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의 최초의 질문] 코로나 백신은 생물학자와 컴퓨터공학자의 합작품
대전에 있는 모 기업의 기술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마침 자체 기술 공유회가 열리고 있었다. 건물 각층의 복도마다 개발 중인 기술의 핵심을 요약한 포스터가 붙어있었고, 자유로운 복장의 연구원들이 커피와 과자를 든 채 삼삼오오 돌아다니면서 묻고 답하는 소리가 신나는 장터처럼 시끌벅적했다. 한 포스터 앞을 지나갈 때 질문하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이 기술을 제가 고민하는 문제에도 쓸 수 있을까요?” 십중팔구 서로 다른 연구팀에 속해 있었을 두 사람 사이에 스파크가 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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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 대화가 기술선진국 조건
당뇨병약이 비만 치료에 효과
뜻밖의 발견으로 기술도 진화
굴절적응 왕성해야 산업 발전
」
본래 목적과 다른 곳에서 꽃핀 기술
다음의 몇 가지 예들에서는 비슷한 공통점이 있다. 새의 깃털은 원래 체온을 조절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지만, 결국 하늘을 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되었다. 하와이에 서식하는 망둑어는 바위에 붙어있는 조류를 뜯어 먹기 위해 아래로 향하는 특이한 빨판 같은 입과 턱 구조를 발달시켰는데, 높은 바위를 기어오르는 용도에도 기가 막히게 활용되고 있다. 포유류의 땀샘이 유선으로 활용되어 젖을 분비하는 기능으로 쓰이게 된 사례도 있다. 공통점은 A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희한하게도 B 용도로 잘 쓰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비슷한 사례는 기술진화의 세계에서도 아주 보편적으로 관찰된다. GLP-1(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 유사체를 기반으로 개발된 당뇨병 치료제가 느닷없이 비만치료제로 각광을 받게 되고, 최근에는 심혈관 질환이나 알코올 중독, 치매까지 적응증을 확대하고 있다. 적 전투기를 탐지하기 위해 개발된 마이크로파를 이용한 레이더 기술이 전자레인지라는 응용분야에서 꽃을 피웠다. 1957년 당시 소련이 세계 최초로 발사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의 신호 모니터링용으로 개발된 기술이 GPS로 발전한 사례는 어떤가. 컴퓨터 게임의 그래픽 정보처리 속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졌던 GPU가 인공지능 시대 가속기로 화려하게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의 사례다. 모두 기술개발 당시의 원래 목적과 다른 곳에서 꽃이 핀 경우다.
이처럼 원래 목적과 다르게 활용되는 경우를 진화이론에서는 ‘굴절적응’(exaptation)이라고 하고, 이 굴절적응이 일어나는 곳을 ‘가능성의 공간(space of possibilities)’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기술진화의 과정에서 굴절적응은 핵심적인 원리 중 하나다. 즉, 원래 A 목적으로 기술이 개발되었으나 B라는 응용분야를 만나면서 의도치 않았던 쓰임새를 발견하게 되고, 거기서 다른 분야의 지식을 더해 결국 C라는 새로운 기술로 진화해나간다는 뜻이다. 혁신적 기술은 끊임없이 굴절적응하면서 드넓은 가능성의 공간을 헤매다니는 지난한 진화의 산물이다.
실리콘밸리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굴절적응이 잘 일어나는 환경에서라야 혁신적 기술이 탄생한다. 그런 환경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고급 재료가 많아야 한다. 진화학자 스티븐 제이굴드가 아프리카의 노천시장에서 폐타이어 고무로 만든 신발을 보고, 기막힌 굴절적응의 사례라고 감탄했다지만, 주변에 있는 것이라곤 폐타이어밖에 없는 환경에서는 굴절적응을 해도 고작 고무 슬리퍼를 만들 수 있을 따름이다.
또 한 가지 조건은 융합이다. 앞서 보았던 기업연구소의 사례에서처럼 기술을 가진 사람과 해법을 찾는 사람이 만날 기회가 많아야 한다. 생물학자와 컴퓨터공학자간의 만남에서 합성생물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탄생하고, 마침내 코로나 백신을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된 것처럼….
실리콘밸리의 정체성도 굴절적응이라는 관점에서 재정의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심지어 맥도널드 가게에서도 새로운 기술을 가진 사람과 기술해법을 구하는 사람이 우연히 만날 가능성이 크다. 굴절적응의 고급 재료가 많다는 뜻이다. 인큐베이팅을 담당한 벤처투자자들의 임무는 다름 아니라 굴절적응이 일어날 수 있도록 짝지어주는 일이다. 넓은 가능성의 공간에서 융합이 일어나도록 매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실로 굴절적응이 자주 일어날 수 있는 넓은 가능성의 공간, 그것이 혁신기술의 산실이라는 실리콘밸리의 정체성이다.
생물의 진화에서 굴절적응은 환경변화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그러나 기술의 진화에서는 인간의 의도가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미 많은 선진기업이 굴절적응의 원리를 바탕으로 혁신기술을 키워내기 위해 능동으로 전략을 쓰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글로벌 제약업계의 약물 재창출 전략이다. 특정 목적으로 개발되어 쓰이고 있거나 임상에서 효과가 부족하여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 약물을 다른 목적으로 다시 활용해보자는 전략이다.
황당한 질문이 허용되는 문화
최근 대기업들이 벤처기업에 투자하거나 아예 인수함으로써 기존의 관행과 다른 해법을 적용해보고자 적극 나서는 것도 굴절적응의 원리에 기반한 것이다. 우리 기업과 연구현장도 단지 기존의 로드맵에서 더 나은 성과를 도출하는 것에서 벗어나 더 많은 굴절적응이 일어나도록 전략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굴절적응의 가능성은 국가의 사회문화적 환경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무엇보다 황당한 질문들이 허용되어야 한다. 이 기술을 이렇게도 쓸 수 있을까 또는 이런 문제에 저 기술을 한번 적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도전적인 최초의 질문이 많아야 한다.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잘하라는 분위기에서는 굴절적응이 일어나야 할 가능성의 공간이 손톱만큼 작아진다. 또한 그 사회에 고급 재료가 많아야 한다. 쉽게 말해서 당장 어디에 쓸지 감이 오지 않는 연구결과들, 그리고 그런 연구를 꾸준히 해 온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는 뜻이다. 중장기적인 기초연구가 많은 나라에서 혁신적인 굴절적응이 많이 탄생하는 이유다.
드넓은 가능성의 공간에서 혁신적인 굴절적응이 그 어느 곳보다 자주 일어나는 대한민국이 진정한 기술선진국이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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