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재벌가 자제가 신사업 맡는 ‘진짜’ 이유
하지만 성공 사례는 드물어
신사업이 ‘실험’ 안 되어야
12월 인사 시즌을 맞아 주요 그룹의 새 인물들이 면면을 드러냈다. 재벌 오너가(家)의 몇몇 자제들도 경영 일선에 등장했다. 그런데 이들은 일제히 ‘신사업’을 하는 부서에 배치됐다는 특징을 보였다.
유통 재벌가의 장남은 올해 인사와 동시에 신설된 신사업 추진 조직을 맡았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신사업 관리와 제2의 성장 엔진을 발굴하는 것이다. 모 그룹 회장의 장녀는 이달 초 인사에서 사업개발본부장 자리에 올랐다. 그에겐 최연소 임원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신사업 개발과 투자라는 중책이 주어졌다. 10대 그룹의 재벌 4세도 신성장동력 발굴 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몇 해 전에 신성장팀 팀장으로 회사에 첫발을 들인 모 재벌 그룹의 막내아들도 인사를 통해 여러 계열사의 전략부문을 이끌게 됐다. 지난 9월엔 90년대생 재벌 5세가 그룹의 신사업전략팀에 입사하기도 했다.
왜 재벌가 자제들은 하나같이 신사업을 하려는 걸까. 재계와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경영수업의 일환이다. 신사업 부서에서 여러 사업을 시도하면서 경영 능력을 쌓고 ‘성공의 맛’을 경험해보라는 의도라는 것이다.
본업보다 신사업이 부담이 덜하다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신사업은 말 그대로 미래 먹거리를 찾는 것으로 본업과는 거리가 있다. 본업의 실적 악화는 곧장 경영 능력을 의심하게 하지만, 신사업은 설사 성과가 없어도 본인이나 회사에 가해지는 타격이 작다. ‘오너의 자녀가 그룹의 미래를 준비한다’는 이미지 구축 용도만으로도 충분한 셈이다.
셋째는 회사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영업, 인사, 재무 등 부서는 ‘기본 업무’라고 불리는 일과 각종 회의, 다른 부서와의 협업이 요구된다. 신사업 조직은 프로젝트 성격의 업무를 담당하다 보니 다른 부서와 접촉할 일이 적다. 주기적인 보고도 할 필요가 없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역할을 맡아 회사에 묶여 있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재벌가 자제들이 정시에 출근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리 만무하고 직원들과 부대끼면서 생활한다는 것도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재벌 3·4세들이 신사업을 하겠다고 나서는 건 ‘허울 좋은 명분’이고 회사 경영권을 쥐는 데 필요한 시간 끌기용은 아닌지 하는 의심을 사기도 한다. 결국엔 승계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 아니냐는 얘기다. 이런 의심은 앞서 신사업을 폈던 이들이 만들어낸 무수한 실패 사례에서 기인한다. 어느 재벌 3세는 요식업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골목상권 침탈이라는 오명을 쓴 채 물러나야 했다. 모 대기업 부회장은 하는 사업마다 몇 년 못 가 문을 닫아 ‘마이너스의 손’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물론 젊은 감각이 큰 성과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갑작스러운 선대회장의 유고로 대표 자리에 오른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취임 후 스마트폰 사업을 접고 이차전지와 자동차 전장 쪽으로 회사의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인공지능, 바이오, 클린테크를 신성장 동력으로 육성한다는 이른바 ‘ABC 전략’도 탄력을 받고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이런 성공담은 무척 드물다. 재벌가 후손들이 입사 후 초고속 승진 코스를 밟아나간다는 얘기만 자주 들린다. 어떤 실패도 그들의 앞길을 막을 순 없어 보인다. 영전에 영전을 거듭한 뒤 대표이사 자리를 꿰찰 것이라는 게 명약관화할 뿐이다.
언젠가 1980, 90년대생들이 경영권을 물려받을 날이 올 것이다. 지금은 경영수업이라는 명목으로 신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앞으로의 사업은 ‘연습’이나 ‘실험’이 되면 곤란하다. ‘핏줄’만으로 올라간 자리는 주변에서부터 인정받기 어렵다. 신사업이든 본업이든 ‘작은 성취’를 계속 쌓아나가야 한다. 가족의 후광에서 벗어나 본인만의 실력으로 모두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경영자로 성장하길 기대해본다. 첫 시작은 지금 하는 신사업에서 성과를 보여주는 것일 테다.
김민영 산업1부 기자 m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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