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함에서 출발하는 예술
Q : 책 수선을 시작한 건 언제였나요
A : 미국 대학원에서 페이퍼 메이킹과 북 아트를 전공했습니다. 책 수선 일이 전공에 필요한 기본 지식과 테크닉을 습득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들어 중앙도서관 책 보존 연구실에 취직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책 수선이란 쉽게 말해 찢어진 종이를 붙이고 망가진 표지를 고치는 일입니다. 하지만 깊게 들어가면 끝도 없죠. 찢어진 부분을 제대로 수선하려면 종이의 재질과 섬유질 구조, 산화된 정도를 파악해야 해요. 적게는 수십 장, 많게는 수천 장의 종이가 모여 두께를 이루는 것이기에 제본이나 표지 부착 방식 등의 구조도 면밀히 파악해야 합니다.
Q : 수선 시 원칙
A :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기. 자기 기술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해요. 자칫 과신하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책을 망가뜨릴 수 있으니까요. 또 하나는 지나친 감정이입을 피할 것. 속된 말로 눈물 없이 듣지 못할 사연이 담긴 책이 올 때도 있어요. 그걸 다 받아들이면 실수할까 봐 책에 손을 못 대요. 그래서 항상 한 발짝 떨어져 생각하려고 합니다.
Q : 기억에 남는 작업
A : 첫 의뢰. 의뢰인이 어릴 때 즐겨 봤던 〈국어대백과사전〉이었는데,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 놀거리로 삼았던 것 같아요. 그분이 수선된 책을 찾아가면서 “어린 시절 친구가 돌아온 것 같다”는 말을 남겼어요. 제겐 일인 책 수선이 누군가에겐 감정적으로 적잖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Q : 수선 일을 이어가는 이유
A : 망가진 책을 보는 재미가 커요(웃음). 수선 완료된 모습보다 그 전이 제겐 더 매력적이에요. 생각보다 주변에서 망가진 책을 보기가 쉽지 않거든요. 흔치 않은 기회죠.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일을 이어가는 것도 있어요. 그래서 제 책은 수선하지 않습니다.
Q : “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파손된 책의 형태와 의미를 수집한다”는 표현에 담긴 의미를 설명한다면
A : 책 수선에 앞서 문제를 파악하려면 책의 한 장 한 장을 면밀히 살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출판 시기부터 종이와 제본 방식, 읽는 사람의 사소한 습관까지 보여요. 음식물이 튄 흔적이나 곳곳에 남긴 메모, 끝을 접은 부분 등 생각보다 다양한 단서들이 존재하는데, 이걸 책이 가진 기억이라고 봐요. 보통 망가진 책을 보면 안타깝고 속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망가질수록 많이 사랑받은 거나 다름없어요. 도서관에만 가도 인기가 많은 책일수록 닳아 있잖아요. 제 역할은 그런 사랑의 흔적을 잘 보듬는 데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Q : 다수의 건물을 리모델링했습니다
A : 기본적으로 오래된 것에 대한 애정이 있는 편입니다. 함부로 없애거나 지우는 건 성향에 안 맞는달까요. 건축은 세상에 새로운 것을 더하는 일이지만 그 더하기를 최소화하고 싶어요. 새로 만들기보다 기존의 것을 유지하고 진화시키는 게 제겐 더 잘 맞고 옳은 것처럼 느껴져요.
Q : 수선 작업의 기준
A : 기존 건물이 지닌 특성을 어디까지 고유함으로 볼 것인가. 하자 등 문제를 일으킬 요소를 제외하면 저는 무척 관대한 것 같아요. 보통 비정상으로 여길 만한 것에 눈이 가요. 이상해 보여도 잘 살리면 새로운 매력이나 정체성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 가능성을 믿고 섣부른 판단을 유보합니다.
Q : 사무실도 50년 된 박공집을 리모델링한 것이죠
A : 사무실을 차리려다 우연히 발견한 집인데, 지붕이 특이했어요. 오랜 시간 이끼가 껴서 녹색으로 변했고, 벽인지 지붕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경사가 가팔랐죠. 이걸 없애면 더 좋은 걸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Q : 축에 비해 드는 비용과 수고가 결코 적지 않은데 리모델링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는
A : 제게 결함은 문제라기보다 고유함에 가깝습니다. 불완전하다는 건 어떻게 보면 표준에서 벗어났다는 뜻이기도 한데, 표준이란 달리 생각하면 평이하고 상상하기 쉬운 것이니까요.
Q : 기억에 남는 작업
A : 연남동 적벽돌집. 소위 집 장사가 지은 평범한 다세대주택을 공들여 복원하고 증축한 프로젝트입니다. 흔해 빠지고 가치 없어 보이는 건물에서 가능성을 찾고 싶었어요.
Q : 낡고 오래된 것에서 가치를 찾는 눈은 어디서 비롯됐나요
A : 누군가에게 존중과 애정을 품으면 보답받는다는 가르침을 부모님에게서 들어왔고, 건축적으로는 정기용 선생의 영향이 큽니다.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 일환으로 만든 ‘등나무운동장’을 두고 “등나무도 건축”이라고 하셨죠. 사회가 주목하는 가치 너머에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 건축가로서 그런 것에도 관여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깊은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Q : 좋은 수선이란
A : ‘가치’라는 건 어디까지나 누군가 그것을 가치 있다고 말할 때 생깁니다. 절대적 가치란 없죠. 수선의 대상, 즉 인격체가 아닌 것은 스스로 가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애정과 자존감을 가지지 못한 것들을 봐주고 인정해 주는 것. 제겐 이런 일이 기쁘고 재밌습니다.
Q : 버려진 가구를 수선해 새로운 쓰임을 부여하는 프로젝트 ‘FOA 리사이클링 센터(FOA Recycling Center)’의 시작이 궁금해요
A : 작업과 취향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싶은 마음을 오랫동안 품어왔습니다. 가구 제작자로서 새로운 가구를 많이 만들기도 하지만 정작 제가 좋아하는 건 오래된 물건이었어요. 목공 수업을 진행하다 한 수강생에게 가구 수리법을 알려주었는데, 제게도 고치는 일이 무척 흥미로웠어요. 수선에서 나아가 새롭게 디자인하면 재밌겠다 싶어 리사이클링을 시작했습니다. FOA는 ‘Functional or Aesthetic’의 약자예요. 요즘 고장 나거나 싫증 나서 버려지는 가구가 많아요. 그런 것들을 기능적 또는 미적으로 되살리려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현재는 다양한 리사이클링 레퍼런스를 쌓기 위해 작업물을 만드는 단계인데, 궁극적 목표는 서비스예요. 의뢰를 받아 누군가의 가구를 새롭게 만들고 싶습니다.
Q : 리사이클링의 매력은
A : 오래된 가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목재 색이 변해서 특유의 멋이 있어요. 새로운 목재로 흉내내기 어렵죠. 리사이클링을 하면 빈티지 무드가 유지돼요. 일단 분해한 다음 즉석에서 새로운 형태를 잡기 때문에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도 흥미로워요.
Q : 기억에 남는 작업
A : 첫 리사이클링 작업인 행거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 작업실 인근에서 주운 행거에 유리 상판을 얹고, 새로운 목재를 행거 다리와 유사하게 만들어 상판 지지대를 보강했어요. 테이블을 만들고 남은 옷걸이 부분으로 의자를 만들었고요. 버려진 목마와 의자를 조합해 만든 흔들의자도 기억에 남습니다. 두 작업 모두 수선 후 전혀 다른 형태와 기능을 갖게 됐죠. 참, 흔들의자는 제가 집에서 잘 쓰고 있습니다(웃음).
Q : 이케아 포엥 암체어를 스툴로 리사이클링해 전시를 열었죠
A : 이케아 가구는 누구나 한 번쯤 써봤을 텐데요. 많은 사랑을 받지만 또 그만큼 많이 버려질 거라는 생각에 작업 대상으로 삼았어요. 당근마켓에서 무료 나눔하는 암체어를 20개가량 구해 40개의 스툴로 만들었습니다.
Q : 좋은 수선이란
A : 쓰임을 다한 사물이 다시 쓰임을 갖는 것. 볼품없고 망가졌더라도 수리를 통해 다시 누군가의 마음에 들면 버려질 것이 버려지지 않게 되니까요.
Q : 어떤 계기로 수선 일을 시작했나요
A : 도예에 관심이 많아 대학생 때부터 틈틈이 도예를 배웠어요. 7년 전, 다니던 광고회사를 그만두고 일본에 머물며 도자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문제는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흙의 수축률 계산에 서툴렀어요. 가마 소성 후 갈라지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때 일본인 친구가 깨진 그릇을 수선하는 킨츠기를 알려주었습니다. 옻칠로 그림이나 글자를 그리고 그 위에 금 · 은 · 주석 · 동 · 플라티늄 · 알루미늄 등의 금속 가루를 뿌리는 일본 전통 옻칠 공예(마키에)의 일종이에요. 마키에 기법에 매료돼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기술을 익히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수선 의뢰를 받거나 수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Q : 킨츠기 수선의 특징
A : 상처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표현하는 것. 수선 후 다른 부분이 또 깨지면 다른 재료로 균열을 메워요. 이전에 금을 썼다면 다음에 은을 사용해 시간의 축적을 표현하는 거죠. 다만 모든 부분을 수선하는 건 아니에요. 여백과 불완전함을 예찬하는 와비사비 정신과 맞닿아 있어서 과하게 수리하면 미적 효과가 떨어져요. 가령 살짝 이가 난 정도는 그냥 두고, 기능적으로 필요한 곳만 수리하는 거죠.
Q : 부서진 기물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드나요
A : 어떻게 해야 예쁘게 될까? 결과물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수선 의뢰를 하는 분 중엔 작은 조각까지 모아 정성스럽게 포장해 오는 분도 있어요. 기물을 소중히 대하는 마음에서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저 역시 정성을 더 쏟게 되고요.
Q : 다시 깨질 가능성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수선을 하는 이유는
A : 도자기는 자신이 깨진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다시 그 상태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킨츠기가 영구적 수리법은 아니지만 어떤 그릇은 수선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나에게 의미가 크고 특별한 추억이 담겼다면 깨지는 건 그릇만이 아닐 테니까요.
Q : 비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수업도 진행하고 있죠
A : 킨츠기가 일종의 수행 같아서 찾아오는 분이 많아요. 성찰적 태도가 요구되는 작업은 아니지만 깨진 기물을 어떻게든 아름답게 만들려는 노력을 수련처럼 느끼는 것 같아요. 수업을 통해 다양한 도자기와 사람을 만나며 저 역시 노하우와 동력을 얻고 있습니다.
Q :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A : 킨츠기를 시작할 땐 수선에 목적이 있었다면 지금은 작품화를 고민하는 단계입니다. 저만의 기술과 방식으로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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