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와 어울리는 와인, 굳이 추천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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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임승수 기자]
지금으로부터 거의 삼십 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도처에 깔린 커플들의 염장질을 견뎌내기 어려워 도피한 곳은 동네 만화방이었다.
살아온 기간과 솔로였던 기간이 정확히 일치하는 남루하고 후줄근한 남자 대학생에게는 4천 원에 하루 종일 짱박힐 수 있는 만화방이야말로 영혼의 안식처였다. 그곳에서 현실도피적 해피엔딩으로 점철된 고행석 화백의 만화를 야무지게 읽어줄 심산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침 저만치 불알친구 두 녀석이 앉아있는 것 아닌가. 이심전심에 동병상련이구나, 이놈들아!
주인공 구영탄에 감정이입해 한참을 읽어 젖히는데 배꼽시계가 알람을 울렸다. 불알친구 두 녀석과 함께 뜨끈한 떡만둣국이나 먹으려고 나왔는데, 하늘도 우리보고 엿 먹으라는 듯 함박눈을 펑펑 쏟아내는 것 아닌가.
거리에서는 커플들 좋아죽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연이은 염장질이 치사량에 가까워지자 컴컴하고 우중충한 머슴아 세 명은 약속이나 한 듯 세 번째 알파벳과 여덟 번째 숫자가 등장하는 육두문자를 가래침 내뱉듯 뱉어냈다. 오죽 기분이 더러웠으면 지금까지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할까.
연말이니까 케이크
그랬던 내가 지금은 분에 넘치는 처자와 결혼해 토끼 같은 두 딸의 아버지가 됐다. 인생이란 기적과도 같구나. 그 옛날 퀴퀴한 냄새 가득한 만화방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어느덧 여의도 콘래드서울 호텔 로비로 향하고 있다. 예약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찾으러 가기 위해서이다.
▲ 케이크와 리슬링 이렇게 벌여놓으니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옛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
ⓒ 임승수 |
트리 모양의 단단한 초콜릿 몰드 위에는 말차로 추청되는 녹색 분말이 촘촘히 뿌려져 있다. 반짝반짝 금가루는 케이크 꼭대기에서 밑바닥까지 썰매가 지나간 자리처럼 유려한 곡선을 이루며 한 줄로 미끄러지듯 이어진다. 멋스럽게 주름 잡힌 치마 같아 보이기도 하는 이 케이크는, 그 존재만으로도 반경 1미터 공간의 품격을 두 배로 격상시키는 마술을 부린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맛 인식은 다감각적이라고 한다. 뇌가 맛이라는 결과물을 생성하는 데 있어서 미각,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 모든 감각이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다. 미각과 후각이 맛 인식에 크게 관여한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시각에 대해서는 의외로 잘 모른다.
미국 코넬대의 테리 애크리 박사는 미국 화학회 연례 학술 대회에서 화이트 와인 실험 결과를 소개했다. 피험자들은 처음에 화이트 와인을 마시고 열대과일 같은 화이트 와인 특유의 맛을 느꼈다고 답했다. 실험자는 피험자들 모르게 같은 화이트 와인에 붉은색 색소를 타서 재차 맛보게 했다. 그러자 피험자들은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메를로 같은 레드 와인 맛이 난다고 답했다. 동일한 와인임에도 시각 자극의 변화로 인해 뇌가 다른 맛을 생성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이 트리 모양의 케이크는 맛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최고 수준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지 않은가. 특별한 외모의 케이크에 깔맞춤하기 위해서 와인 또한 비주얼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준비한 게 산타클로스 와인 보틀 커버다. 양말 신기듯 와인 병에 씌우면 빨간 모자에 허연 콧수염의 인상 좋은 할아버지가 망충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조세핀 No.1 화이트 잔도 그 빼어난 자태를 뽐내며 등판했다.
달달한 거 옆에 달달한 거
▲ 슐로스 요하니스베르그 그륜락 슈페트레제 리슬링 싱그러운 복숭아, 배, 파인애플 등의 과실 향에 단맛과 신맛의 조화가 상큼하고 우아하기 그지없다. |
ⓒ 임승수 |
나름 신경 써서 저녁상을 차려놓고 반주로 샴페인을 준비한 후 아파트 옆 동에 사시는 어머니께 건너오시라고 연락드렸다.
돌이켜보면 청소년기에는 그저 반항만 했고, 청년기에는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사회과학책 쓰는 작가가 되어 속 썩이고, 장년기가 되어서는 일하랴 두 딸 키우랴 정신없어서 연락도 자주 못 드렸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으로부터 도움만 받았지 제대로 보답해 드린 기억이 없구나. 이제라도 형편 닿는 대로 맛있는 음식과 술을 준비해 자식을 키운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해 드리고 싶다. 특히 연말에는 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
팔순 어머니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파트 경로당에서 나이롱뽕을 하다 오셨다. 어머님 말씀으로는 '1천 원의 행복'이라는데, 게임 자체가 재밌는 데다가 판돈이 1천 원이라 잃더라도 큰 부담이 없고 심지어 요즘에는 따기까지 하신단다. 오늘도 따셨는지 현관문으로 들어오시면서부터 함박웃음이다. 할머니 소리가 듣기 싫어 갓 태어난 손녀한테 '민순씨(어머니 성함)'라고 부르라고 할 정도로 젊게 사시는 분이다.
손녀들 얼굴을 쓰다듬어 주시고는 식탁에 앉으신다. 준비된 음식을 하나하나 내어놓고 샴페인을 잔에 따라드렸다. 관자구이 한 점을 씹어 드시고 샴페인을 들이켜시더니 '내 입에는 이게 딱이야'라며 매우 만족하신다. 지난번 호주 스파클링 와인은 아쉽다고 하셨는데 좀 더 가격이 있는 프랑스 샴페인은 귀신같이 알아채시네. 흐흐.
드디어 음식보다 비싼 케이크가 납시었다. 이게 뭐냐고 신기해하시는 어머니에게 호텔에서 사 온 놈이라고 말씀드리고 산타클로스 역할을 맡은 '슐로스 요하니스베르그 그륜락 슈페트레제 리슬링'도 따라드렸다.
이 와인은 좀 달다고 말씀드렸더니 '단 술은 별론데'라며 걱정하신다. 달달한 케이크에는 단 와인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안심시켜 드렸다. 케이크를 드신 후 와인을 조심스럽게 한 모금 삼키시더니 앞선 샴페인보다 더 맛있다며 깜짝 놀라신다. 어머니, 저는 비싼 와인을 귀신같이 감별해 내는 어머니의 미각에 놀랄 따름입니다.
행복은 어쩌면 지극히 단순
케이크와 리슬링 가격을 물어보셔서 말씀드렸더니 놀라시면서 '나는 너희와 이렇게 함께하는 것 자체가 행복한 거야. 너무 비싼 건 원치 않아'라고 하신다. 하지만 케이크 열심히 드시고 내 잔의 와인까지 본인 잔에 부어서 드시는 걸 보면 음식과 술이 정말 맘에 드신 것 같아 뿌듯하다. 다음에는 더 좋은 것으로 대접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내가 이렇게 와인을 좋아하게 될 줄 몰랐어. 마실수록 기분이 업된다니까. 그래서 행복해져."
목소리 데시벨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취기가 느껴져 그만 드시라고 말씀드렸지만 '내가 마시는 게 그렇게 아깝냐'고 농을 하시며 재차 내 술까지 빼앗아 가신다. 사람들의 통념처럼 인간이 본성적으로 이기적이라면 술을 빼앗긴 나는 기분이 나빠져야 하는데, 왜 흐뭇하기만 할까.
행복심리학 연구자인 연세대학교 서은국 교수는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집필한 <행복의 기원>에서 이렇게 정의한다.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행복이다. 나머지 것들은 주석일 뿐이다.'
삼십 년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염장질이 치사량에 이르지 않았던 것도 그나마 불알친구 둘과 떡만둣국을 먹었기 때문이고, 지금 이 순간 이토록 맛있는 와인을 빼앗기고도 기분이 좋은 이유는 한 해를 마감하는 의미 있는 시간에 소중한 가족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와인 병에 양말처럼 신겨진 산타클로스를 바라보니 그 망충한 표정이 한층 정겨워 보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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