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상의 세상만사] 구국영웅의 재발견
요즘 역사를 바탕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패배의 역사인 12·12 군사반란을 직접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1000만 관객을 앞두고 있고, 이순신 장군의 최후 전투를 다룬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가 흥행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우리 역사에서 선과 악을 대변하는 두 인물이 흥행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인물을 드라마에서 발견한 점이다. 바로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영웅 양규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이 왜에 망할 뻔한 조선을 살린 것과 마찬가지로 양규 장군은 거란에 망할 뻔한 고려를 구했다.
1010년 양력으로 12월 30일. 거란 성종이 40만 대군을 몰고 고려를 침략한 날이다. 이 전쟁은 1011년 3월 11일 지금의 북한 선천군 일대인 ‘애전’에서 고려 현종의 ‘친조’를 명분으로 강화를 맺고, 다음날 거란군이 퇴각하면서 끝나게 된다. 그사이 고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개경이 함락되는 바람에 궁궐이 불탔고, 수많은 고려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많은 문화재가 약탈당하고 불탔다. 그나마 고려가 망하지 않은 것은 양규 장군 덕분이다.
흥화진. 현재의 신의주 인근에 있는 작은 성으로 개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흥화진 도순검사였던 양규 장군은 처음 벌어진 흥화진 전투에서 불과 3000명의 군사로 40만 대군을 1주일이나 묶어 둬 고려 조정이 대비할 시간을 벌어줬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에 버금가는 기적과도 같은 승리가 아닐 수 없다.
거란 성종은 어쩔 수 없이 흥화진 점령을 포기했다. 그리고 뒤를 염려해 흥화진 부근에 20만 군사를 남겨둔 채 20만 군사를 이끌고 강조의 30만 주력군이 진을 치고 있던 통주를 쳤다. 통주 전투는 초반의 승리에 취해 적을 얕보았던 강조가 사로잡히는 바람에 대패했고 3만명에 달하는 고려군이 전사했다. 이 통주 전투 패배의 여파로 고려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로 인해 개경까지 점령당했으며 고려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을 떠나야 했다.
이에 다시 양규 장군이 나섰다. 어렵게 흥화진을 방어한 지 20여 일이 지난 1011년 1월 28일 불과 1700여 명의 군사로 거란이 점령하고 보급처로 삼았던 곽주를 공격했다. 양규 장군은 6000명의 거란군이 지키던 곽주를 기어이 탈환해 거란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한편 포로로 잡혀있던 7000명의 백성을 구해냈다. 당시 양규 장군이 어떻게 곽주성을 탈환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보통 성을 빼앗기 위해서는 수비하는 군사의 열 배가 넘는 병력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1700여 명의 군사로 6000명이 수비하던 곽주성을 탈환한 양규 장군의 용맹과 지략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가늠할 수 있다.
이후 양규 장군은 일곱 차례에 걸쳐 거란군과 유격전을 펼쳐 3만명이 넘는 포로를 구해냈다. 이런 양규 장군의 활약 때문에 거란은 어쩔 수 없이 고려와 강화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양규 장군은 강화를 맺고 퇴각하던 거란군 주력 부대를 맞아 싸우다 전사하고 만다. 양규 장군이 이순신 장군으로 환생한 듯 전사 장면이 판박이다. 전쟁이 끝난 후, 고려 현종은 양규 장군의 공을 기리고자 ‘공부상서’를 추증하고 14년 후에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최고의 공을 세웠다는 의미의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린다.
양규 장군이 위대한 건, 수도 개경이 함락돼 고려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 있을 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의 몇 배를 행했기 때문이다. 강조가 통주 전투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서경의 장수들이 대세가 기울었다며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을 결정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의 용맹함과 위대함이 더욱 빛난다.
이런 영웅의 진면목을 이제야 비로소 알아보게 되어 괜히 양규 장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눈을 떠 보니 후진국이라고 자조하는 요즘, 양규 장군처럼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역할만이라도 제대로 실행하는 리더조차 보이지 않는 건 필자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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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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