은 아픈 아이의 팔을 주무르면서 접수가 시작되진 않았는지 연신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서울 중구에 사는 박순규(74)씨는 잠든 두 손주를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박씨는 “아이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대구에서 모처럼 놀러 왔는데, 밤새 열이 떨어지지 않아 걱정했다”며 “딸이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병원을 찾아내 이 병원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오후 1시30분 한 아이의 어머니가 접수처에 서자 조용히 대기하던 보호자들이 다급히 그 뒤를 따라섰다. 순식간에 병원문 밖까지 암묵적인 대기 줄이 형성됐다. 별도의 안내와 대기 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복귀한 한 간호사가 접수 명단을 수기로 적도록 안내했다.
진료 재개를 약 20분 앞둔 시점에서 보호자를 포함한 대기자 수는 50명을 넘어가고 있었다. 결국 병원 측은 접수와 진료를 조금 앞당겨 재개했다.
이내 대기실 3곳과 병원 밖 복도에 마련된 자리가 전부 찼다. 상대적으로 늦게 병원으로 온 아이들은 앉을 자리가 없어 병원 바닥에 쭈그려 앉거나 보호자 품에 안겼다. 이런 복작거리는 상황이 낯설은 듯 울음을 터트리거나, 이유식을 게워 내는 아이도 있었다. 어나원(8)양은 “기다리는 동안 지루해서 아빠랑 TV도 보고 젓가락 게임이랑 묵찌빠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어양은 낮 12시30분에 병원에 도착해 오후 2시5분쯤 진료를 마쳤다.
성탄절 연휴 기간이라 유독 환자가 많은 건지 묻자 송종근(53) 원장은 “일요일엔 늘 환자가 많다”며 “점심시간을 넘겨서까지 진료를 볼 때는 힘에 부치기도 한다”라고 답했다. 그는 달빛어린이병원을 운영하기 전부터 조간 진료와 야간 진료를 해왔다.
이는 소아청소년과의원 운영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게 송 원장 설명이다. 그는 “야간이나 주말에 근무할 직원이나 의사 선생님 구인이 항상 어렵다”며 “최근 2~3년 동안 급격한 인건비 상승으로 경영상의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현실적인 문제로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송 원장은 “치료받은 어린 환자들이 고맙다고 그림을 그려서 선물해 주거나 가끔 스티커 같은 걸 붙여 주고 가면 흐뭇한 마음과 함께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지난 1일 기준 전국에서 운영 중인 달빛어린이병원은 58곳이다. 올해 초 34곳에서 24곳 늘어났다. 지난해 야간과 휴일 달빛어린이병원 진료 건수는 약 108만건으로, 전년 56만여건에 비해 두 배가량 증가했다. 달빛어린이병원 수요도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월 ‘소아의료체계 개선대책’을 내놓으면서 2027년까지 달빛어린이병원을 100곳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용희 보건복지부 행정사무관은 “지속적으로 확대를 추진 중”이라며 “기존 수가를 1.2~2배 인상했으며 내년부터는 일부 달빛어린이병원에 운영비를 지원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다. 휴일 아침 달빛어린이병원에선 기다란 ‘웨이팅’이 벌어지고 많은 병원들이 항시적인 운영 어려움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또 울산 지역에는 달빛어린이병원이 단 한 곳도 없는 등 지역 불균형도 존재한다.
이진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수가 인상은 현장에서 현실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면서도 “아직 목표치의 절반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부가 현장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추가적인 지원을 이어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방유경·이서현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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