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엑스포 흑역사'... 이게 끝이 아닐까 두렵다
'올해의 ○○'은 2023년을 마무리 하는 기획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 도전, 실패,인물 등 한 해 동안 일어났던 일들 가운데, 꼭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이야기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오태규 기자]
▲ (벨트호벤=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벨트호벤 소재 ASML 본사를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가운데)과 함께 방문해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오른쪽)의 안내를 받고 있다. 2023.12.13 [공동취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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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외교는 '외교의 꽃'이라고 불립니다. 실무자들이 물밑에서 치열한 밀고당기기를 통해 마련한 협상안에 마지막 화룡점정을 찍는 행사가 정상외교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정상외교에는 실패가 없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입니다.
물론 정상회담이 모두 미리 만들어진 협상을 추인만 하는 건 아닙니다. 실무자 수준에서 도저히 결정할 수 없는 내용을 정상들이 만나 최종적으로 논의하고 결단하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정상회담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두 정상은 이 회담에서 실무자들이 결정할 수 없는 핵 폐기와 제재 해제의 수준을 놓고 치열하게 담판을 벌였습니다.
정상외교는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위 외교관의 행사이므로 의전도 화려합니다. 그중 상대국 정상의 공식 초청을 받아 이뤄지는 국빈 방문은 21발의 환영 예포 발사와 의장대 사열 등 기본 사양을 포함해, 초청국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환대를 제공합니다. 이렇듯 정상외교에서 나타나는 의전의 화려함과 내용의 중요성을 두루 고려할 때, 정상외교를 외교의 꽃, 외교의 정수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13차례 중 7번이 국빈 방문, 공들인 일본·프랑스는 못 해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1월부터 2월만 빼고 매달 해외에 나갔습니다. 9월과 11월 각기 2번을 포함해 마지막 12월 네덜란드까지 모두 13차례 외국을 방문했습니다. 자주 외국을 나가다 보니까 '자주 입국한다'라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 가운데 국빈 방문이 무려 일곱 차례(아랍에미리트, 미국,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영국, 네덜란드)였습니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5월), 나토 정상회의(7월), 한미일 정상회의(8월), 아세안 및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9월), 유엔 총회(9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 정상회의(11월) 등 다자회의를 제외하고, 양자 방문만 보면 거의 국빈 방문으로 채웠습니다.
양자 방문 중에서 국빈 방문이 아닌 경우는 일본과 프랑스 정도가 눈에 띕니다. 프랑스는 6월과 11월 부산 엑스포 유치 활동을 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한 나라를 두 차례나 방문했는데도 국빈 방문을 하지 못했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는 올해만 7차례 정상회담을 할 정도로 우정을 과시했지만, 일본의 국빈 초대를 받지 못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잦은 해외 방문은 방문 횟수와 비용에서 신기록을 세웠지만, 많은 구설수를 낳았습니다. 비용은 이미 배정된 249억 원에 예비비 329억 원을 보태어, 전부 578억 원을 썼습니다. 역대 최고액입니다. 연중 최다 국빈 방문 기록이기도 합니다. 내년에는 정상외교 예산으로 올해보다 2.67배나 는 664억 원을 배정해 놨습니다. 효과만 많이 낸다면야 비용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과연 윤 대통령이 펑펑 쓴 만큼 효과를 거뒀는지는 매우 의문입니다.
네덜란드 대사 초치에서 엿볼 수 있는 겉치레 중심의 '허영 외교'
마지막 방문지인 네덜란드의 국빈 방문은, 윤 대통령 해외 방문의 총체적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우선 연말에 네덜란드 한 나라만 꼭 집어 국빈 방문을 해야 할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윤 정권은 유난히 '반도체 동맹'을 강조했지만, 반도체 동맹은 중국 견제 차원에서 미국 주도로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인 ASML과 삼성전자 간에도 나라가 끼어들지 않아도 될 만큼 긴밀한 협력관계가 형성돼 있는 상황입니다. 또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정상회담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이 강조하는 만큼 반도체 동맹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네덜란드 쪽은 오히려 한국의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에 더욱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뤼터 총리는 7월에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 내년 초 새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과도내각을 이끄는 김빠진 인물입니다. 굳이 서둘러 정상회담을 할 상대가 아닙니다.
11월에 영국과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바로 인접 지역에 있는 네덜란드를 들르지 않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 국빈 방문을 꾸린 것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무리한 일정이고 낭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빈 방문을 열흘 앞두고 한국 쪽의 과도한 의전 요구에 대한 불만으로, 네덜란드 정부가 네덜란드 주재 한국대사를 초치한 사건은, 내용보다 외양만 추구하는 윤석열식 보여주기 외교가 낳은 참사입니다. 한국 외교사에 기록될 흑역사입니다.
외교부는 이 사건이 불거지자 부랴부랴 '항의가 아니라 협의 차원'이었다고 해명했지만, 독도나 과거사 분쟁 때 일본 대사를 초치해 항의하곤 했던 한국 정부의 그간 모습을 지켜봤던 눈 밝은 시민들이 속아 넘어갈 리가 없습니다. 대사 초치란 한 나라 정부가 상대국에 준엄하게 항의할 일이 있을 때 취하는 아주 높은 수준의 외교 행위입니다.
▲ 윤석열 대통령이 11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2030 엑스포 부산 유치 불발과 관련해 대국민 담화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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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정권은, 윤 대통령은 13차례 해외 방문을 포함해 올해 외교적으로 가장 힘을 쓴 것은 2030 부산 엑스포 유치 활동이라고 홍보해 왔습니다. 9월 유엔 총회 때는 윤 대통령이 기네스북 기록 수준으로 짧은 기간 동안 45개국 정상을 만나 부산 엑스포 지원 활동을 맹렬하게 펼쳤고, 이런 여파로 코피까지 흘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엑스포 유치 투표 직전에는 윤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관계자의 노력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와 격차를 크게 좁힌 데 그치지 않고 역전이 눈앞에 온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119대 29의 대참패로 끝났습니다. 엑스포 유치를 위해 정부가 쓴 예산이 5744억 원이나 되니, 대략 한 표를 얻는 데 무려 200억 원을 쏟아부은 셈입니다.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는 단지 예산의 낭비에 그치지 않습니다. 윤석열 외교의 총체적 난맥이 집약된 결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엑스포 유치 실패 전후 과정이 윤 정권의 낯 뜨거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윤 대통령은 엑스포 유치가 실패로 끝나자, 바로 다음 날인 11월 29일 이례적으로 직접 사과했습니다. 좀처럼 쓰지 않던 '저의 부족'이라는 말까지 동원하며 머리를 숙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과와 함께 잘못된 정보와 판단을 제공한 책임자들의 문책이 잇따를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측은 보기 좋게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 윤석열 대통령, 이재용 등 기업총수들과 깡통시장에서 시식 윤석열 대통령이 6일 부산 중구 깡통시장에서 기업 총수들과 함께 떡볶이 튀김 빈대떡을 시식하고 있다. 오른쪽 부터 정기선 HD현대 부사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윤 대통령,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재원 SK수석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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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외교부 장관도 경질된 것이 아닙니다. 막대기만 꽂아도 여당 후보가 당선된다는 강남 지역구 출마를 위한 교체로 보입니다. 윤 대통령 못지않게 외국 순방에 열을 냈던 한덕수 총리도, 청와대에서 엑스포 업무를 총괄한 장성민 미래기획관도 건재합니다. 윤 대통령 자신이 가장 크게 책임을 질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문책하지 않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런 낌새는 전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과 다극화 흐름의 배치
윤 정권은 올해 가장 잘한 외교로, 8월의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과 한미일 공동성명을 내세울 것입니다. 미국과 일본으로서는 2차대전 이후 중국과 러시아(옛 소련)를 겨냥해 그토록 구축하려고 한미일 삼각동맹 체제가 이 회담으로 이뤄졌으니, 얼마나 쾌재를 불렀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것도 한국이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에 일방적으로 양보해, 미·일로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식으로 성사된 것이니 말입니다. 오죽하면 미국의 유력지 <뉴욕타임스>가 70년 동안 이루지 못했던 미국 외교의 꿈을 이뤘다고 논평했겠습니까? 한국으로서도 성과가 없는 건 아닙니다. 북한의 도발에 대해 더욱 효과적으로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역효과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우선 북한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8월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으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은 9월 13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회담했습니다. 한미일 공동 압박에 대한 반격의 성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후 북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무력시위의 강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억지력을 키우려다가 오히려 한반도 위기만 높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월 18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인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 공동기자회견에서 미국 취재진의 추가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석열 대통령, 바이든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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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에 참여하고 있는 나라는 48개국인데 한국과 이탈리아가 얻은 표의 합과 비슷합니다. 또 이스라엘의 가자 공습 즉각 중지를 촉구하는 유엔 총회 결의안(10월)에 반대(14) 또는 기권(35)한 나라의 수와 엇비슷합니다. 이것은 윤석열 외교가 다극화하는 세계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런 대세를 읽지 않고 내년에도 계속 미·일 추종, 이념, 가치 외교에 몰빵하다가는 부산 엑스포 참사보다 더 큰 화를 불러올지 모릅니다. 한 해를 보내고 곧 새해를 맞이하면서 그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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