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형이자 독립지사로 산 현정건... 12월 30일, 순국 91주기
[정만진 기자]
▲ 경북독립운동기념관 '2023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현정건 포스터 |
ⓒ 경북독립운동기념관 |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2014년 1월 이래 매달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발표해왔다. 첫 인물은 영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항일전쟁을 수행하다가 1914년 대구감옥에서 순국한 류시연 선생이었다.
여섯 번째인 2014년 6월에는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 지사였다. 그 다음달인 2014년 7월에는 광복회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 선생이었고, 8월에는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선생이었다.
2014년 이래 매달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열다섯 번째인 2015년 3월에는 '민족의 어머니' 김락이었다. 시아버지 이만도 선생은 자정 순국으로 제국주의 침탈에 저항했고, 오빠 김대락과 언니 김우락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아들 이동흡은 광복회에 가담해 일제에 맞섰다. 본인은 3·1운동으로 두 눈을 실명했다.
▲ 현진건을 연구하고 현창하는 활동을 해온 현진건학교는 2021년부터 현정건 순국 추념 행사를 12월 30일에 가져왔다. 사진 왼쪽은 2021년 12월 30일 추념 행사 때 사용한, 오른쪽 사진은 2023년 12월 30일 추념 행사 때 사용할 포스터이다. |
ⓒ 현진건학교 |
현정건(玄鼎健)은 1893년 6월 29일 연주현씨 현경운(玄擎運)과 완산이씨 이정효(李貞孝)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동생은 소설가 현진건으로, 형제 모두 대구가 출생지이다. 대구가 정건·진건의 고향이 된 것은 본디 서울에 살았던 아버지 현경운이 1895년 이래 대구에서 거주했기 때문이다.
현경운은 1911년 퇴임할 때까지 대구전보사(大邱電報司) 사장(司長)으로 재임했다. 인터넷 또는 신문기사 등에 현경운이 대구우체국장을 역임했다고 적은 사례들은 잘못이다. 청일전쟁 때 남해로 들어온 일본군이 부산전보사와 창원전보사부터 점령한 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대구전보사는 우체국 성격이 아니라 국가정보기관이었다.
대구는 현정건·진건 형제의 고향
현경운은 국가정보기관 간부이면서도 야학 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현경운을 도와 야학 교사로 일한 사람 중에는 그보다 10세 연하의 이일우가 가장 유명하다. 당시 대구 최상위급 민족자본가이던 이일우는 이상화의 큰아버지로, 1904년 계몽교육공간 우현서루를 세워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다가 1911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 당했다.
현경운과 이일우는 망국 직전 취학기를 맞은 아들과 조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서당에 보내고 우현서루의 교육기관인 시무학당에 다니게 했다. 대구사회의 거물 유지들이었던 현경운과 이일우가 야학과 계몽기관을 설립하고, 직접 교사로 헌신했으며, 자녀와 조카들을 일제 교육에 물들까 우려하여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사로이 보아넘길 일이 아닐 것이다.
17세에 중국 망명, 26세에 의정원 의원
현정건은 17세이던 1910년 중국으로 먕명했다. 독립지사들 중에는 상대적으로 상당히 이른 시기의 망명이었다. 그 결과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당시 이미 9년을 거의 넘겨가고 있을 만큼 장기간 중국에 체류한 선배(?) 망명가로 여겨져 중국통의 명망을 얻었다. 게다가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어에 두루 능통하였다. 26세밖에 안 된 그가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된 데에는 그런 점들이 크게 작용했다.
1918년 현정건은 아우 현진건과 상해에서 약 1년 동안 함께 생활했다. 이때 현진건은 후장(滬江)대학 독일어 전문부에 다녔는데, 아들을 두지 못한 당숙 현보운의 양자로 지목되면서 귀국했다. 그 이후 형제는 (감옥과 재판정 아닌 평상의 공간에서는) 만나지 못했다.
한때 상해에서 함께 살았던 형제, 그후 못 만나
임시의정원 요인으로 활동 중이던 현정건은 사회주의 계열 한인사회당에 친밀감을 느끼고 적극 가담했다. 1921년 초 이동휘가 임시정부 조직 쇄신안이 수용되지 않아 국무총리직 사퇴와 임시정부 탈퇴를 결행할 때 함께 행동했을 만큼 그의 측근이었다.
임시정부의 위상 약화 및 조직개편론을 둘러싼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갈등을 언급하면 기사가 너무 길어진다. 국가보훈처 공훈록 '2012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의 결론 일부를 먼저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현정건은 자발적으로 사회주의 계열 운동조직에 몸담았고, 그 계열의 여러 좌파 조직에도 투신하였지만, 그는 결코 배타적 계급노선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사회주의 운동 노선에만 한정되지 않고 임시정부 개조와 민족유일당 조직 운동 등 통합 운동에도 투신하여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 1933년 1월 1일 현정건 영면 보도 동아일보 기사 |
ⓒ 동아일보 |
1927년 장개석(蔣介石)이 반공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 상당수가 좌파로 분류되어 크게 탄압을 받았다. 중국 경찰, 프랑스조계 경찰, 일본 영사관 경찰이 3자 합동으로 한인 주거지를 기습 수색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마침내 1928년 3월 프랑스조계에서 현정건이 피체되었다.
현정건은 1932년 6월 10일까지 평양감옥 등에서 옥살이와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피체 이후 4년 3개월 만에 만기 출옥했지만 심각한 후유증 탓에 1932년 12월 30일 경성의전 병원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향년 39세에 불과했다.
동아일보는 1933년 1월 1일 "씨는 1928년 봄에 상해령 경찰에게 검거되어 평양형무소에서 3년의 형을 마치고 금년 7월에 출옥"한 이후 "가회동 자택에서 장구한 해외 풍상에 시달린 고난과 령오(감옥) 생활에 피로한 몸을 정양(요양)"했지만 복막염 등으로 "의전(현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치료"한 효험도 없이 "드디어"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남편 사후 스스로 목숨을 거둔 부인
현정건의 발인은 1933년 1월 3일 오후 1시에, 영결식은 서울의 가회동 177번지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묘는 동소문 밖 미아리에 마련되었다(그후 경남 밀양으로 이장).
남편 사후 41일 만인 2월 10일 부인 윤덕경은 "(남편 없이는) 아무래도 살 수가 없다"면서 "죽은 몸이라도 형님(현정건)과 한 자리에서 썩고 싶으니 (남편 옆에) 같이 묻어달라"는 요지의 유서를 시동생 현진건에게 남기고 음독자살하고 말았다.
순국 91주기를 앞둔 현진건학교 최영 시인은 "현진건 소설가도 그렇고 현정건 독립지사 또한 대구 출생이지만 대구에는 현창시설이 없습니다. 자녀도 없이 돌아가신 현정건 선생 부부를 기리는 뜻에서 저희 시민들이 작게나마 3년째 추념식을 가질 계획입니다"라고 말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여긴 밑바닥, 어디 가겠나"... 폐쇄 앞둔 '미아리 텍사스' 가보니
- 양곡창고에 양곡은 없고, 웬 책과 그림만 잔뜩
- 시골에 이거 없는 집을 못 봤다
- 군복-투구도 없이... 거란 40만 대군에 맞선 고려 비밀병기
- 케이크와 어울리는 와인, 굳이 추천한다면
- 배낭 하나로 끝, 이대로 하면 당신도 백패킹 떠날 수 있다
- [단독] 코인왕 '존버킴', 중국 밀항 시도했다가 구속
- 쌍둥이 딸 낳고 싶은 꿈, 이뤄질 수 있을까
- 미, '전면전 위기' 이스라엘-헤즈볼라 중재…국경관리 합의 추진
- [단독] 성추행 신고 7개월 뭉갠 서울대, 가해자 해외 로스쿨 입학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