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세계 교회 역사]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치만은 않지만
영국에서 감리교를 창시한 존 웨슬리는 1771년 평신도 설교자 프랜시스 애즈버리와 리처드 라이트를 식민지 미국에 파송했습니다. 평신도 설교자란 웨슬리가 혼자 하루 몇 차례씩 설교하는 게 어려워 활용하게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감리교 운동 확장을 위해 시급하게 필요한 게 설교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기존 성직자들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제 기능을 하면서도 보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웨슬리는 감리교를 창설했지만 영국국교회 안에 머물려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1776년 영국의 식민지 상태에 있던 미국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식민지에 파송됐던 대부분 국교회 성직자들은 왕당파였는데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자 대거 영국으로 귀환했습니다. 웨슬리 역시 왕의 권위를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미국 식민지들의 반란과 독립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이듬해 미국의 독립전쟁이 터지자 미국에 파송됐던 감리교 선교사들도 본국으로 귀환했습니다. 하지만 애즈버리는 귀국하지 않았습니다. 애즈버리는 그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우리가 미국에서 얻은, 그리스도를 향한 영혼이 모인 들판을 결코 떠날 수 없다. 우리의 보호를 원하는 3000명의 영혼을 남겨둔다는 것은 메소디스트의 영원한 불명예가 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양떼를 위험한 시기에 남겨둔다는 것도 선한 목자의 역할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그들을 떠나지 않고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미국에 있던 감리교 설교자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을 지지하거나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 내 감리교 신자들은 계속 웨슬리를 존경하면서도 더 이상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미국 내 목회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미국 감리파는 웨슬리의 뜻을 거슬러 ‘감리주의 감독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라는 조직을 갖췄습니다. 이때부터 미국 감리교는 영국 감리교와는 달리 감독을 두었습니다. 애즈버리는 1784년 감독으로 안수를 받았고 이는 웨슬리로 하여금 분노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웨슬리 별세 이후 영국에서의 감리교는 세를 더 확장해 국교회에서 완전히 독립한 감리교회가 됐습니다.
프랜시스 애즈버리는 영국 스태퍼드셔주 햄스테드 브리지에서 1745년 8월 20일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정원사이며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인성교육과 영적 훈련을 잘 받았으며 13살이었을 때 감리교 순회 설교자인 알렉산더 마더가 버밍햄 지역에 배정되고 그의 집회를 통해 거룩함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애즈버리는 15살 때에 공개적으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교제 모임에서 성경 구절을 읽고 설명하고 그 후 다른 감리교도들의 집으로 확장하게 됩니다. 22세가 되었을 때 영국에서 열린 감리교 총회는 그에게 설교할 수 있는 견습 허가를 주었고 1년 뒤 그는 허가받은 목회자로 순회 구역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애즈버리는 미국에서 지역 교회 중심의 목회를 하던 다른 교파들과는 달리 감리교의 체계를 ‘순회제도’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감리교 설교자들이 더 많은 사람을 찾아가 감리교 메시지인 자유 은총과 기독교인의 완전에 대해 설교를 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애즈버리의 이 순회 제도는 미국 감리교의 부흥에 큰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감리교 순회 설교자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개척민들을 따라 어디든지 찾아가 복음을 전했으며, 외딴곳에 떨어져 있는 정착민들을 찾아가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무엇보다 애즈버리 자신이 이러한 감리교 순회 제도의 모범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45년간 거의 쉬지 않고 순회 여행을 했으며 30만 마일(50만㎞)의 광대한 지역을 다니며 1만6000여 차례의 설교를 했습니다. 애즈버리는 순회를 하는 동안 편안하게 거처할 수 있는 처소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인들 집의 빈방이나 여관, 더러운 오두막이나 과수원, 제지 공장 창고나 떠돌아다니는 포장마차 등 잠잘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를 기념하기 위해 1923년 켄터키주 윌모어에 애즈버리신학교(Asbury Theological Seminary)가 세워졌습니다. 이 학교는 최근까지 ‘애즈버리’ 부흥으로 유명합니다.
하지가 쓴 전 3권의 ‘조직신학’은 칼뱅의 ‘기독교 강요’ 이후 지금까지 500여년 동안 대표적인 개혁주의 조직신학서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하지가 평생의 연구를 마감하며 출판한 이 책은 정통 칼뱅주의 신학의 주 교재로서 미국에서 100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찰스 하지는 1851년부터 1878년까지 프린스턴신학교의 학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권위를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의 신학은 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신학이었고, 스콜라적 칼뱅주의, 특히 투레틴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성경의 축자영감설과 무오성을 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신학은 정통 칼뱅주의가 미국의 사상계 일반에서 쇠퇴하고 진화론적 사상이 세력을 떨치기 시작할 때 초자연적으로 영감된 성경을 확고하게 옹호했고, 이를 통해 ‘프린스턴 신학’ 이라고 불려지게 될 신학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프린스턴 신학은 하지 자신이 속한 장로교파뿐 아니라 다른 교회들에도 강력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1878년 6월 19일 영원한 안식에 들기 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육신을 떠나는 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며, 주님과 함께하는 것은 그분을 뵙는 것이다. 그분을 뵙는 것은 바로 그분을 닮는 것이다.”
1838년 태어난 블리스는 소년기에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했으며 1860년 음악교사가 됩니다. 1864년 시카고의 음악 잡지 발행인인 케디 여사의 도움으로 찬송시와 그가 작곡한 찬송가를 처음으로 선보이게 됩니다.
그의 나이 38세에 부인과 함께 무디 목사의 부흥전도단에 합류하기 위해 퍼시픽 급행 열차를 탔습니다. 시카고로 향하던 기차가 오하이오주에 한 철교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철교가 무너져 차량 7대가 불이 붙은 채 강바닥으로 추락하고 맙니다. 블리스는 이 사고 당시 열차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왔으나 부인이 빠져나오지 못한 것을 알고 부인을 구하러 다시 차량으로 들어갔다가 부부 모두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동료들이 블리스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블리스의 찬송시가 적힌 노트를 발견했습니다. 가사는 ‘나의 구세주를 노래하리’ 라는 내용의 찬송시였습니다. 이 찬송시에 미국 작곡가 매그라나한(1840~1907)이 곡을 붙여 ‘속죄하신 구세주를’ 이라는 찬송가가 된 것입니다.
블리스가 작사·작곡한 곡은 현재 우리나라 새찬송가에 총 10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사한 찬송은 총 7곡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161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200장)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202장) ‘주의 확실한 약속의 말씀 듣고’(267장) ‘속죄하신 구세주를’(298장) ‘하나님의 진리 등대’(510장) ‘듣는 사람마다 복음 전하여’(520장)가 있습니다. 작곡한 곡은 3곡으로 ‘주의 말씀 듣고서’(204장) ‘내 너를 위하여’(311장) ‘내 평생에 가는 길’(413장)입니다.
블리스의 찬송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또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내용의 찬송시가 많습니다. 찬송가에 실린 곡들은 모두 애창하는 곡입니다.
그가 작곡한 찬송 가운데 ‘내 평생에 가는 길’은 기가막힌 사연을 담은 곡입니다. 불행의 와중에 지은 승리의 찬송인데요. 묘하게도 작곡자인 블리스뿐 아니라 작사자인 H G 스패포드 역시 비극적인 개인사가 있었습니다. 스패포드는 무디교회 회계 담당 집사로 시카고에서 명망있는 변호사였습니다. 1870년 그는 건강이 좋지 않는 부인을 네 딸과 함께 요양차 유럽으로 보냈는데 타고 가던 프랑스 여객선 ‘피난의 마을’ 호가 영국 철갑선과 충돌, 네 딸은 죽고 아내만 살아남았습니다. 원래 스패포드도 동행하려 했으나 당시 시카고 대화재로 집과 교회가 불타버려 이를 처리하느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내로부터 당도한 전보를 받고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탔고 사고 지점을 지날 때 밤새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찬송가 가사는 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안 속에서 지었다고 합니다. 1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우리 삶의 국면이 어떻든지 주님과 함께 있으면 우리 영혼은 평안입니다.
블리스는 유명한 시카고 설교자 D L 무디의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869년 무디와 인연을 맺으며 찬양 인도자로도 활동했습니다. ‘가스펠송’이란 말은 그가 1874년 당시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D W 위틀 집회에서 찬양인도자로 활동하면서 출판한 노래 모음집 ‘가스펠송’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가스펠송은 당시 대중적 부흥 집회나 산과 들에서 열린 천막 집회에서 노래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거나 구원의 기쁨을 간증하며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개인적이며 주관적으로 표현한 것이 그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음악적으로는 명랑하고 민요적인 요소를 담은 게 특징이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애창하는 찬송들 상당수가 당시 불리던 가스펠송이었고 이 노래들은 블리스를 비롯해 아이러 생키, 월리엄 커크패트릭, 패니 크로스비 등 유명한 가스펠송 작사·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대에서 수학과 자연과학,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유창한 화술과 엄격한 논리로 명성을 얻으면서 설교자가 됐고 애국자요 개혁가로서 정치에 관여했습니다. 옥스퍼드대 교수를 거쳐 국왕 에드워드 3세의 궁정 사제로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교황청은 로마가 아니라 프랑스의 아비뇽에 있었습니다. 아비뇽 유수로 1309∼1377년까지 7대에 걸쳐 로마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이전해 프랑스 왕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아비뇽 유수로 교황권은 크게 약화하였으며, 아비뇽 교황들은 프랑스 왕의 영향에 놓여 프랑스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로마와 아비뇽에 2명의 교황이 분립하게 되는 교회의 대분열로 이어지면서 교황권은 더욱 쇠약해지게 되었습니다.
위클리프는 ‘명제집’ ‘속권론’ 등의 책을 집필하면서 일체의 합법적 통치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통치권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던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른 특성을 지녀야 한다고 했습니다.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일체의 통치 형태는 진정한 통치가 아니며 차라리 반역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당시 세금 징수 및 교황들의 세속 권력에 관한 문제로 교황청과 분쟁을 벌이고 있던 영국의 세속 권력자들에게 환영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위클리프는 교황에 대한 납세 반대, 교회 재산 몰수와 국가 귀속, 영국 왕실 재정의 자주권, 정부 권력에 반대하는 성직자 비난, 교회에 대한 국가의 기득권 등 반(反) 교황 정책과 교회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특히 로마와 아비뇽에 두 명의 교황이 분립하는 교회의 대분열(1378~1417)로 이어지면서 교황권이 더 쇠약해지자 위클리프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황과 그의 눈에 보이는 유형의 제도가 아니라 무형의 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교회는 불순한 사제들이 자행하는 청탁, 갹출, 면죄부의 남용, 기부금의 낭비 등으로 부유해져서는 안 되고, 오히려 1세기 교회처럼 가난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위클리프는 당시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구원에 참여치 못할 유기된 자들이라고도 했습니다. 그의 생애 말기에는 교황마저도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 가운데 포함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또 성찬과 관련, 가톨릭 교리인 화체설(化體說)을 부인하고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성질은 그것을 받는 자의 신앙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성찬 논쟁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런 그의 주장은 훗날 루터의 사상과도 흡사했습니다.
위클리프는 신앙생활에서 성경이 유일한 기준이자 권위임을 천명하면서 성경의 영어 번역을 주장했습니다. 성경은 교회의 소유이며 오직 교회만이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성경을 소유한 교회는 모든 택정함을 입은 자들로 이루어진 몸이며, 따라서 성경은 바로 몸을 이루는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돼 그들 손에 들어가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런 주장들은 훗날 종교개혁의 원칙이 됐습니다. 그래서 그를 ‘종교개혁의 샛별’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 11세는 위클리프에게 19가지 죄목을 씌워 체포를 명했으나 영국 국왕 리처드 2세의 보호로 위기를 모면했고, 켄터베리 대주교의 공격으로부터도 신체적 위해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후 1381년 대학에서 은퇴한 위클리프는 라틴어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중에도 설교를 멈추지 않았고, 설교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전념하다 1384년 12월 31일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개혁적인 사상은 보헤미아의 개혁자 후스와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 훗날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탄생시키는 토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사후에도 가톨릭교회의 공격을 받아 1415년 콘스탄스 공의회는 그를 ‘목이 곧은 이단’으로 정죄하고 책을 불태우라는 포고를 내립니다. 1428년 그의 유해는 파헤쳐져 불에 태워졌고 그 재를 스위프트 강에 뿌려지는 일종의 부관참시의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 같은 조치는 당시 교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바탕에는 ‘영어는 야만적 언어라 문법 구조도 제대로 갖춰 있지 않아 성경의 심오하고 미묘한 진리를 표현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는 사제들만의 성경이었습니다. 1559년 영국에서 종교개혁이 마무리되면서 그는 복권되어 영국민들로부터 개혁자로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위클리프성경은 위클리프가 ‘성경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기초가 되며 당연히 자신들의 글자인 영어로 읽고 각자가 자유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불가타를 영어로 번역, 제자 헤레포드의 니콜라우스의 도움으로 최초의 영어 완역본 성경을 완성했습니다. 신약성경은 1380년에, 신·구약 전체는 1382년 발간했습니다.
위클리프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생전에 제자 중 일부가 그의 교리를 전파했습니다. 이들을 ‘롤러드’(Lollard)라고 불렀는데요. 위클리프와 비슷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롤러드는 ‘중얼거리는 자’라는 의미에서 파생한 말입니다. 이들은 성경은 원래 일반 대중에게 속한 것이므로 이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또 성직자들은 세속 관직을 겸직할 수 없으며 성상의 사용이나 성직자들의 독신제도, 순례 등은 모두 신성모독적 행위라고 믿었습니다. 화체설과 죽은 자를 위한 기도도 부인했습니다.
위클리프 이후 100여년 뒤 윌리엄 틴들(1494-1536)은 위클리프에게 영향을 받아 그리스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는 영어성경 번역을 위해 독일로 건너가 비밀리에 번역 작업을 했으며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단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번역한 죄로 체포돼 결국 1536년 10월 6일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고 말았습니다. 1611년 출간된 킹 제임스 성경 영어판 70%가 틴들의 성경에 근거합니다.
‘레 미제라블’의 저자 빅토르 위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잉글랜드는 두 권의 책, 곧 성경과 셰익스피어를 갖고 있다. 잉글랜드는 셰익스피어를 만들었지만 성경은 잉글랜드를 만들었다.”
위클리프의 이름을 따 전 세계 언어로 성경을 번역해 보급하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위클리프성경번역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ors)로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본부를 둔 선교단체입니다. 1942년 윌리엄 카메론 타운센드에 의해 시작된 선교회는 현재 주요 국가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한국 지부 단체로는 GBT가 있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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