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누명으로 옥살이... 그가 '남의 재판'에 계속 나가는 이유
[김혜리 기자]
"일본에서 차별받는 재일 동포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간첩'으로 이용당했어요. 이런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재일동포들을 외면하지 않길 바라요."
'재일동포 학원 침투 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 중 한 명인 이동석(만 71세)씨는 48년 전 '기억해야 하는 일'을 말했다. 1975년 11월 '학원침투 북괴간첩단'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아래 중정)와 육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 아래 보안사)는 재일동포 유학생 12명, 국내 대학생 9명 등 21명 구속했다.
▲ 재일동포 2세 이동석씨(만 71세). 재일동포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로, 2015년 재심 청구를 통해 무죄를 인정받았다. 한국에 거주 중인 그는 현재 재심 절차를 밟는 재일동포들의 재판에 함께 하고 있다. 몽당연필의 회원으로, 조선학교 차별철폐를 촉구하고 있다. 그 밖에 다양한 영역에서 연대 중이다. |
ⓒ 김창섭 |
평범한 유학생에서 간첩이 되기까지
이동석씨는 재일동포 2세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의 뿌리는 한국인이어서 어려서부터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다. 일본인들로부터 '조센징'이라며 놀림거리가 되는 탓에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겼지만, 18세부터는 일본 이름을 버리고 한국 이름으로 살아가는 '본명 선언'을 했다.
그 후 친구와 '조선문화연구회'를 만들고, 우리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을 더 알고 싶었던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유학길을 택했다. 1973년 한국외대 불어과에 입학하고 평범한 유학 생활을 즐겼지만, 1975년 하숙집에서 잠을 자다가 보안사에 끌려갔다.
그는 불법 감금에 이어 40여 일 동안 모진 고문과 강압 조사를 당하며 조서를 썼다. 그가 조선문화연구회를 통해 한국어를 배웠다는 일도 간첩이라는 증거물이 됐다.
"고등학교 때 조선문화연구회 만들어서 우리 말, 역사를 좀 배운 것도 쓰라는 거예요. 책 봤다면 어떤 내용이고, 영화를 봤다면 어떤 영화였느냐… 몇 번을 다시 써라, 무조건 써라…"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유신독재에 대한 국민 불만이 커질 때마다 이를 잠재우기 위해 간첩 사건을 조작해 냈다. 특히 재일동포들은 간첩단으로 '엮기' 좋았다. 일본에는 북한과 연계된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들은 한국의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을 잘 알지 못했고, 불법 체포·구금됐을 때 자신을 방어하기도 어려운 취약계층이었다. 유학생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던 재일동포들을 간첩으로 내몬 사건은 더 많았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1970-1980년대에 일어난 재일동포 간첩사건은 130여 건으로 파악됐다.
결국 이동석씨는 간첩 누명을 쓰고 5년 징역형을 받은 뒤,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서울 구치소에 이어 대전교도소 독방에 갇혔다. 일본에 있는 그의 가족·동급생·시민들은 '이동석을 구원하는 모임'을 꾸렸다. 이들은 이동석씨를 보러 구치소·교도소 면회를 가거나, 그에게 편지 등을 보냈다.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살기 위해 버텼다.
이동석씨는 형기를 거의 채운 4년 8개월 뒤 가석방으로 풀려났지만,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당시 사회안전법 제6조에 따라, 그는 정해진 구역에서 벗어나면 경찰에 신고해야 했다. 경찰들은 이동석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된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후 이동석씨는 일본 오사카로 돌아가 일을 하고 결혼하는 등 삶을 꾸려나갔다. 한국에 오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갈 수 없었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후 한국에 왔으나, 감시당해 10년 가까이 한국에 오질 못했어요."
그는 간첩으로 몰린 지 40여 년 뒤에야 무죄라는 게 밝혀졌다. 진실화해위가 2008년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이 조작됐다며, 진실 규명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에 간첩 조작 사건의 재일동포 피해자들은 잇따라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동석씨도 2011년 2월 재심을 청구한 뒤, 2015년 9월 누명을 벗었다.
다만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이동석씨는 감옥에서 보낸 20대에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도, 고문으로 인한 심리적·육체적 상처에 대해서도 보상받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던 그는 이전에 못다 한 학업을 이어갔다. 2018년 한국외대 프랑스어과에 재입학했고, 2021년 2월 동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에 거주 중이다.
재일동포 간첩 조작 사건 이후 남겨진 과제
아직 재심을 청구하지 못한 재일동포들도 있다. 행방불명이 된 사람, 고문 피해로 병원에 있는 사람 등이다.
또 현재 재심 청구 중인 재일동포들도 있다. 이동석씨는 이들의 재판에 빠지지 않고 함께 하고 있다. 과거 자신이 겪었던 고문 등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들춰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라고.
"먼저 무죄를 받은 사람으로서 저와 같은 어려움을 경험한 사람들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것만큼은 제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가지고 있어요."
이동석씨는 지난 19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일동포 간첩 사건 피해자인 고(故) 진두현씨의 재심 재판에도 함께했다.
그가 바라는 일 중 하나는 무고한 사람의 청춘을 짓밟은 가해자 처벌이다. 그에게 가해자 처벌은 '역사 바로잡기'이기도 하다.
"사람을 고문하거나, 이를 지시한 자들이 멀쩡히 살아있는 건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러나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현행법상 재일동포 피해자들을 고문한 수사관들에게 책임을 물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 이에 그는 '재일동포 피해자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특별법에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 ▲피해자 구제와 보상, 명예 회복 ▲가해자 처벌 등이 담겨야 한다고 말한다. 앞서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재일동포들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와 함께 과거 보안사 등 고문 가해자들에 대한 구상권 행사를 청구해야 한다고 법무부에 촉구한 바 있다.
일본에선 이방인 취급을 받고 한국으로부턴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렀던 그는 한국 정부가 재일동포에게 사과하는 차원에서 '조선학교'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학교는 일본의 재일 조선인들이 후손들에게 우리 말과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민족학교다.
현재 조선학교는 일본 정부로부터 차별받아 고교 수업료 무상화 대상에서 제외됐다. 일본 지방자치단체에서 받던 보조금도 중단돼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선학교 학생들은 한국을 혐오하는 일본인들에게 위협당하는 상황에도 놓였으나, 한국과 일본 정부 모두 이를 외면하고 있다.
이동석씨는 이렇게 말했다.
▲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회원들이 지난 10월 28일 덕수궁 돌담길에서 열린 '조선학교 차별철폐를 위한 2023 거리행동'에 열었다. 이날 참여한 이동석 씨는 '조선학교 차별 반대! 고교 무상화 적용!' 을 촉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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