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인승 배로 1만4000명 구했다"…한국전쟁 성탄절 기적 띄운 WP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는 흥남철수작전이 성탄절 이브인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WP)지에 소개됐다. 흥남철수작전은 한국전쟁이 벌어진 1950년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약 25만명의 북한군과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함경남도 흥남항에 집결한 미군과 한국군이 피란민 9만여 명과 함께 빠져나온 대규모 철수 작전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철수 작전이 성공적으로 완료돼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려 왔다.
WP는 24일 ‘한국전쟁 크리스마스의 기적: 59인승 배로 어떻게 피란민 1만4000명을 구했나’라는 기사를 통해 레너드 라루 선장이 이끌던 미군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기적의 배’라는 별명을 얻게 된 사연을 전했다. 1939~1945년 2차 세계대전 때 대서양 전투에 참전했고 독일 U보트와의 전투 등에서 살아남았던 라루 선장은 미군이 한국전 때 적군에 포위된 자국 군을 지원하기 위해 화물선을 투입하기로 결정하면서 빅토리호와 함께 참전하게 됐다.
연료ㆍ트럭ㆍ탄약 등 군수물자 수송 선박이었던 빅토리호를 이끌던 라루 선장은 1950년 12월 9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명령에 따라 흥남철수작전이 전개되자 흥남항 앞바다에 정박했다. 라루 선장은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이 겹겹이 쌓은 포위를 뚫고 나온 10만여 명의 미군ㆍ한국군에 9만여 명의 피란민이 한꺼번에 흥남항에 몰려든 장면을 목격했다. 흥남항 부두에는 연합군의 북진 때 그들을 환영했던 민간인 등 월남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정원 59명의 230배 넘는 1만4000명 태워
라루 선장은 그 자리에서 빅토리호에 선적된 군수물자를 버리고 피란민을 태울 것을 결심했다. 길이 450피트(약 137m), 폭 50피트(약 15m) 규모의 빅토리호는 승무원 35명, 장교 12명에 승객 12명까지 총 59명이 승선할 수 있도록 설계됐지만, 삽시간에 피란민 1만4000명이 들어찼다. WP는 “사람들은 가슴을 맞대고 섰고 일부는 제트연료(선박유) 드럼통 위에 자리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송곳 하나 들어갈 틈 없이 가득찬 인파를 태운 빅토리호는 12월 23일 흥남항을 출항했다.
라루 선장은 1960년 디스위크 지와의 인터뷰에서 부산으로 향했던 28시간의 당시 여정을 떠올리며 “우리는 적 기뢰를 탐지하거나 파괴할 무기도 없는 배로 적 기뢰가 매설된 해역을 마주했다. 작전 중인 공산군 잠수함이 우리를 손쉽게 발견하고 어뢰로 침몰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또 피란민들이 몸을 의지하고 있던 제트연료 드럼에서 불꽃 하나만 튀어도 배 전체가 장례식장 장작더미로 변할 수 있었다고 아찔했던 상황을 술회했다.
빅토리호는 약 450해리(833㎞)의 여정 끝에 195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부산이 퇴각 군인들과 피란민들로 넘쳐난다는 이유로 배를 돌려보내면서 빅토리호는 다시 7시간여 항해 끝에 약 80㎞ 떨어진 거제도 장승포항에 닻을 내리게 됐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아침이었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피란민들은 그들을 태운 화물선이 부두를 떠나자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고 한다. 빅토리호 일등항해사로 피란민 탈출을 도왔던 밥 러니는 과거 “피란민들은 이제 막 자유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얼굴에는 벅찬 기쁨 같은 표정이 안 보였다”고 말했다고 WP는 전했다. 정원의 230배가 넘는 사람들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 빅토리호는 단일 선박으로 가장 많은 인원을 구조한 배로 기네스북 기록에 올랐다.
1만4000명의 피란민 속에는 배에서 새 생명을 얻은 신생아 5명이 있었다. 이들 5명을 두고 미군은 그들이 알고 있는 한국 단어를 이용해 ‘김치 베이비’라는 이름을 붙였다.
WP, 흥남철수작전과 문 전 대통령 인연 소개
문 전 대통령은 흥남철수와 관련해 당시 “제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항해중이던 12월 24일이 되자 미군들이 피란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사탕 한 알씩 나눠줬다고 한다. 비록 사탕 한 알이지만 참혹한 전쟁통에 피란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눠준 따뜻한 마음씨가 늘 고마웠다”고 했었다.
라루 선장, 선종 후 시성 운동 본격화
1952년 퇴역 때까지 빅토리호를 이끌었던 라루 선장은 1954년 뉴저지에 있는 세인트폴 베네딕트회 수도원에 입회해 마리너스라는 이름의 수도사가 됐다. 이후 2001년 87세 나이로 선종할 때까지 47년 동안 수도원 밖을 나가지 않았다.
1만4000명의 목숨을 구한 라루 선장은 2019년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됐고, 2021년 6월에는 시성(諡聖ㆍ성인으로 추대함)을 위한 다음 절차로 이행하는 미국 가톨릭주교회의 표결에서 99%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라루 선장은 2020년 12월 당시 국가보훈처에 의해 6ㆍ25 전쟁영웅으로도 선정됐었다.
워싱턴=김형구 특파원 kim.hyoung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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