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국보 청자매병은 어디에 쓰는 물건이었을까" 생활 속 도자기를 찾아서

성선해 2023. 12. 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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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그릇부터 문방구·악기까지 실용적인 예술품 '자기'

흙으로 자기를 빚은 뒤 표면에 칼로 여러 마리 학과 구름을 새기고, 그 속에 백토·흑토를 메워 무늬를 만든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靑磁 象嵌 雲鶴文 梅甁), 커다랗고 둥근 형태가 보름달을 닮은 백자 달항아리. 이들은 나라에서 지정해 법률로 보호하는 문화재인 국보(國寶)이자, 교과서 등 여러 매체에 등장하는 단골손님이죠. 고려청자나 조선백자 같은 자기들은 주로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보니 제작 연도나 기법을 외우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이들이 '왜' 제작됐는지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실용적인 예술품, 자기(瓷器)에 대해 알아봤어요.

왕희재(서울 마포초 5) 학생기자·김태연(인천 진산초 4) 학생모델과 추승찬(서울 역촌초 5)·김서호(서울 자곡초 4·왼쪽부터) 학생기자가 경기도자박물관에서 우리나라 자기에 대해 알아봤다. 사진=이대원(오픈스튜디오)

자기는 여러 박물관에서 만나 친숙하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와는 별 관련 없는 과거의 유물로 인식되기도 하죠. 하지만 자기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생활용품이기도 해요. 이들이 제작된 시대적 배경과 제작 목적을 알면 자기와 쉽게 친해질 수 있죠. 김서호·왕희재·추승찬 학생기자와 김태연 학생모델이 우리나라 자기에 숨은 이야기를 알아보기 위해 경기도자박물관을 찾았어요. 김진영 학예연구사가 자기의 개념·역사·제작 과정 등을 살펴볼 수 있는 박물관 1층 도자문화실에서 이들을 맞이했죠.

서호 학생기자가 "도자기는 도기와 자기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도기와 자기는 어떻게 다른가요"라고 질문했어요. "도기는 보통 강가·논바닥 등 해발고도가 낮은 지역에서 채취한 진흙으로 원하는 형태를 빚은 다음 약 1100°C 이하에서 구워낸 것을 말해요. 재료가 되는 흙을 구하기 쉽고, 제작 역시 간편해서 인류가 가장 먼저 창조한 흙으로 만든 그릇이죠. 토기·옹기·오지그릇 등이 해당해요." 또한 옹기를 제외한 도기에는 액체나 기체가 스며들지 못하게 하며 겉면에 광택이 나게 하는 유약(釉藥)을 사용하지 않아요. 한반도에서는 약 8000년 전인 신석기시대부터 도기가 제작됐죠. 포탄형의 빗살무늬토기가 대표적이죠.

청화백자를 감상 중인 김태연 학생모델. 자기는 그 이름이 뜻하는 의미만 제대로 알아도 핵심 정보를 쉽게 인지하고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다.


흔히 청자·백자를 도자기라고 부르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이들은 자기에 해당해요. 자기는 도기와 재료가 되는 태토(胎土)부터 다릅니다. 청자는 철분이 함유된 퇴적토를 정제해 사용하고, 백자는 장석질의 암석이 풍화돼 생겨난 고령토(백토)를 사용하죠. 또한 청자와 백자 모두 유약을 발라 1200°C 이상의 가마에 굽는 과정을 거칩니다.

찻잔에서 시작한 고려청자

자기(磁器)가 한반도에 처음 알려진 것은 삼국시대예요. 백제 무령왕릉을 비롯한 삼국시대 무덤의 부장품과 사찰·유적 등에서 출토된 사례를 통해 중국의 자기를 수입해 사용했음을 알 수 있죠. 9세기, 개인이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을 중시하는 불교의 종파인 선종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차 문화가 성행하게 되는데요. 차를 따라 마시는 사발인 다완(茶碗)을 사용하는 차 문화의 유행은 우리 조상들로 하여금 자기를 직접 제작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했죠. 자기 제품뿐 아니라 그 기술도 유입되며 9세기 후반~10세기께 한반도도 자기 제작에 돌입하게 돼요. 자기의 시대가 열린 겁니다.

12세기(고려) 제작된 청자 음각 앵무문 발. 음식을 담는 용도였으며, 앵무새 세 마리가 구름 사이로 비상하는 모습을 음각했다.

전 세계적으로 그 아름다움이 잘 알려진 고려청자는 다완이 그 시작이었어요. 이후 고려 왕실, 귀족 사회, 불교 사원 등의 수요에 맞춰 여러 종류의 청자가 제작됐죠. "고려시대 청자나 조선시대 백자는 기본적으로 생활용품으로 많이 쓰였어요. 청자는 고려 초 찻잔에서 출발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액체를 담는 매병, 술을 담는 주병, 국물·물을 담는 대접, 술잔·찻잔과 받침, 화로와 같은 사치품, 승려의 공양 그릇인 발우, 향을 피우는 자그마한 화로인 향로, 목이 긴 형태의 물병이자 승려의 필수품인 정병과 같은 사찰의 공양구로 많이 제작됐죠."

생활용품으로 제작된 청자의 예시는 2층 상설전시실에서 살펴볼 수 있어요. 앵무새 세 마리를 음각으로 장식한 '청자 음각 앵무문 발'에는 음식을 담았고, 연꽃과 당초를 음각으로 장식한 표주박 형태의 주전자인 '청자 음각 연당초문 표형 주자'는 물·술을 담는 주전자로 사용했죠. 김 학예사가 "이렇게 생긴 병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요?"라며 전시실 중앙에 있는 '청자 상감 운학유문 매병'을 가리켰어요. 운학유문은 구름·학·버들을 사용한 무늬를, 매병(梅甁)은 아가리가 좁고 어깨는 넓으며 밑이 홀쭉하게 생긴 병을 뜻해요. 매병은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술·물 등의 액체를 담는 그릇이나 화병·장식용으로 사용됐죠. 2010년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고려시대에 침몰한 선박이 발견됐는데요. 이 배에는 여러 청자 매병이 실렸고, 매병에 달려 있던 죽찰(대나무 화물표)을 판독한 결과 꿀·참기름 등의 음식물을 담는 용도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었죠.

청자 상감 운학유문 매병 옆에는 12세기에 제작된 찻잔으로 추정되는 '백자 양각 연판문 잔'이 있었어요. 연꽃잎을 형상화한 우리나라 전통 무늬를 연판문이라 하는데, 이를 평평한 면에 도드라지게 새기는 양각(陽刻)으로 장식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거죠. 태연 학생모델이 "고려시대에도 백자가 있네요?"라며 의아한 표정으로 백자 양각 연판문 잔을 들여다봤죠.

12세기(고려) 제작된 백자 양각 연판문 잔. 차를 담아 마시는 찻잔이었으며, 연꽃을 형상화한 연판문을 양각해 장식했다.


"사실 백자는 청자와 함께 고려 초기부터 제작됐어요. 청자는 철분이 함유된 지표상의 퇴적토를 정제해 만들어요. 반면 백자는 지하에 매장된 장석질의 암석이 풍화된 고령토를 사용해 만들죠. 그래서 청자에 비해 백자는 재료가 되는 태토를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또 청자는 1250°C 내외에서 굽는데 반해, 백자는 1300°C 이상의 온도에서 구워야 해요. 그래서 백자를 만들려면 불을 다루는 기술이 청자를 만들 때보다 더 우수해야 해요.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청자가 백자보다 훨씬 더 많이 만들어졌답니다."

12세기에 이르러 고려청자는 신비로운 비취색이 특징인 비색청자, 표면에 원하는 형태를 음각한 뒤 백토·흑토로 메워 무늬를 만드는 상감청자와 같은 독창적 형태로 발전했는데요. 13세기 중반부터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가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하면서 고려청자 제작은 위기를 맞이해요. 고려 역시 원의 간섭과 물자 수탈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죠. 14세기에는 집권층의 사치, 원나라 말기 발생한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의 침략, 남해안에 출몰한 왜구들의 횡포 등으로 나라 안팎이 혼란해지면서 잠시 안정을 찾았던 양질의 고려청자 제작 산업은 결국 쇠락할 수밖에 없었어요.

분청사기부터 청화백자까지

14세기 말에는 고려의 뒤를 이어 조선이 건국(1392년)됐어요. 조선은 백자로 유명하지만, 조선 초에는 고려 말부터 제작되던 분청사기(粉靑沙器)가 15세기까지 널리 쓰였죠. 분청사기란 청자와 비슷한 태토로 형태를 만든 뒤, 그 위에 백토(白土)를 발라 다시 구워낸 것으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사이 과도기적 형태죠. 청자를 만들던 기술로 백성의 생활에 필요한 자기를 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지만, 15세기 전반부터 조선왕실과 관청에 공납되면서 품질이 향상되고 표현기법도 다양해졌어요.

조선 전기 제작된 백자 철화문 상준. 상준(象樽)은 코끼리 형상을 본 떠 만든 제례용기다. 몸통 윗부분에 원형 입구를 만들어 제사용 음식을 담는다.


소중 학생기자단은 음식을 담는 대접으로 제작된 '분청 상감 사선명 완'을 살펴봤습니다. 그릇 바닥에 상감 기법으로 표시된 '사선(司膳)'은 임금의 식사를 담당하던 고려시대 관서인 사선서(司膳署)를 뜻해요. 여기서 '분청 상감 사선명 완'이라는 이름이 나왔죠. 즉, 고려 말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을 위해 제작된 음식 그릇인 겁니다. 또 경기도 광주 가마터에서 출토된 분청사기 장구(장고·모래시계 모양의 나무통 양면에 가죽을 덧대 만든 타악기)를 통해 자기가 악기 재료로도 쓰였음을 알았죠.

분청사기가 널리 쓰이던 가운데, 백자도 발전 중이었습니다. 원·명나라에서 유행하던 희고 단단한 경질백자 제작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조선은 1467년 경기도 광주에 국영백자가마인 사옹원 분원을 설치해요. 본격적으로 왕실과 관청에서 쓰는 최고 품질의 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한 겁니다. "조선시대 임금부터 대궐 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관청이 사옹원인데, 그 분원이 경기도 광주에 설치된 거죠. 그래서 광주에선 지금도 땅을 파면 백자 파편들이 우수수 쏟아지고, 백자 가마터도 많아요." 김 학예사의 말처럼 광주 전역에는 조선시대 약 500년간 백자를 만들었던 분원의 가마터가 약 350여 개가 분포해요. 이곳에서 왕실용 청화백자는 물론, 궐내에서 허드렛일에 쓰는 그릇까지 다양한 백자를 생산했죠.

16세기(조선) 제작된 백자 장군. 장군은 보통 물·술 등을 담아 옮길 때 쓰는 그릇으로 사용된다. 조선시대 백자의 실용적 사용을 엿볼 수 있다.


사옹원 분원 설치 이후 조선의 백자 제작 기술은 발전을 거듭해, 다양한 일상용품도 제작했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차 또는 술을 담는 용기로 추정되는 '백자 소문 병'과 벼루에 먹을 갈 때 쓰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인 '백자 소문 연적', 향을 피우는 '백자 사자장식뚜껑 사각향로'를 살폈어요. 부엌·서재 등 다양한 생활 공간에 백자가 사용된 것이죠. 가장 유명한 조선백자의 형태 중 하나인 '달항아리'도 볼 수 있었는데요. 정식 이름은 '백자 소문 항아리'이지만, 몸체가 달처럼 둥글기 때문에 흔히 달항아리라 불러요. 현대에 달항아리는 주로 장식용이지만, 당대에는 음식을 저장하고 운반하는 용도로도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백자 이름의 소문(素文)은 이들 표면에 장식 무늬가 전혀 없고 백색으로만 되어있어 붙여졌어요. 희재 학생기자가 "고려의 상감청자가 조선의 소문백자보다 훨씬 화려하네요. 언뜻 생각하면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릇이 더 화려해질 것 같은데 조선의 자기는 왜 오히려 더 단순해졌나요"라고 말했어요.

"조선은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설립된 국가예요. 정제되고 정갈한 순백의 백자는 사치를 배격하고 정신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성리학적 이념이 담긴 겁니다. 즉 소문 백자는 ‘위엄 있으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조선의 독자적 감성을 토대로 발전한 것이죠. 또한 사치품보다는 일상에서 많이 필요로 하는 발·접시 위주로 만들었어요. 조선 중기였던 17세기에 제작된 백자 중 지금까지 발견된 것을 기준으로 보면 그릇에 해당하는 발이 전체의 53%, 접시가 37%, 음료를 담는 잔이 6% 정도예요. 귀족 중심의 화려함을 추구하던 고려시대와는 다른 면모죠."

16세기(조선) 제작된 백자 반합. 반합은 밥그릇을 의미한다. 뚜껑이 있는 자기 소재의 밥그릇은 예와 격식을 갖춘 단정한 식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소문백자만 만든 것은 아닙니다. 조선백자가 계속 발달하면서 자기 위에 화려한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생겼죠. 김 학예사가 소중 학생기자단을 '백자 청화 운룡문 항아리' 앞으로 이끌었어요. 높이 38cm에 입지름이 14.6cm인 이 항아리는 국가와 왕실의 중요한 행사에 사용되던 의례기로, 술을 담아두거나 꽃을 꽂아 장식했죠. 항아리의 이름에 들어간 청화는 표면에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한 안료의 이름이며, 운룡문은 용과 구름무늬라는 뜻입니다. "자세히 보면 뽀얀 백자에 푸른빛이 약간 돌아요. 백자를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백자 생산이 가능해졌죠. 또한 왕을 위해 제작된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그림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도화서 소속 화원이 직접 분원에 내려와 그림을 그리기도 했어요."

승찬 학생기자가 청화백자의 표면을 현미경으로 자세히 살피자 그릇 몸체에 얇게 잘 붙어있는 유약층이 먼저 보이고 그 아래로 청화 안료가 보였어요. 이것은 그릇을 제작한 뒤 청화로 표면에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유약을 발라 가마에 넣고 구웠기 때문입니다. 청화는 코발트(Co)·철(Fe)·망간(Mn)·동(Cu)·니켈(Ni) 등 여러 금속 화합물로 구성된 안료인데, 중국 명·청나라 시기에 많이 제작됐고 이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죠. 우리나라는 청화를 주로 중국으로부터 수입했기 때문에 아주 비싸고 귀한 안료였어요.

추승찬 학생기자가 현미경으로 자기의 표면을 관찰했다. 안료를 사용한 자기의 경우 유약층과 태토로 만든 도자기 표면 사이에 청화·철화 등 안료가 보인다.

"그런데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던 17세기 전반에는 왕실에서도 값비싼 청화로 자기를 장식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국내에서 구하기 쉬운 산화철이 주원료인 철화 안료로 장식한 철화백자를 사용했죠. 이후 국가 재정이 회복되면서 청화백자가 다시 유행하게 됩니다." 백자 표면에는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그렸는데요. 그중에서도 장수·다산·부귀·출세 등 인간이 바라는 소망을 문자나 사물의 형태로 빌어 나타난 길상문(吉祥紋)은 조선 후기에 자주 사용됐어요.

모두의 예술품이자 생활용품

김 학예사의 설명을 듣던 승찬 학생기자가 "백자는 일반 백성들도 쓸 수 있었는지" 궁금해했죠. "고려 시대 청자는 주로 귀족 계층이 사용했기 때문에 일반 백성도 널리 사용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조선백자 역시 조선 초·중기까지는 재료 수급의 어려움과 경제적 사정으로 지방 관청이나 향리, 양반 계층 정도만 사용할 수 있었죠. 그러다 백자 수요가 점점 늘면서 조선 후기에는 왕실·관청용 외에도 사대부나 일반 백성을 위한 그릇이 제작돼 널리 유통됐어요. 또한 백자 생산지도 각 지방의 다양한 수요를 담당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했어요. 물론 왕실·관청용 백자와 일반 서민들이 쓰는 백자의 질은 차이가 컸지만, 백자가 널리 사용된 것이죠."

조선 후기인 18세기가 되자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고 대외 무역이 활발해져 부유한 사대부와 백성이 늘어납니다. 이들 사이에는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며 시·서화를 즐기는 취미가 유행했으며, 문방구·서책·골동품·분재 등을 즐기는 문화도 형성됐어요. 이에 따라 필통·연적·향로·화분·주병 등 문방구·생활용품이 백자로 널리 제작됐죠.

경기도자박물관에서는 우리나라 자기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여러 유물을 감상하는 것은 물론, 청화 안료로 백자를 장식하는 체험도 할 수 있다.


19세기에 제작된 '백자 청화 산수문 사각연적'은 실용적인 문방구의 좋은 예입니다. 정육면체에 가까운 사각연적으로, 강에 배가 떠있고 언덕에 선 두 인물이 먼 산을 바라보며 담소하는 정경이 청화로 그려졌죠. 우리가 밥상을 차릴 때 쓰는 밥그릇·국그릇·접시 등을 한 벌의 세트로 구성한 것을 반상기라 하는데요. 국화꽃 무늬의 청화백자 반상기 세트인 '백자 청화 국화문 반상기'도 볼 수 있었죠. 또 장례를 지낼 때 망자의 무덤에 함께 넣는 부장품으로 실제 그릇보다 작은 크기의 백자를 만들기도 했어요.

경기도자박물관에서는 '백자 색을 입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백자에 청화로 직접 그림을 그리는 체험을 할 수 있어요. 체험실을 찾은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홍은영 교육연구원이 체험 과정을 설명했어요. "백자 위에 먼저 연필로 밑그림을 그려요. 이를 따라서 청화 안료로 그림을 그리면 제가 약 1250°C의 고온에서 그 백자를 구울 겁니다. 그러면 연필 자국은 다 타서 없어지고, 청화 안료만 백자 표면에 남죠."

왕희재 학생기자가 청화 안료로 백자에 고양이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그림 그리기를 마친 백자는 약 1250°C의 가마에서 구워 완성한다.
청화 안료로 백자에 십장생을 그리는 체험을 한 김서호 학생기자. 자기에는 행복한 삶을 기원하는 길상문이 무늬로 사용된 경우가 많다.

컵·접시·화분 등 여러 형태의 백자 중 모두 접시를 선택한 소중 학생기자단은 각자 원하는 형태를 그 위에 그리기 시작했어요. 태연 학생모델은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 희재 학생기자는 건강하게 오래 살고 유령에 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은 고양이, 승찬·서호 학생기자는 건강하고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십장생을 선택했죠. 연필로 밑그림을 그린 뒤, 청화 안료로 그 위에 선을 따라 그리고 안료의 농도를 조절해 채색하면 끝나죠. 고양이를 그리던 희재 학생기자가 "옛 도공들이 좋은 자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마음이 느껴져요"라고 말했어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기는 음식을 담는 반상·주방용기는 물론, 제례용기·문방구·악기 등으로도 사용됐어요. 목적에 따라 예술품으로 만들기도 했죠. 예를 들어 18~19세기에는 최고급 백자인 청화백자가 활발히 제작돼 조선왕실이나 사대부 계층이 생활용품으로 썼죠. 동시에 청화백자는 귀중한 장식품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보면 '이건 무슨 용도로 만들었을까'를 먼저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어렵게만 느껴졌던 국보급 보물들이 좀 더 친숙하게 느껴질 거예요.

경기도자박물관에서는 우리나라 자기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여러 유물을 감상하는 것은 물론, 청화 안료로 백자를 장식하는 체험도 할 수 있다.

■ 알고 보면 친숙한 자기의 종류

「 박물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자기의 종류를 정리했어요. '국보·유물·문화재'라는 딱딱한 수식어를 달고 있지만, 알고 보면 그 용도가 친숙합니다.

주자: 술이나 차를 따르는 용도로 제작된 음료 용기예요. 주자는 고려 초기부터 청자·백자로 많이 제작됐죠. 특히 12~13세기 제작된 고려청자 주자는 동물·식물·인물 등을 표현한 경우가 많아요.

병: 주자와 마찬가지로 물·술·차 등을 담는 음료 용기예요. 특히 조선 후기에는 병이 선비들의 여가·풍류를 상징하게 되며 실용적 목적으로는 물론, 장식용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완 완은 차를 마시거나 음식을 담을 때 사용하는 대접이에요. 특히 차 마실 때 쓰는 완을 다완이라고 하죠. 우리나라 자기 제작의 역사가 고려 때 들어온 차 문화에서 유래한 만큼, 다완의 역사도 깁니다.

매병: 아가리가 좁고 어깨는 넓으며 밑이 홀쭉하게 생긴 항아리를 매병이라고 해요. 음료·꿀·참기름 등 액체 저장용기이면서 장식용으로도 사용됐어요.

■ 자기의 이름은 어떻게 붙여질까

박물관에서 자기의 이름을 보면 한 번에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죠. 하지만 간단한 규칙을 알면 이해하기 쉬워요. 자기의 이름은 자기의 핵심 정보를 담고 있어요. ①도자의 종류 ②문양 표현 기법 ③문양 소재 ④형태로 구분해 붙이거든요. 예를 들어 '백자 청화 운룡문 항아리'는 ①백자 중에서 ②청화 안료를 사용해 ③용과 구름 문양(운룡문)을 그려 넣은 ④항아리라는 뜻이에요.

■ 소중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 이번 취재는 경기도자박물관에 다녀왔어요. 자기라고 하면 그냥 옛날에 쓰던 그릇인 줄만 알았었는데, 김진영 학예연구사님을 통해 도자기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들었어요. 특히 자기는 좋은 역사와 슬픈 역사를 함께 가진 유물이라는 것을 배웠죠. 또 백자에 청화 안료로 색을 입히는 체험을 해본 것도 무척 좋았어요. 사촌 형제들이 해외에 살고 있어서 우리나라의 자기를 잘 모르는데, 다음에는 꼭 같이 와서 자기들도 구경하고 체험도 같이 해보고 싶어요.

김서호(서울 자곡초 4) 학생기자

경기도자박물관에서 멋진 무늬의 자기를 관람하고 김진영 학예연구사님의 설명을 들어보니 청자·백자에 얽힌 역사적 내용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특히 망자가 잠들어 있는 무덤에 함께 묻기 위해 백자를 미니어처처럼 작게 만들었다는 사실과, 경기도 광주에 국가가 운영하는 백자 제작소가 350여 곳이나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죠. 직접 백자에 그림도 그려봤고요. 저처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소중 독자들은 겨울방학에 경기도자박물관을 방문하면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김태연(인천 진산초 4) 학생모델

자기에 담긴 여러 의미에 대해 알아본 취재였어요. 고려시대 청자는 매우 화려하지만 조선시대 백자는 단순한 형태가 많은 이유는 고려·조선 지배층의 삶의 방식이 자기에 표현됐기 때문이죠. 침몰한 고려시대 배에서 꿀·참기름 등의 이름표가 붙은 매병이 발견된 점도 인상적이었어요. 장식용인 줄만 알았는데 실용적으로 쓰였다는 사실이 재미있었죠. 백자에 청화 안료로 그림을 그린 체험 시간.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 개이고, 유령을 본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제가 건강하게 오래 살고 유령에 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고양이를 그렸어요. 도자기에 청화 안료를 칠할 때 옛날 도예가들이 좋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죠.

왕희재(서울 마포초 5) 학생기자

도기와 자기의 차이를 알게 돼 좋았습니다. 도기와 자기가 제작되는 과정도 알게 됐죠. 자기 표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봤는데, 유약이 칠해진 부분에 작은 공기 방울과 같은 형태가 보이는 게 신기했어요. 또 조선시대에는 왕이 사용하는 백자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도화서의 화공들이 분원에 직접 내려왔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요. 청화백자에 그려진 동·식물 문양에 다 뜻이 있다는 사실도 배웠죠. 이렇게 도자기에 대해 깊게 알아본 것은 처음이어서 뭔가 뿌듯했습니다. 경기도자박물관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못 봤던 자기들도 있어서 신기했죠.

추승찬(서울 역촌초 5) 학생기자

글=성선해 기자 sung.sunhae@joongang.co.kr, 사진=이대원(오픈스튜디오), 동행취재=김서호(서울 자곡초 4)·왕희재(서울 마포초 5)·추승찬(서울 역촌초 5) 학생기자·김태연(인천 진산초 4) 학생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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