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봄 참군인 묘비는 '단 한줄'... 눈물이 났습니다
[김종훈 기자]
▲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잠든 김진기 헌병감의 묘. |
ⓒ 김종훈 |
2024년 1월 13일 '서울의봄·12.12 특별 현충원투어'를 진행합니다. 지난 12월 9일 서울현충원 투어에 이어 대전현충원에서 진행하는 공익목적의 비영리 투어입니다. 지난 18일 안내 기사를 쓴 탓에 신청자가 이미 150여 명이 넘은 상태입니다.
23일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미리 사전 답사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혼자 대전현충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장군2묘역 최상단, 그곳에서 김진기 헌병감의 묘비를 마주하고 눈물이 났습니다.
'이 세상 태어나서 2006년 12월 28일 이 세상을 떠났다'
12.12 반란군에 맞서 싸운 군인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 치고는 참으로 단출했습니다. 그럴 것이 김진기 헌병감의 주변에 자리한 12.12반란 주역들의 묘비엔 하나같이 '정직', '청렴', '용맹', '헌신' 등 온갖 미사여구가 가득 새겨졌습니다. 심지어 '참군인'이라는 말도 부지기수였습니다. 문제는 어디에도 '반란을 일으켜 반성한다'는 내용은 찾으려야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
오직 반란군에 맞서 싸운 김진기 장군의 묘만 '고인의 유지'라는 말과 함께 아무런 수식 하나 없이 이 세상 태어나 이 세상 떠났다는 내용만 새겨졌습니다.
▲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잠든 김진기 헌병감의 묘. |
ⓒ 김종훈 |
'그는 대체 왜 이 말 한마디만 남긴 것일까?'
사전답사를 마치고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입니다. 애석하게도 김진기 헌병감이 남긴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과 함께 전두환·노태우 등 군사반란에 참여했던 34명을 반란 및 항명 등 혐의로 대검에 고소할 때 몇몇 방송과 남긴 짧은 인터뷰가 전부입니다.
"정승화 장군은 날조된 내란방조의 전과자가 돼 있고 그의 인격과 인생이 파괴당하였다. 아직 연금도 못타는 실정이다. 정병주 장군에 대한 배신의 총격과 의문의 죽음, 군 충성의 귀감이 될 김오랑 소령의 희생과 그 미망인의 의문의 죽음, 하소곤 장군의 총격 중상, 총장 공관에서 두 장교가 당한 무차별 총격과 중상 그리고 진압군이나 반란에 동원되었다가 희생된 장병들, 특히 조국과 군을 위하여 한목숨을 걸고 헌신해 온 선배 장군들과 유능한 장교들이 하루 아침에 죄인처럼 군에서 쫓겨나거나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이같은 사연들은 개인적인 문제에 속한다. 국방부를 비롯한 상급사령부가 적대행위 이상의 잔인한 방법으로 습격되고 강점됐던 사실. 이로 말미암아 군의 통치권과 지휘계통은 송두리째 무너졌다. 군에는 결코 지휘계통과 사조직의 이원화된 계통이 있으면 안된다는 교훈을 남겨주어야 한다. 법적인 명확한 매듭이 있을 때 오늘의 국군에 12.12반란세력의 후계자가 아닌 참된 제2창군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것이다." - <13 년만에 처음 밝히는 전육본 헌병감 김진기의 육성>에서
김 헌병감은 해당 글에서 "10.26 당일 밤 김재규 체포를 지연시키고 국가위기를 증폭시킨 장본인은 정승화 총장이 아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면서 "전두환은 자기가 져야할 더 중대한 책임을 상관에게 뒤집어 씌우는 군인의 기초적 양식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비열한 행동을 자행했다. 이것은 12.12가 어떤 명분도 없이 전두환 소장 개인의 야망과 그를 추종하는 사조직의 이익을 위하여 구실을 만들어 일으킨 저질의 반란이었음을 입증하는 사실"이라고 부연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전두환은 국회청문회에서 반성은커녕 버젓한 거짓말과 12.12때의 각본 그대로 상관들에게 뒤집어 씌운 죄를 거듭하며 매도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며 "엄정한 법의 심판으로 교훈을 남겨 그 같은 불미하고 불행한 반란의 재현을 단연히 막자는 것이 우리에게 부과된 시대적 사명이다. 지체 없는 조속한 매듭으로 깨끗이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라고 재차 강조했습니다.
▲ 1995년 12월 12일 김진기 12.12 당시 육본 헌병감이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 묘소 앞에서 증언하는 모습. |
ⓒ MBC 뉴스 화면 캡처 |
김 헌병감은 평안도에서 한국전쟁 직전 월남했습니다. 이후엔 육사 9기를 거쳐 갑종장교로 임관하는 특이한 이력을 지녔습니다. 특기가 헌병이었기에 자연스레 헌병 중대장과 헌병 대대장, 3군 헌병참모, 육군 헌병차감, 국방부 조사대장, 육군 헌병감 등을 지냈습니다.
과정에서 1979년 10.26이 발발하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체포 작전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50여 일 뒤 전두환 등 하나회 일당에 의해 일어난 12.12군사반란은 결국 막아내질 못했습니다.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의 체포 승인을 받기 위해 총리공관에 머물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체포하라고 직속 부하인 총리공관 헌병 특별경호대장 구정길 중령에게 명령하지만 헌병 경비 병력들이 하나회 병력인 대통령 경호실 병력에 의해 무장해제되며 실패합니다. 이에 김 헌병감은 휘하의 병력만을 이용해서라도 최 대통령을 구출하려 했지만 장태완, 정병주 장군처럼 부하들의 하극상으로 인해 실패하고 맙니다. 그 뒤 수도경비사령부 지휘부에서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에게 무장해제 됩니다.
김 헌병감은 국군보안사령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비역 준장으로 자진 예편하고 군을 떠납니다. 예편 후엔 수원에서 농사를 짓다 반란군이 나라를 주무르는 것을 보고 이 모습이 보기 싫다 하여 아예 보문도라는 섬에 들어가 광어 양식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물론 일생을 군인으로만 살아왔기에 사업은 크게 실패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1987년 6월 항쟁 등으로 전두환 정권이 무너져 내리자 그해 11월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신군부의 만행을 폭로했습니다. 그러나 정병주 장군은 이듬해인 1988년 10월 16일 밤 10시에 갑자기 행방불명됐습니다. 그리고 실종 139일 만인 1989년 3월 4일에 경기도 한 야산에서 목매달아 죽은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정 장군의 죽음은 자살로 처리됐습니다.
김진기 헌병감은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자 유화책 차원으로 진행된 여러 보직 제의를 모두 거절합니다. 문민정부 시대가 열리고 나서야 한국토지공사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1993년 예비역 장성들인 이건영, 하소곤, 정승화 등과 함께 전두환을 내란죄 등으로 고발한 겁니다. 해당 수기는 그즈음 남긴 기록입니다.
▲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1980. 9. 1) |
ⓒ 국가기록원 |
그러나 김 헌병감의 이러한 노력에도 전두환은 끝끝내 사과하지 않고 2021년 11월 23일 사망했습니다. 심지어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이 12.12사건은 군사반란이며 5.17사건과 5.18사건은 내란 및 내란목적의 살인행위였다고 판단했어도 전두환은 제5공화국 정부는 합헌 정부로서 내란정부로 단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2003년 2월 SBS와의 인터뷰에서는 "(5.18)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다. 그러니까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지 않나"라며 유혈 진압을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뿐일까요?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12.12 당시 1공수 여단장으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무력으로 점거했던 박희도 역시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법을 조롱하는 행태를 보여왔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한 직후인 1995년 11월 'LA에 있는 아들을 보러 간다'면서 출국해 미국으로 도피했습니다. 3년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기소중지 상태였던 그는 뒤늦게 귀국해 재판을 받고 징역 5년을 선고받았지만 공범들이 이미 사면·복권된 후여서 법정구속 되진 않았습니다. 이후 박희도는 극우적인 활동에 전념하며 역사를 왜곡하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심지어 지난 11월 23일 서울 광화문네거리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전두환 2주기 추모식'에 참석해 목소리를 높이는 악행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2.12는 철저하게 소수 정치군인들이 권력에 눈이 어두워서 저지른 권력을 위한 쿠데타였습니다. 동료는 물론이고 상관까지도 살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방비가 없는 상급사령부에 대해서 무차별 공격을 했고 마치 점령군처럼 행세를 했습니다. 이거는 동서고금에 쿠데타 역사에 유례가 없는 가장 치욕적인 부끄러운 쿠데타입니다."
김진기 헌병감은 아마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참군인으로서 12.12쿠데타의 진상을 밝혀 역사와 국민 앞에 반란군들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던 거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 본인도 최선을 다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바랐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이 세상 태어나서 이 세상을 떠났다'는 단출한 문장 한줄만 남겼습니다. 반란군에 맞서 일생을 싸운 참군인 김진기를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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