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지막 달동네의 성탄 선물…'비타민' 같은 목욕탕 이야기 [르포]

장서윤, 김대권 2023. 12. 25.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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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울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는 백사마을에서 한 주민이 자전거를 끌고 오르막길을 걷고 있다. 김현동 기자


누군가에겐 크리스마스 선물이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닐 수 있다. 도심 재개발로 수십 년 전 판잣집 달동네로 밀려든 100명 남짓한 할머니·할아버지에겐 그랬다. 밤새 추위에 오그라든 몸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가로 2m·세로 1m 온탕이면 더할 나위 없다.

20일 오전 10시 서울 노원구 중계동 백사마을의 작은 목욕탕에 불이 켜졌다. 문을 열자마자 머리와 눈썹이 하얗게 센 할아버지가 손에 녹색 수건을 들고 들어섰다. 얼룩무늬 외투와 바지를 벗어 보관함에 걸고, 속옷을 가지런히 갠 할아버지는 곧장 욕탕으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얼어붙은 몸을 녹이듯 따뜻한 물을 연신 뿌렸다. 가슴과 등은 유독 시린지 물을 뿌리고, 또 뿌렸다. 겨우 10㎡ 안팎인 목욕탕은 금세 온기에 뿌예졌다. 이날은 할아버지가 일주일에 한 번 목욕하는 날, 수요일이다.

조병길(82) 할아버지는 1971년 서울 재개발 당시 1만 원대에 원래 살던 도심의 집을 팔고 이곳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까지 떠밀려왔다. 달동네에서 52년 생활한 할아버지가 가장 두려운 건 겨울이다. 할아버지는 목욕을 마친 뒤 “집에선 연탄불에 물을 올려서 씻어야 하는데, 작은 주전자에 여러 번 데우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어서 잘 못 씻는다”고 말했다. “코로나로 2년간 목욕탕 문을 닫았을 땐 겨울 내내 한 달에 한 번밖에 못 씻었어. 나이 먹고 각질이 자주 생겨서 냄새도 나고 몸이 가려워. 오늘이 지나면 매일 수요일만 기다린다니까.”

백사마을 비타민 목욕탕에서 만난 조병길 할아버지는 “연탄불에 물을 올려서 씻기 불편하다”며 “목욕탕이 문 닫았던 코로나 때는 한 달에 한 번밖에 못 씻었다”고 말했다. 김대권 기자
백사마을 비타민 목욕탕은 후원이 줄어들면서 운영을 중단할 위기에 처했다. 김현동 기자


‘비타민 목욕탕’이란 빨간 간판이 걸린 이곳은 일반 목욕탕이 아니다. 집에 온수시설이 없고, 목욕탕이 있는 상계역까지 40분 거리를 걸어야 하는 백사마을 노인들을 위한 공공 목욕탕이다. 2016년 11월 서울연탄은행 주관으로 시민 600여명의 후원을 받아 탄생했다. 한 달 평균 약 50명의 노인이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후원이 줄어 주 4회에서 2회(수요일 남성, 목요일 여성)로 줄여 운영 중이다. 그런데 지난해 겨울 난방비·전기세·수도세 등 공공요금까지 오르면서 목욕탕 문을 닫아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서하영 서울연탄은행 사회복지사는 “한 달 운영비가 평균 70만원인데 공공요금은 오르고 후원금은 30% 넘게 줄어 목욕탕 운영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비타민 목욕탕 탈의실 거울 앞에는 갈색 항아리 모금함이 등장했다. 마을 노인들이 목욕탕 운영에 어려움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물값이라도 내겠다며 쌈짓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목욕탕이 여탕으로 바뀐 21일 오후 2시, 김인숙(75), 김복희(82) 할머니가 들어오자마자 항아리에 1000원짜리 지폐를 넣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푸른색의 1000원짜리 지폐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조금이라도 비용을 아끼라며 비누·샴푸 등 목욕 물품을 직접 가져오는 노인들도 있었다. 김인숙 할머니는 “혹시라도 목욕탕이 없어질까 봐 다들 물도 아껴 쓴다”고 했다. “여기가 없으면 우리는 씻을 수도 없고, 사람 구경도 못 해. 남은 평생 씻지도 못하고 죽는 거야. 절대 없어지면 안 돼.”

백사마을 비타민 목욕탕 내부에 설치된 후원함. 김현동 기자
백사마을 비타민 목욕탕은 마을 주민들의 한파 피난소이자 사랑방이다. 김현동 기자

혹한 속 달동네에 ‘비타민’ 같은 목욕탕


21일 백사마을 주민 곽오단 할머니가 보일러 동파로 비타민 목욕탕에서 추위를 피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21일 오전에 이미 목욕을 마치고 집에 갔던 곽오단(92) 할머니가 오후 1시 목욕탕을 다시 찾았다. 곽 할머니는 백사마을 최고령자, 마을에선 ‘큰 언니’로 불린다. 올 겨울 최저 영하 15도로 기온이 떨어져 한파 특보가 내려진 이날 곽 할머니 집 보일러가 터졌다. 수리공이 보일러를 교체하는 동안 온기를 찾아 목욕탕으로 피신온 것이다. 할머니는 마치 얼음장같이 차갑고 거친 손으로 다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팔이며 다리며 다 아파. 아주 땡땡 얼어서 죽겠어. 저 딸딸이(보행기) 없으면 어디 가지도 못하니까 여기(목욕탕) 없어지면 안 되지. 난 버스도 못 타는데….”
곽오단 할머니가 보행기에 의지한 채 이동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추운 겨울 연탄에 온기를 의지하는 이곳 백사마을 노인들에게 목욕탕 온수는 ‘비타민’과 같았다. 강추위가 덮친 이날 마을 곳곳에선 보일러, 세탁기 동파 소식이 연달아 전달됐다. 세탁기가 고장 난 김복희 할머니는 손빨래를 하기 위해 화장실에 있는 연탄불 위에 5리터쯤 돼 보이는 스테인리스스틸 곰솥을 올려 물을 데웠다. 두 손이 겨우 들어갈 듯한 목욕 바가지로 양동이에 물을 옮기며 말했다. “이렇게 한두 통 데워서 씻다 보면 금방 다 식어버려. 이 물로는 간신히 세수만 겨우 하는 거야. 머리도 못 감고 몸은 턱도 없지.”
백사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온수시설이 없어 연탄 난로 위에서 물을 데워 쓴다. 김현동 기자
21일 서울 노원구 백사마을 곽오단 할머니 집에서 보일러 교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유일한 씻을 공간인데…” 사라지는 목욕탕


코로나 이후 동네 목욕탕도 문을 닫는 곳이 늘면서 달동네 노인들은 더 힘들어졌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전국 폐업 목욕탕 수는 2020년 341개, 2021년 371개, 지난해 361개, 올해 246개로 매년 300개 안팎씩 줄고 있다. 공중목욕탕을 주로 이용하는 노인층과 다세대 주택 거주 저소득층이 따뜻하게 씻을 수 있는 곳이 사라진 것이다. 이에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공공 목욕탕을 만들어 무료로 혹은 염가로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도 지난 3월부터 쪽방촌 전용 목욕탕 8곳을 지정해 주민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동행 목욕탕’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이솔지 동명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목욕은 의식주와 함께 보장돼야 하는 기본권”이라며 “잘 씻지 못하면 밖으로 잘 안 나간다거나 사람과 만나는 것을 꺼리게 되면서 한 사람 삶의 질에 영향을 크게 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령화 시대 늘어나는 노인과 취약 계층의 숫자에 비해 목욕 시설이 현저히 부족한 게 현실”이라며 “국가와 지자체가 나서 따뜻한 물이 필요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해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장서윤ㆍ김대권 기자 jang.seo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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