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만의 시선] 굿바이 86세대
위기 때마다 소환되는 86세대 정치인(약칭 86세대)의 퇴진론이 이번엔 진짜일 것 같다. 86세대의 정치적 자산인 ‘도덕적 우월감’이 이들의 맏형인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구속으로 완전히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2019년 ‘조국 사태’가 20대의 반발과 ‘이대남’의 정치적 결집을 촉발했다면, 송 전 대표의 ‘돈봉투’ 사건은 86세대의 태생적 모순을 끄집어내 이들의 퇴진을 앞당길 것이다.
86세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실력에 비해 과잉 대표됐다는 점이다. 17대부터 21대 총선까지 86세대 국회의원 당선자는 59→68→105→132→174명으로 늘었다. 2000년(16대) 송 전 대표의 원내 입성을 시작으로 우상호·윤호중·이인영·정청래 의원 등 운동권 정치인 상당수가 2004년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20년 동안 민주당 주류로 행세하며 한국 정치를 과점했다. 대부분 내년에도 출마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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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걸친 정치 과점, 유례 없어
송영길, 86세대 도덕성 치명타
성찰없는 ‘민주건달’ 말도 나와
」
지금껏 그 어떤 세대도 이처럼 오랜 기간 권력을 쥐어본 적이 없다. 이철승 서강대 교수의 말처럼 86세대는 “학연·지연·혈연의 네트워크를 가로지르는 ‘연대’의 원리를 터득해 시민사회와 국가를 점유하고 위계구조의 상층을 과잉 점유”해왔다(『불평등의 세대』). 2000년대 신자유주의 질서로 사회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운동권 경력으로 어린 나이에 운 좋게 요직을 꿰찼고, 지금도 권력의 중심에 서 있다.
그 원동력 중 하나는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상징 자본이다.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졌던 이들의 희생 스토리는 구태 정치를 청산하는 개혁의 자양분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어느새 자신이 그토록 싸웠던 기득권이 됐고, 젊은층으로부터 부조리와 특권의 대명사라는 비판까지 받는다. 주된 이유는 이른 나이에 얻은 성취 탓에 스스로 공부하고 성찰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들의 목표는 ‘독재타도’와 ‘반미자주’였지, 제도로서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도 다원적 통치체제인 대의제를 무시하고, 선거에서 다수표 획득이 곧 인민의 ‘총의(總意)’인 양 착각하는 행태를 보인다. “돈벌이의 어려움을 모르는 민주건달”(홍세화)이란 표현처럼 86세대는 용역깡패가 압도적 물리력으로 철거민을 몰아내듯, 의회에서 다수파의 전횡을 일삼았다.
원인은 청년 시절 형성된 왜곡된 세계관 탓이 크다. “한국 좌파엔 주자학적 교리가 내재한다”는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의 지적처럼 과거 운동권 내부에는 교조적 이념에 치우친 엄격한 위계가 존재했다. 여성·소수자 등 이슈는 반미·통일 같은 대의에 밀려 뒷전이었다. 『몰락의 시간』에 나오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의전 중독이나 ‘박원순 사태’ 때 보여준 86세대의 반민주적 행태가 그렇다.
성리학이 엄격한 군신의 위계를 질서화할 수 있던 건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전제했기 때문이다. 세속의 권력과 종교 지도자의 역할을 겸한 성리학의 군주는 도덕적 우위와 뛰어난 역량으로 권위를 인정받는다. 성리학과 비슷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국가관도 국가의 존재 이유는 ‘선한 목표’를 실현하는 것이고, 지도자는 지혜와 도덕의 탁월성(aretē)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정치학』).
하지만 86세대에겐 수신제가의 노력도, 탁월성을 얻기 위한 자기 단련도 없다. 심지어 송 전 대표의 구속 사건에서 보듯, 한때 자산이었던 ‘도덕적 우월감’마저 사라졌다. 그 대신 남은 건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을 향해 내뱉은 ‘건방진 ×’ ‘어린 ×’ 같은 막말과 명백한 혐의가 나와도 결백을 주장하는 뻔뻔함 뿐이다. 성찰과 뉘우침이 없는 것은 조국 전 장관이나 최강욱 전 의원 등 다른 86세대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변했지만, 86세대는 여전히 운동권 시절의 교조적 이념과 그릇된 세계관에 갇혀 있다. “파시즘의 유산은 그와 싸운 이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긴 것”이라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말처럼, 86세대는 여전히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에 사로잡혀 타인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자기변명으로 가득한 자서전으로 지지층을 세뇌하고, 검찰 같은 거악을 설정해 투쟁과 희생의 서사를 만든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한 세대가 20년 넘게 정치권력을 과점했으면, 다음 세대를 위해 ‘후생가외(後生可畏)’하는 게 옳다. 86세대가 지닌 명암 중 그나마 밝은 부분이라도 역사에 남길 수 있을 때 용퇴하는 것이 맞다. 올라설 때보다 내려올 때를 더욱 잘 아는 것이 현명하다. 내년 총선에서 한 번 더 권력을 연장할 순 있겠지만, 결국엔 ‘덧없는 장미의 이름’으로만 남게 될 뿐이다.
윤석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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