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튀기는' 조국 조롱도 영화가 되나요

김성호 2023. 12. 2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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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615] <매드 하이디>

[김성호 기자]

국가에 대한 풍자, 나아가 모욕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할까.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오랫동안 미덕으로써 강조해온 한국이다. 그 연장선 상에서 국기며 국장에 대한 존중 또한 다른 문화권보다 강하다고 해도 좋을 테다. 해외에선 격한 시위 과정에 국기를 태우거나 하는 일도 심심찮게 마주할 수 있지만, 한국에선 그런 사례를 발견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저 문화만이 아니다. 국기며 국장을 모욕을 목적으로 훼손할 경우 현행법으로 처벌을 받는다.

미국은 연방대법원이 성조기 훼손죄를 처벌하는 걸 위헌으로 판정했으나, 한국 헌법재판소는 국기 모욕을 죄로 다스리는 게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한 바 있다. 한국과 다른 나라 사이에 국가에 대한 마음가짐이 다를 밖에 없는 이유다.
 
▲ 매드 하이디 스틸컷
ⓒ 와이드 릴리즈(주)
 
영화 내내 스위스가 흘러 넘친다

최근 개봉한 스위스 영화 <매드 하이디>는 이 같은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스위스 영화인 요하네스 하트만과 산드로 클로프스가 공동으로 제작하고 연출한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위스를 풍자하고 모욕하는 것이 마치 제 목적인 양 군다. 스위스 자본으로 제작된 영화임에도 배우 전부가 영어를 쓰는 이 독특한 영화에는 시종 스위스를 상징하는 국기와 국장, 온갖 물건들이 우스꽝스럽게 등장하여 스스로가 스위스 정체성을 갖고 있음을 알린다.

아예 영화의 제목부터가 스위스를 대표하는 문학이라 해도 좋을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연상하게 한다. 실제로 영화의 주인공인 하이디(앨리스 루시 분)가 알프스 산자락에서 할아버지 손에 자란 소녀다. 그런 그녀가 제 조국에게 고통받고, 마침내 그에 대한 피의 복수를 하는 것이 이 영화의 기본적인 얼개라 하겠다.

이야기는 스위스 어느 도심 광장에서 시작된다. 수많은 인파가 모여 정부를 상대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요구는 하나,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여 단 하나의 저질 치즈제품만을 유통하는 것을 규탄하는 것이다.
 
▲ 매드 하이디 스틸컷
ⓒ 와이드 릴리즈(주)
 
독재국가 스위스, 산골소녀 하이디를 만나다

그러나 이 같은 요구는 무참하게 짓밟힌다. 군대는 시민을 향해 총구를 돌리고 마침내 발포하여 그날 거리로 나간 이들 중 다수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게 된다. 하이디의 부모 또한 그 자리에 있어서 그녀는 알프스 자락 산골마을에서 할아버지의 손에 자라게 된 것이다.

그날의 비극으로부터 20년이 흐르는 동안 스위스는 무참한 독재국가로 변모하였다. 일곱 명의 대통령에 직접민주주의라 해도 좋을 특별한 분권제도를 가진 스위스의 현실이 무색하게, 영화 속 스위스는 마치 나치 독일을 연상시키는 획일적 국가가 되어버린다. 군복 어깨에 달린 붉은 완장엔 스위스의 하얀 십자가가 박히고, 독재자를 향해 올리는 경례 또한 인간성을 찾을 수 없다.

거의 디스토피아라 해도 좋을 스위스지만 하이디는 평온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녀에겐 울타리가 되어주는 할아버지가 있고, 또 더없이 사랑하는 사내 피터 또한 있는 덕분이다. 피터는 알프스 자락에서 염소를 키우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는데, 그가 남몰래 제조한 치즈를 유통한다는 소문이 은근히 도는 통에 할아버지는 그를 영 마뜩찮게 생각한다. 하이디에겐 할아버지가 피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일 뿐, 제 삶을 벗어나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 매드 하이디 스틸컷
ⓒ 와이드 릴리즈(주)
 
고어와 코미디의 낯선 결합

영화는 한 순간 본색을 드러낸다. 피터가 몰래 유통하던 치즈가 당국에 적발되고, 파견된 경찰이 그를 처형하는 모습을 하이디가 목격하는 것이다. 그러다 하이디마저 정부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되고 이를 막으려던 할아버지까지 목숨을 잃고 만다. 한 순간에 제가 사랑한 모든 것을 빼앗긴 하이디가 독재자를 향해 피의 복수를 벌이는 이야기, 그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고어물의 성격을 띤 코미디다. 성공한 영화 가운데 <킹스맨>이 그렇듯, 시종 진지하지 않은 모양새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가운데 사람이 죽고 다치는 모습을 과장되게 연출한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 나오고 도축된 짐승마냥 사람들의 몸이 잘리는 모습이 취향이 맞지 않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도 한다. 그러나 확고한 팬층을 가진 장르답게 고어물을 좋아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어서, 영화는 장르성을 바탕으로 투자를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 가운데 스위스의 상징물이 무척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하이디'라는 제목을 넘어 극중 경찰의 고문도구로 독특한 모양의 '토블론 초콜릿'이 등장한다거나, 길쭉한 몸통이 특징적인 알펜호른이 나오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스위스답게 손목시계가 나오고, 또 각종 치즈 역시 빠지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용병으로 명성을 떨친 국가답게 특유의 장대무기도 인상 깊게 등장한다. 이쯤이면 전 세계에 내놓을 스위스의 상징이라 해도 좋을 것을 죄다 늘어놓았다고 보아도 될 정도다.
 
▲ 매드 하이디 스틸컷
ⓒ 와이드 릴리즈(주)
 
스위스에 대한 총체적 조롱, 괜찮을까?

문제는 이 같은 상징들이 그리 긍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긍정적이긴 커녕 하나하나가 스위스에 대한 조롱에 가깝다. 명작 소설인 <알프스 소녀 하이디>는 성별과 지역을 제외하곤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탈바꿈했고, 원작의 경건성 대신 기괴함을 무기로 삼았다. 스위스의 민주주의는 독재로 화했고, 자랑스러운 음식은 먹지 못할 끔찍한 무엇이 되어버린다. 시계는 쪼잔함으로, 알펜호른 또한 우스꽝스러운 도구쯤으로 그려지고, 가장 중요하다 해도 좋을 스위스 국기와 국장은 핏빛으로 더럽혀지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영화가 스위스에 애정이 있기는 한 것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지만, 영화는 스위스 사람들이 스위스를 배경으로 스위스의 자본으로 만든 것이 분명하여 당혹스러울 뿐이다. 피 튀기는 고어물과 코미디의 기묘한 결합에 대하여 혹자는 한 편의 잔혹동화와 같다고 썩 나쁘지 않은 평가를 내리기도 한 모양인데, 또 그만큼 많은 이들은 만듦새가 엉성하고 지나치게 잔혹하다며 혹평을 쏟아내기도 했다. 다분히 문제작으로 볼 소지가 많은 작품으로, 그간 수많은 영화를 보았으나 이와 같은 영화가 지향한 지점이 무엇인지 고민하여도 좀처럼 답을 내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주는 강한 인상만큼은 언급해볼만 하다. 제 나라의 온갖 상징물을 한 데 꺼내어 그것을 더럽히고 조롱했다 해도 좋은 영화를 찍어낼 수 있는 그 자유와 다양성에 대한 존중만큼은 평가받아 마땅하다. 만약 같은 영화가 스위스가 아닌 한국이나 또 우리가 친숙한 다른 어느 나라들에서 만들어졌다면, 바다 건너 먼 나라까지 수출되기 이전에 커다란 논란을 맞닥뜨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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