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살 최연소 이장,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희진 2023. 12. 23.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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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함평군 오두마을 이장 지낸 한대윤씨 "방황 하다가 꿈을 찾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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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진 기자]

방황. 사전적 정의는 '분명한 방향이나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함'이다. 우리사회에서 '방황을 한다'고 하면 마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방황으로 꿈을 찾았다는 사람이 있다. "방황하는 과정 자체를 삶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사람, 전남 함평군 대각리 오두마을의 최연소 이장을 지낸 한대윤씨다.

95년생, 올해로 29살인 한씨는 쭉 수도권에서만 살았다. 그러다 2018년 9월, 돌연 선배를 따라 함평으로 귀촌했다. 귀촌 1년 후인 2020년 3월부터는 2년간 최연소 이장을 지냈다. 오마이뉴스에서 <한대윤의 근본 없는 이장 일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함평에 살며 새로운 꿈을 찾았다는 한씨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서울에 왔다. 그는 어떻게, 방황하며 꿈을 찾을 수 있었을까.

"여전히 방황 중"이라는 그를 지난 6일 만났다.
 
 흑석동 카페에서 만난 대윤 씨의 모습
ⓒ 이희진
 
학교와의 소송 그 후, 좁은 방황의 한계를 느끼다

중앙대학교 철학과 13학번 한씨는 아직 졸업 전이다. 장기 휴학으로 제적을 당했다. 동아리 대표만 3년을 하는 등 매사에 최선을 다했지만 대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한 게 대표적이다.

"15년도에 자치기구 재선거에 나갔는데 여러 문제가 있었어요. 회칙에 맞지 않게 이행 됐거든요. 그야말로 우당탕 진행되니까 보이콧의 의미로 피켓시위를 했어요. 그러다 징계를 받았죠."

징계에 불복해 학교를 상대로 '근신처분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3년간 이어졌지만 결국 패소했다. 학교 측의 징계 처분이 적정하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길게 이어진 소송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당시 그는 휴학을 결정했고 18년도까지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학칙상 최대 휴학 기간(3년)을 초과해 제적도 당했다.

"나는 여기까지인가 생각했죠. 의지를 상실한 상태였고 저를 믿을 수 없었어요. 그때 힘들어서 병원도 다녔거든요. 오래 휴학해서 제적당할 걸 알았지만 멈춤을 선택했어요."

한씨는 당시를 '좁은 방황'의 시기로 정의한다.

"휴학은 했는데 고민이 들었어요. '서울에서 집을 구할까? 취직할까?' 이런 고민이요. 상태가 안 좋으니까 방황도 막 하는 게 아니라 제한을 두게 되더라고요. 신체적으로 힘들고 돈도, 열정도 없는 상황에서 저도 모르게 조건을 따지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냥 좁은 방황을 한 거죠."

함평에서 넓은 방황을 하다

2018년 6월 말, 식용 굼벵이 농사를 하러 함평에 간다는 선배를 만났다. 긴 방황에도 길이 보이지 않던 그에게 친한 지인이 연결해 준 이였다. 한씨에게 귀촌 제안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 건 농활 덕분이다. 대학에서 무려 20번의 농활을 갔던 그에겐 친환경적인 굼벵이 농사도 매력적으로 들렸다.

"농활 한다고 생각하니까 별로 두렵진 않았어요. 조용하고 연대감이 깊은 농촌 문화가 저한테 잘 맞았거든요. 그래서 선배를 만나고 큰 고민 없이 같이 내려가기로 결심했죠."
 
 대윤 씨가 일했던 굼벵이 사육장 모습
ⓒ 한대윤
 
귀촌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같은 해 9월 1일 내려갔고, 귀촌 초기에는 함평 오두마을에서 굼벵이 농사를 도왔다. 3개월만 지내고 떠나려 했지만 마을에서의 삶은 곧 익숙해졌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예상치 못한 기회도 찾아왔다. 바로 '최연소 이장' 직이다.

"전대 이장님이 32년을 연임하셨어요. 그래서 불만을 갖는 주민들이 많았죠. 그러다 새 후보가 나왔는데 전 이장님이 엄청나게 반대하셨어요. 선거 날에도 이장님 아들 포함해서 못 보던 사람들이 투표하러 오니까 마을 사람들이 (선거 결과에) 다 보이콧을 한 거죠."

그렇게 이장 선거는 파행됐다. 당시 지역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작은 마을을 발칵 뒤집은 사건이었다.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주민들이 적임자로 꼽은 이가 바로 대윤씨다.

"당시에 1년 정도 살았고 다른 연고도 없으니까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잖아요. 주민들이 저를 필요로 했고 귀촌하고 받은 것도 많으니까 봉사의 의미로 한 번 해보자 생각해서 받아들였어요."

귀촌 1년 차에 최연소 이장이라는 직책을 달았지만 처음 맡는 이장 일이 쉽진 않았다.

"휠체어 주차장 짓고 쓰레기장 증축하고, CCTV 달고 벽화 사업도 진행했어요. (기사 연재 한 것도) 마을을 홍보하는 이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함이었어요. 그래도 다같이 박수 치는 상황은 없었죠. 끝까지 반대하는 일부 원주민들의 마음을 돌리진 못했으니까요."
 
 쓰레기장을 짓고 있는 대윤 씨의 모습
ⓒ 한대윤
 
큰 포부로 벌인 사업들이었지만 모두의 동의를 얻진 못했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나는 싫다' 주민들도 많았고 전대 이장님은 스물여섯의 어린 새 이장을 끝까지 인정해 주지 않았다. 22년 3월 이장 임기를 종료할 때까지도 방황은 계속됐지만 그에겐 즐거운 나날이었다. 함평에서 자신의 알을 깨고 도전적인 일들을 벌였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귀촌해서도) 방황한 건 마찬가지죠. 다만 전처럼 제한을 둔 게 아니잖아요. 그냥 '취업해야지' 이런 게 아니라 농사도 지어보고, 이장도 해보면서 계속 실천적으로 방황을 한 거니까요. 이장 일도 마음처럼 되진 않았지만 사회 구성원으로 한 발 들어간 기분이라 좋았어요."

넓은 방황을 통해 '나'를 찾다

한씨는 2년의 이장 임기를 마치고 함평군 손불면으로 갔다. 함평 지역아동센터 청년 학습 선생님 자리에 발탁됐기 때문이다.

"이장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어요. 지역아동센터 센터장님이랑도 연이 닿았는데요. 센터장님이랑 마을 행사 준비하고 같이 교육 참여위원회도 했었거든요. 그때부터 교육 일에 흥미가 생겼는데 이장을 하던 중이라 포기했었어요. 그런데 이장 마치고 센터장님이 같이 일해보자 제의를 하셔서 가게 된 거죠."

그는 지역아동센터에서 초등 국어나 수학, 독서 논술 과목을 가르쳤다. 책읽기 지도 같은 돌봄 활동도 했다. 지역아동센터 특성상 돌봄과 학업 손실을 챙기는 일까지 병행하기 때문이다.

"방황의 폭을 넓혀서 여러 선택지를 두니까 (서울에서 하던) 고민이 풀리더라고요."

그렇게 1년간 아이들과 함께하다 보니 이 일을 사랑하게 됐다. 공교육 이후 가정 외에서 추가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게 좋았다고 했다. 넓은 방황을 하다 보니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보였다. 방황 중 했던 경험과 만난 사람들이 연결되어 꿈을 찾게 해 준 셈이다. 함평 토박이로 살 것만 같았던 그가 다시 서울에 간 이유도 더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다.
 
 센터에서 아이들과 놀고 있는 대윤 씨
ⓒ 한대윤
 
"저를 돌이켜봤을 때, 청년이자 서울 4년제 대학교에 다녔다는 것 말고는 내밀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전문적으로 교육을 배운 적도 없고요. 그래서 (청년 학습 선생님 일을) 이어가는 데 한계를 느꼈어요. 아마추어인 상태였으니까요."

아마추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등교육을 더 받아보기로 결심했다는 한씨. 그렇게 올해 재입학을 했고 서울에서 다시 대학에 다니고 있다. 함평에서의 긴 방황을 통해 꿈을 찾았지만 앞으로의 행보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삶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고요. 학교 빨리 졸업하려고 했는데 아직도 못했잖아요. 장학금 받고 다니자는 다짐도 했는데 장학금은 고사하고 학교랑 소송까지 했고요. 군대는 카투사에 가자, 이런 계획도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도 달성된 게 없죠."

긴 계획을 세울 때도 있었지만 생각한 것과는 늘 다르게 흘러갔다. 그런데도 넓은 방황을 이어갈 수 있는 건 스스로를 믿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르다고 비판받는 경우도 있어요. 그렇지만 나에게 맞는 일은 내가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표준이 다 맞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려면 일단 나를 믿어야 해요. 저는 스스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갈 사람이라고 믿거든요. 그게 방황이 두렵지 않은 이유인 것 같아요."

방황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인생은 골인지점이 있는 경주가 아니라 모험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방황은 실패가 아니라 모험에서의 경험이 되겠죠. 방황도 삶의 일부니까 충분히 배회하고, 방황하고, 떠돌면서 그걸 삶으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이왕 방황해야 한다면 크게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방황을 꺼리지 말고, 열심히 방황해 보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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