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 칼럼] 대 인플레 시대, 공감의 정치는 어디에?

2023. 12. 25.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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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무대 위 움직임은 요즘 현란하다. 이낙연 신당, 제3지대 신당으로 고조되던 분위기는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깜짝 등장으로 정점을 찍고 있다. 새로운 기대감, 절박감, 위기감이 연쇄 반응 중이다. 이제 승부는 팽팽해졌고 뉴스라인은 선거 드라마가 덮고 있다.

드라마의 열기 속에서 필자가 오늘 독자들과 생각해보려는 질문은 이렇다. 정치 드라마는 과연 선거 표심을 얼마나 움직일까? 숫자에 어두운 정치학자들이 가끔 쓰는 계산식 가운데 고통 지수(misery index)가 있다. 물가 상승률과 실업률을 합한 수치인데, 이 고통 지수가 지난해보다 높아지면 집권 여당은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이 미국 정치학자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내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 전망이 어두운 첫째 이유는 고삐 풀린 인플레 때문이다(미국 인플레는 최근 몇 주 진정 기미를 보이고는 있지만).

표심을 좌우하는 건 결국 인플레
구조적인 인플레 시대 인정하고
시민들 삶의 고통을 어루만져야
솔직과 검약이 공감정치의 출발

「」

여야 정당들의 긴박한 드라마가 수면 위 파도라면, 그 파도를 움직이고 선거 민심을 좌우하는 저류는 시민들 삶을 위협하는 생활 인플레이다. 인플레가 높으니 여당 책임론이 우선이라는 단순 도식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다음을 차례로 살펴보자. ①인플레 수치(numbers)와 싸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인플레를 설명하고 시민들 고통을 이해하려는 리더의 내러티브다. 이 점에서 윤석열 정부는 전면적인 정비가 필요하다. ②윤 대통령과 여당이 물가 관리에 힘을 쏟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접근 방식은 구태의연하다. ③시민들의 생활 고통에 공감하는 내러티브가 정비된다면 내년 총선 결과는 아직 알 수 없다.

첫째, 내러티브의 문제. 오늘날 인플레는 사실 글로벌 현상이고 지정학의 격변에서 비롯된 구조적 도전이다. 따라서 개별 국가의 노력만으로 인플레를 잡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인플레에 대처하는 내러티브라도 바뀌어야 한다. 내러티브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플레는 생각보다 오래갈 것이며,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가 고통과 눈물의 대(大) 인플레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솔직하게 알려야 한다. 다른 하나는 인플레 시대 시민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검약한 생활을 호소하는 대통령의 공감 내러티브가 절실하다.

먼저 구조적인 인플레. 중국이 G2로 부상하던 지난 20여 년이 대 디플레의 시대였다면, 이제부터 20년은 대 인플레이션의 시대다. 중국의 풍부한 저임금 노동과 저렴한 상품이 세계인들에게 낮은 물가를 선물하던 시대는 끝났다. 세계는 양 진영으로 재편 중이고 탈중국은 곧 중국발 디플레의 끝을 뜻한다. 지정학적 불안은 또한 석유와 식량의 수입 이동 거리를 늘리고 있으며 이는 고물가의 또 다른 구조적 요인이다.

내러티브의 또 다른 축은 공감이다. 윤 대통령은 한편으론 인공지능, 로봇, 양자 혁명이 주도하는 미래 비전을 말할 수 있다. 동시에 보통 시민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한번 오른 소비자 물가를 되돌리기는 어려우며 무려 2200조 원에 이르는 가계부채(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 세계 1위)를 짊어진 개인들에게 저금리의 세상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을 함께 아프게 느껴야만 한다. 시민들 삶에 공감하는 내러티브는 대통령과 주변의 라이프 스타일 변화에서 시작하면 좋을 것이다. 대통령 관저의 실내 온도를 낮추고 두꺼운 스웨터를 입은 채 생활하는 윤 대통령 부부의 사진이 얼어붙은 민심을 조금이나마 녹일 수 있다.

둘째, 인플레에 대응하는 정부의 접근 방식은 크게 손봐야만 한다. 물론 긍정적 신호도 있다. 내년 예산안에서 보듯이 윤 대통령은 긴축 재정이라는 칼을 빼 들었다. 다양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정부 예산에 허리띠를 졸라매었다.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정부 예산의 긴축으로 민심을 감동시키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세부적인 인플레 대응책으로 넘어가 보면 답답함은 커진다. 얼마 전 경제 부총리는 라면 제조회사들에 가격 인하를 공개적으로 압박하고 나선 바 있다. 공개압박은 주류 업계, 밀가루 제분업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방식 아닌가? 30~40년 전 발전국가 시대에 하던 정부의 가격 누르기는 2023년 한국의 현실과는 꽤나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는 식료품의 수입, 유통, 제조, 재료 수급 등의 복잡다단한 과정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면서 합리화를 꾀해야 할 때가 아닌가?

요약하자면, 결국 내년 봄 표심을 움직이는 힘은 정치 드라마보다는 ‘먹고사니즘’의 결정체인 인플레다. 지난해 봄 대통령 선거에도 온갖 드라마가 연출되었지만 정작 유권자들이 가장 중요한 투표 요인이라고 응답한 것은 부동산 가격의 폭등이었다. 외부로부터 구조적으로 닥쳐오는 인플레의 불길을 잡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래도 민심을 달래는 길은 있다. 진솔한 태도와 위로의 말로 리더는 성난 민심을 움직이기도 한다고 역사는 기록해왔다.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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