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삶,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나 사용설명서 제대로 알기

김성호 2023. 12. 23.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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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독서만세 209] 김경일 지음 <적정한 삶>

[김성호 기자]

가방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책은 삶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지만, 책을 읽는 동안 수시로 가방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해 친구가 내게 선물해 준 가방이다. 평소 메고 다니는 가방이 낡아 보였는지 바꿀 때가 되었다며 친구가 가방 하나를 들고 왔다. 아직은 좀 더 멜 수 있겠는데 싶었으나 그 마음이 고마워서 그날로 바꿔 멨다. 그렇게 가방을 바꾼 게 일 년이 넘었는데 나는 지난주에야 이 가방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알았어야 했을 테다. 친구가 준 가방엔 마치 전자제품을 살 때나 들어있을 법한 설명서가 동봉되어 있었고, 나는 가방에 무슨 설명서냐 하고 어디 구석에다 처박아 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 년 남짓이 흘러 나는 비슷한 가방을 메고 다니는 누구를 만났고, 그는 친절하게도 내 가방이 변할 수 있는 몇 가지 모양과 그로부터 얻게 되는 편리함에 대하여 차근히 설명을 해주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 가방을 메고 다닌 그 긴 시간 동안 그가 보여준 것 중 단 한 가지의 기능도 알아채지 못했음을 알았다. 나는 이 가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이 가방이 될 수 있었고 해낼 수 있었던 가능성 또한 살려주지 못했다. 말하자면 알고 보면 달리 보이는 것이 세상엔 분명히 있다는 이야기다.
 
▲ 적정한 삶 책 표지
ⓒ 진성북스
 
사람에게도 설명서가 필요해

사람도, 몸도, 삶까지도 설명서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각종 매체와 강연 자리에서 자주 마주하는 김경일 교수의 <적정한 삶>은 사람과 삶에 대한 설명서와 같은 책이다. 설명서 없이도 하루든 일 년이든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는 게 인간이라지만 알고 보면 그 삶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음을 일깨운다. 나 또한 그러해서 책의 몇몇 대목을 조금 더 일찍 접했더라면 삶이 조금쯤은 풍요로워졌을 텐데, 읽는 내내 그런 생각과 수시로 마주하였다.

2021년부터 지금까지, 코로나19는 아주 많은 것을 바꾸었다.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이라 겉으로 보기에는 별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허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가벼운 재채기를 할 때조차 고개를 돌리고 입을 막는다. 가운데 나온 음식을 서로 덜어먹고, 전보다 훨씬 자주 손을 씻는다. 사람과 사람에 조금은 거리가 생겨내고 비대면 근무며 만남 또한 늘어나게 된 것이다.

바뀐 삶은 바뀐 행동을 요구한다. 한때는 적절했던 태도가 어느덧 부적절하게 여겨지고 그 반대 또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책은 코로나19 이후 다가온 세상, 말하자면 포스트코로나 시기에 유효할 수 있는 행동과 자세에 대하여 알기 쉽게 설명한다. 더불어 코로나19가 가져온 혼자의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오랜 습관과 태도를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라고 독려한다. 인지심리학자의 친근하고 설득력 있는 조언 가운데선 삶 가운데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적잖아서 어쩌면 이 책을 읽고 삶을 조금쯤 바꿔낸 독자도 적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된다.

같은 배터리를 공유하는 정신과 육체

저자는 현대 과학이 합의에 이른 몇 가지 개념을 독자 앞에 풀어놓는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와 같은 오랜 통념에 반하는, 정신과 육체는 거의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이를테면 둘은 같은 배터리를 활용하는 관계다. 배터리의 총량은 정해져 있기에 육체적 피로가 큰 상황에선 정신적 역량을 발휘할 수 없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고통 또한 마찬가지다.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을 뇌의 같은 부분이 관장한다. 진통제 하나가 같은 방식으로 정신과 신체의 고통을 함께 진정시키는 모습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정신과 육체의 밀접한 관계를 제대로 안다면 삶을 풍요롭게 할 가능성이 늘어난다. 우울과 무기력이 닥쳐올 때 가벼운 걷기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고, 몸이 피로할 때면 차근히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식이다. 불안과 분노와 같은 감정 또한 오로지 해로운 것만은 아니어서 이를 삶의 동력으로 이끄는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비어져 나오는 불안 앞에 이순신 장군을 소환하는 대목은 적잖이 흥미롭다.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불안 앞에 내던져진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 동안 확인된 것만 7권, 모두 2539일의 기록을 남겼다.

저자는 <난중일기>가 그저 한 인간의 습관을 넘어 불안을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실제적 효과를 발휘했다고 주장한다. 마음을 조급하게 이끄는 불안과 맞서 자리에 앉아 천천히 생각을 다스리는 행동이 심리적 고통을 즉각적이며 효과적으로 완화해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비단 장군의 태도 뿐 아니라 그의 습관으로부터 현재의 불안을 해소할 단서를 찾아내는 시각이 놀랍다.

세상살이 필수템, 나 사용설명서

2015년 4월 봄, 저자와 같은 학교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네팔 출신 보진드라의 이야기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80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네팔대지진 이후 보진드라는 학교를 떠나 고향으로 향한다.

그로부터 그는 고국에서 심리학 연구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학교로 보내온다. 지진을 겪은 호텔 직원들을 셋으로 나눠 감사에 대한 글을, 업무기록을, 또 평소처럼 아무것도 쓰지 않게 하는 실험의 결과다. 실험은 명백하게 일상의 감사를 되새기고 이를 기록한 이들이 업무능력 등에서 월등한 성취를 보였음을 알린다. 인간의 삶이란 이토록 작은 행동만으로 큰 변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책은 읽는 내내 내게도 사용설명서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일상의 감사를 떠올리고 상황을 기록하는 작은 일이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일에도 대응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 가볍게 걷고 집안을 청소하는 사소한 일이 일상을 휘감는 우울과 무기력을 물리치기도 한다는 것 같은 지식 말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나 사용설명서' 하나쯤은 갖고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김경일 교수가 주창하는 '적정한 삶'은 그가 써내려간 인간 사용설명서라 하겠다.

덧붙이는 글 | '2023 안산의 책 공모전' 장려상 수상작입니다.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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