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로 나라를 지키다’… 새 출발 앞둔 간송미술관
수천의 사람들이 줄을 서는 진풍경을 만든 국민전시관이 있다. 1938년부터 85년 동안 한국 미술사를 지켜온 ‘간송미술관’이다.
고미술 전시는 고리타분하다는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며 문화재 전시의 변화를 이끄는 간송미술관 전인건 관장을 지난달 성북동 미술관에서 만났다.
간송미술관을 만든 간송 전형필의 삶은 문화를 통해 나라의 정신을 지킨다는 의미인 ‘문화보국’으로 정리될 수 있다.
간송은 문화재를 시대정신과 역사 문화를 오롯이 담고 있는 증거품으로 여겼다. 그는 일제의 탄압에 훼손된 정신과 문화를 문화재를 통해 되돌릴 수 있다고 믿고 재산을 쏟아 문화재를 사 모았다.
간송은 ‘훈민정음해례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등 흩어져있던 40점 이상의 국보, 보물, 지정문화재를 수집했다. 1938년에는 국내 최초 사립미술관 ‘보화각’을 세워 문화재를 안정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개관 이래로 85년이 흘렀다.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이 됐고 한국 문화는 세계의 주목을 받는 시대가 왔다.
전 관장은 현대의 문화보국을 ‘문화로 나라의 정신을 세우는 것’으로 재정의했다. 그는 “우리의 예술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우리 문화재가 답할 수 있다. 문화재를 통해 한국 고유의 미감과 문화적 DNA를 바로 알리고, 우리 민족에게 마땅히 가져야 할 자긍심과 자신감을 주는 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보국”이라고 했다.
전 관장은 2019년에 미술관을 정부에 박물관으로 등록하고 외부의 지원을 받아들였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 비지정 문화재의 보존 처리와 훼손 예방 작업을 진행했고 수장고도 새로 지었다.
전 관장은 “문화재는 간송의 것도, 제 것도, 동시대 사람들의 것도 아니다. 앞으로의 세대와 모든 세계인을 위한 것이다. 지속 가능한 보존을 생각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속 가능한 보존을 위해서 문화재 활용이 필요하다. 미술관은 작품의 디지털화를 통해 보존과 공존하는 활용을 실천한다”고 말했다.
미술관은 2014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진행한 ‘간송문화 2부: 보화각’에서 미인도 원화와 디지털화 작품을 함께 전시했다. 미디어 아트 작가와의 협업 작품도 공개했다.
올해는 메타버스 플랫폼 ‘더샌드박스’와 함께 혜원전신첩 속의 18세기 한양을 배경으로 한 메타버스 게임을 만들었다. 게임 이용자는 혜원 신윤복의 작품 속을 자유롭게 탐방하며 조선 후기의 풍류와 풍속을 체험할 수 있다.
전 관장은 “디지털 작품으로 원화가 주는 감동을 완벽히 재현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디어가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는 디지털 작품을 통해 더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다”며 “디지털 작품은 원본 작품의 대체재가 아닌 상호 보완재다. ‘원화는 어떨까?’하고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이어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보존할 가치도 약해진다. 발전하는 기술을 최대한 받아들여 젊은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겠다. 젊은 세대의 지지가 있어야 보존의 이유가 생긴다”고 덧붙였다.
전 관장은 고미술이 지닌 선입견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는 “교과서에 있는 옛날 작품이 뭐가 재밌겠냐는 말을 듣는다. 문화재가 주는 편안함이 선입견을 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미술관은 작품과 설명을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전시 방식에서 벗어났다.
지난해 대구 윤선 갤러리에서 개최된 ‘먼저 만나는 대구간송미술관, 간송다담’ 전시는 20건의 국보 전시와 함께 북카페·강연 행사로 이뤄졌다. 관람객들은 북카페에서 연구논문이 실린 도록 ‘간송문화’와 미술사 서적을 열람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강연을 통해 소장품에 얽힌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다.
전 관장은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는 것을 좋아한다”면서 “문화재만의 친숙한 이야기를 새로운 방법과 기술로 풀어냈다. ‘간송다담’의 행사뿐만 아니라 함께 전시한 영상도 반응이 좋았다. DDP 미디어 전시, AR 콘텐츠도 마찬가지였다. 익숙한 문화재를 새롭게 보면서 다채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전시를 만들겠다”고 설명했다.
미술관은 세계 최초로 문화재 기반 NFT를 제작했다. 100개 한정으로 발행된 훈민정음해례본 NFT가 화제를 모은 데 이어 혜원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NFT 에디션은 완판을 기록했다.
NFT로 기록한 문화유산은 원본에 가까운 최상의 상태다. 혜원전신첩 NFT는 원본을 고화소로 촬영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구매자는 작품 속 섬세한 붓 터치까지 감상할 수 있다. 더불어 세월의 흐름에도 훼손되지 않는 영구적 보존이 보장된다.
NFT는 간송의 팬덤 커뮤니티를 만드는 핵심 기술로도 활용된다.
전 관장은 “침해 불가능한 팬클럽 멤버십의 개념이다. 간송의 역사와 철학을 좋아하는 팬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기반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례본 NFT 구매자는 후원회에 가입되어 혜택을 제공받을 뿐만 아니라 미술관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혜원전신첩을 포함해 앞으로 진행되는 NFT 프로젝트의 소유자들을 위한 프로그램들도 만들어지고 있다.
이번 해 3월 미술관은 글로벌 팬덤 비즈니스 기업 ‘비마이프렌즈’와의 협업을 통해 간송 브랜드 커뮤니티 ‘간송 비스테이지’를 오픈했다. 커뮤니티에 가입한 팬클럽 회원들은 간송의 최신 소식부터 강연 생중계까지 만날 수 있다.
전 관장은 “큰 팬덤보다는 소수의 진짜 팬부터 시작하여 성장해 나가는 팬클럽이다. 가입하는 사람이 소수일지라도 가입 비용이 모이면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재정적인 기틀이 된다”면서 “비스테이지, NFT 등을 통해 팬덤과 깊은 관계를 만들고 있다. 함께 소통하고 뭉치면서 성장해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동안 미술관의 전시는 1년에 2번 열렸다. 4주가 넘지 않는 짧은 전시 기간에 맞춰 지방이나 해외에서 찾아오는 관람객들은 어려움을 토로했다. 전 관장은 거리와 시간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대구간송미술관 건립을 결심했다.
대구, 남부권 국민을 위한 문화적 인프라 구축 차원에서 대구시가 미술관 건립과 운영 경비를 분담한다. 전 관장은 “시립미술관의 전시 공간을 간송의 소장품과 콘텐츠로 채우며 협력하는 형태”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왜 대구일까? 대구의 역사∙문화적 정신이 간송의 정신과 맞닿아있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다. 전 관장은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점이며 3.1 운동의 중심지였다. 국내 최대이자 유일한 독립유공자 전용 묘지 ‘국립신암선열공원’도 있다. 문화적으로는 산업화를 이끌며 문화, 미술, 음악에 대한 후원이 쌓인 역사가 있다. 두 성격 모두 간송과 맞물린다”고 밝혔다.
지류 문화재도 한몫했다. 대구, 경북 지역은 유교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책, 그림 등의 지류 유물 보유량이 많다. 대구간송미술관은 지류 문화재의 허브 역할을 자처했다.
전 관장은 “대구간송미술관에 보존 과학실과 수장고를 만들고 있다. 기후 변화에 맞춰 현대화된 보존 방식을 도입했다. 간송미술관을 운영하며 쌓은 노하우로 지류 문화재의 보존, 수리, 보관, 연구 등 모든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대구간송미술관은 내년 상반기 개관을 앞두고 있다.
김지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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