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부모·동생 다 구하고 숨졌다…"집에서 나오지 말지" 통곡 [방학동 화재 참변]
“새까맣게 타가지고. 아이고 어떡해. 마지막에 나오다가 못 빠져나온 거야...”
서울 노원에 위치한 한 장례식장. 성탄절 새벽 서울 도봉구 방학동 고층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울음소리가 텅 빈 장례식장 복도를 가득 채웠다.
이날 새벽 아파트 3층에서 시작된 불길이 외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같은 라인 10층에서 70대 부모님과 동생과 함께 잠을 자고 있던 임모(38)씨는 검은 연기와 탄 냄새에 화재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이에 임씨는 처음으로 119에 화재 신고를 한 뒤, 가족들을 모두 깨워 먼저 대피시켰다. 임씨는 마지막으로 집에서 탈출했지만 결국 11층 계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도봉소방서에 따르면 임씨의 사인은 연기 흡입에 따른 질식으로 추정된다. 임씨의 유족 A씨는 “가족들을 다 깨워서 대피시키고 제일 마지막에 나왔다. 원래 가족에 대한 애정이 큰 조카였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임씨의 동생도 연기 흡입으로 호흡기에 문제가 생겨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동생은 “집에서 나오지 말고 있었어야 했어 형...”이라고 반복하며 연신 울먹였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연휴 마지막 날이자 성탄절인 25일 새벽 4시 57분쯤 서울 방학동의 23층 아파트에서 불이 나 임씨 등 2명이 숨지고 30명이 다쳤다.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사망자 2명은 모두 30대 남성으로, 가족들을 구하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사망자인 박모(32)씨는 화재가 발생한 3층에서 바로 위층인 4층 거주자였다. 그는 아래층에서 불길이 치솟자 아내와 함께 각각 생후 7개월과 2세인 자녀를 구하기 위해 “(아이) 받아주세요”라고 외친 뒤, 생후 7개월 아이를 안은 채 4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박씨는 갓난아이를 이불에 싸 충격을 최소화했지만, 자신은 결국 숨졌다.
2세 아이를 재활용품 포대에 먼저 던져놓고 뛰어내린 박씨의 아내는 어깨 골절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박씨의 두 자녀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 유족들은 현재 장례절차를 논의 중이다. 주민들은 “행복한 크리스마스인데, 가족을 구하려다 변을 당해 안타깝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극적으로 생명을 구한 이도 있었다. 아파트 20층에 거주하는 71세 박모 할머니다. 박 할머니는 79세 남편 유모씨과 함께 아파트 20층 복도에서 발견됐다. 소방서 측은 계단으로 탈출하려고 하다가 연기 흡입으로 쓰러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씨는 현재 의식을 회복했고, 박 할머니는 30번 넘는 심폐소생술 끝에 호흡이 돌아왔다.
며느리 신모(41)씨는 “오전 7시 소방서에서 연락을 받고 놀라서 뛰어왔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회복 중인 상태”라며 “밑에 거주하시는 분들은 괜찮은데, 시부모가 기도삽관 수술을 받으셔서 연기에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최초 화재가 발생한 3층에 거주하던 70대 노부부도 베란다 창문을 통해 뛰어내렸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로 알려졌다. 다만 탈출 이후 연기 흡입으로 모두 심폐소생술을 받았다.
이날 화재는 3시간여 만인 8시 40분쯤 진화됐지만 모두 잠이 든 시간대에 발생해 주민들의 피해가 컸다.
소방에 따르면, 화재가 난 아파트에는 스프링클러와 방화문이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 해당 아파트는 2001년 완공됐는데, 당시는 설치 의무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화재는 3층에서 발생했지만 아파트 내부 계단 통로가 굴뚝 역할을 하면서 연기가 삽시간에 고층으로 타고 올라갔다. 화재로 인한 그을음도 15층까지 번졌을 정도다. 바람에 의해 옆 라인으로 연기가 흘러 들어가기도 했다.
소방당국과 경찰은 26일 현장 합동 감식을 통해 정확한 화재 원인을 밝힐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저층에서 발생한 화재의 경우 무조건 뛰어내리기보단 화장실 욕조 등으로 대피하길 권고한다.
공하성 우석대 교수는 “이번 화재와 같이 저층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계단을 통해 연기가 타고 올라오는 경우라면, 옷가지 등을 물에 묻혀 문틈을 막아야 한다”며 “베란다를 통해 불길을 들어오면 창문을 막고, 화장실 욕조에 물을 채운 뒤 대피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래된 아파트의 경우 휴대용 방독면을 비치하는 것도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소방 관계자도 “화재가 발생하면 뜨거워서 뛰어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고층에선 머리부터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물을 틀어 놓은 채 화장실로 대피하고, 소방과의 연락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성탄절 새벽 화재로 긴급 대피한 주민들은 한숨을 돌렸다. 단지 내 마련된 임시대피소에서 주민들은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못 볼 줄 알았잖아” “진짜 죽을 뻔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다” 등 서로 포옹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슬리퍼와 잠옷 차림으로 긴급하게 대피한 사람도 보였다.
한 주민은 “화재 당시 연기로 인해 어디가 계단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실내가 컴컴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연기 흡입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한 10대 주민은 “사이렌 소리에 깨 집에서 뛰쳐나왔다”며 “연기를 마셔서 어지러웠다. 지금은 회복된 상태다”라고 말했다.
도봉구청은 현장에 통합지원본부를 꾸리고, 재난 구호 키트 등을 제공하는 등 이재민 구호활동에 나서고 있다. 현재까지 접수된 피해 가구는 17가구로 전해졌다.
이찬규·김대권·김정은·이아미 기자 lee.chank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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