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울어도, 웃어도 봤다…역시 웃는 게 낫더라
“앞으로도 팬들과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아갈 것”
‘고스트’ 장용준이 은퇴한다. 그의 프로게이머 커리어엔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2016년 CJ 엔투스에서 데뷔했지만 그해 여름 팀이 강등됐다. BBQ 올리버스에서 2년간 하위권을 전전하다가 두 번째로 강등의 쓴맛을 봤다. 샌드박스 게이밍이라는 마지막 동아줄을 잡아 LCK에 가까스로 잔류했다. 그때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울어도 봤고 웃어도 봤다. 그래도 웃는 게 낫더라.”
2019년 샌드박스에서 장용준의 프로게이머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마침내 중상위권으로 도약했다. 이듬해, 담원 게이밍에 합류하면서 그는 전성기를 맞았다. 꿈에 그리던 ‘LoL 월드 챔피언십’ 우승을 이뤘다. 승강전과 월즈 우승을 모두 경험한 이색 경력의 소유자로 LoL e스포츠 역사에 남았다. 그는 2년간 담원에서 3번의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 우승을 경험했다.
2022년은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아쉬운 해로 남았다. 농심 레드포스는 1년 동안 하위권을 맴돌았다. 그는 1년간 휴식을 취했고, 2024시즌을 앞두고 프로 무대 복귀를 계획했다. 하지만 몇몇 팀과의 협상 끝에 이쯤에서 자신의 프로게이머 커리어를 마감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12일 경기도 수원에서 그를 만났다. 4년 만에 같은 질문을 받은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또 웃어도, 울어도 봤지만 역시 웃는 게 낫더라고요.”
-은퇴를 결정한 이유는.
“내가 목표로 하는 바까지 도달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월즈에 진출하고 싶었고, 내가 잘할 수 있는 팀에 합류하고 싶었다. 이번 스토브리그엔 주로 해외 팀들과 얘기를 나눴는데, 두 가지 목표를 모두 충족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많은 고민 끝에 은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휴식을 취한 올 한 해 동안 배우거나 느낀 바가 있다면.
“처음 휴식을 결정했을 때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감정이 파도처럼 요동쳤다. 아쉬웠고, 화가 났고, 속상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농심에서 1년 부진했다는 이유로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하자 시장이 나에게만 유독 엄격하단 생각이 들었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나중엔 모든 것에 감사하단 생각이 들더라. CJ와 BBQ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둔 적이 있었다. 이름 없는 선수로 커리어를 마감할 뻔했던 내가 좋은 기회를 잡고, 꿈에 그리던 무대를 밟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감사하고 축복받은 시간이었다. 승부의 세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짜릿함과 팬들의 진심 어린 사랑 등의 경험을 평생 소중히 간직하며 살아가려 한다.”
-프로게이머로 8년을 살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CJ에서는 게임을 배우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단체 생활을 하는 법, 프로로서의 생활 태도 등을 더 많이 배웠다. BBQ에서는 인생이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웃음). 사실 그때 심적으로 힘들어서 기억이 많이 나지 않는다. 샌드박스에선 원거리 딜러로서 해야 할 역할, 팀으로 게임하는 방법을 배웠다.
담원에선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우승해서 기뻤던 것도, MSI 때문에 절망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 절망을 딛고 LCK 서머 시즌을 우승하고, 월즈 결승에 진출했던 것도 떠오른다. 스스로 발전했다고 자신한 채로 농심에 입단했는데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팬들의 응원 덕분에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2022년으로 기억에 남았다.”
-담원에서 처음 우승했을 때 눈물을 흘렸다.
“우승을 막 확정했을 때는 그저 기쁜 마음이었다. 우승 트로피를 눈앞에서 마주하니까 그제야 실감이 났다. 트로피를 들기까지의 과정들…노력하고 고생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드디어 내가 이걸 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울컥했다.
2019년 샌드박스에서 나온 뒤에 다른 LCK 팀 합류를 목표로 삼았다. 당시 ‘쇼메이커’ 허수, ‘캐니언’ 김건부, ‘너구리’ 장하권 등 담원 선수들이 솔로 랭크에서 워낙 잘했다. 내가 가면 정말 잘할 수 있겠다 싶어서 먼저 팀에 연락했다. 담원에서 로스터 변경 없이 차기 시즌을 맞는다고 해서 마음을 접었다.
그런데 스프링 시즌 1라운드 도중 다시 담원에서 연락이 와서 입단 테스트를 봤다. 한 판 만에 입단이 확정됐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잘할 자신도, 팀이 잘할 거란 확신도 있었다. 월즈 우승까진 예상하지 못했지만….”
-2021년 T1과의 월즈 준결승전에서 이긴 뒤에도 눈물을 보였다.
“월즈 결승 진출이 걸린 경기였다. 2·3세트에서 내가 여러 번 실수를 해서 패배할 뻔했다. 어떻게든 정신을 부여잡아서 이길 수 있었는데, 나를 이끌어준 팀원들에게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감정,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졌다는 안도감 등이 한 번에 쏟아져서 눈물이 났다. 경기를 치를 때는 못 느꼈지만 다 끝나고 돌아보니 그때 정말 부담감과 압박감이 컸다.”
-2021년을 유독 힘들어했다.
“아마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때 포탑 골드가 생겼다. 메타 변화가 많았던 시즌이다. 적응에 시간이 오래 걸렸고 어려움도 겪었다. 그런 와중에 MSI에 출전했다. MSI는 책임이 큰 대회더라. 월즈는 3~4개 팀이 나가는 반면 MSI는 1개 팀이 리그 대표로 출전한다.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선수가 느낀다. 리그를 대표하기에 스스로 기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답답했다.
아이슬란드에서 준우승을 한 뒤 한국으로 복귀했다. 바로 서머 시즌이 개막해서 자가 격리 기간에 스크림을 시작했는데 공황장애 증세가 나타났다. 팀에 먼저 쉬고 싶다고 얘기했다. 마침 양대인 전력분석관님이 팀에 와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휴식을 취한 덕에 부담감을 이겨내고 서머 시즌을 우승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커리어에서 가장 아쉬웠던 순간과 영광의 순간을 꼽는다면.
“가장 아쉬웠던 순간은 농심에서 보낸 2022년이다. 2021년에 어려움을 겪은 만큼 성장해서 스스로 완성됐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결과로 보여주지 못한 점이 끝내 아쉽다. 오히려 강등된 BBQ 때는 실력이 부족했으니까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광의 순간은 당연히 월즈 우승이다.”
-2022년을 그 어느 때보다 잘 보낼 자신이 있었나.
“스스로 게임 이해도가 높고, 라인전 구도와 디테일도 챔피언 별로 완벽하게 정립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원래 아웃파이팅형 원거리 딜러들을 잘 다뤘다. 2021년에 카이사 등 인파이터들을 연습하면서 숙련도를 충분히 끌어올렸다고 생각했다. 월즈 결승까지 소화하면서 다른 팀들은 경험할 수 없는 스크림을 했다고도 생각했다. 거기서 쌓은 데이터를 새 팀원들과 공유한다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승강전도, 월즈 우승도 경험해봤다. 하위권과 상위권 팀의 차이점은 무엇이라 보나.
“부진한 팀은 저마다의 문제가 있다. 하지만 공통점도 있다. 실력이 부족해서 계속 경기에서 지면 선수 개인은 자신감을, 팀원끼리는 신뢰를 잃는다. 이 불행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기량을 향상시키고 경기에서 이겨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야 한다. 사실상 모순이다.
반면 성공하는 팀들은 처음부터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끼리 모인다. 승리를 바탕으로 신뢰를 쌓고, 함께 나아갈 방향을 고민한다. 하위권 팀은 더 내려가고, 상위권 팀은 더 올라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좋지 않은 분위기를 승리로 끊는다는 게 말 그대로 모순이다.
“사실 스크림 성적이라도 좋으면 대회에서 져도 ‘우리가 뭔가를 실수했나 보다’ ‘대회에서 긴장해서 약속했던 플레이를 못 했다. 다음에 고치면 된다’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스크림도 실전도 지면 솔로 랭크까지 악영향이 간다. 운이 없어서 솔로 랭크까지 연패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패배로 범벅이 돼버린다. 밴픽이 문제인지, 플레이가 문제인지도 모르겠고…점점 힘들어진다. 프로는 누구나 높은 성적을 갈망하고 그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아야 하는 직업이다. 나는 하위권에 여러 번 있었으니까 이런 경험을 많이 해봤다.”
-담원에서 강팀의 특징이 무엇인지 피부로 느꼈나.
“나는 스크림을 계속한다고 해서 극적으로 팀합이 향상되는 경우가 드물다고 느꼈다. 강팀은 처음 호흡을 맞췄을 때부터 손발이 잘 맞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2019년 샌드박스는 선수단의 인지도가 낮았다. 팀원들끼리도 ‘승강전만 가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시즌 개막 전에 스크림에서 대략 30연승을 했다. 나는 BBQ에서 강등을 경험하고 온 참이어서 괴리감이 들었다. ‘이상한데? 왜 이러지?’ 긴가민가한 상태로 스프링 시즌에 돌입했는데 실전에서도 거의 다 이겼다. 팀원들도 경험이 없어서 우리가 왜 이기는지 명확하게 이유를 몰랐다. 잘 될 팀은 처음부터 잘 된다. ‘합을 맞춘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샌드박스에서 만개했다. 전과 달라진 점은 무엇이었나.
“원거리 딜러로서의 플레이를 배웠다. 나는 그전까지 정글을 더티 파밍하거나 CS를 몰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샌드박스에 가니까 팀원들이 나한테 자원을 몰아주더라. 처음엔 ‘내가 먹어도 되나?’ 생각하면서 먹었다. 그때부터 제대로 원거리 딜러다운 게임을 했다. 팀원들의 믿음이 내겐 큰 힘이 됐다.
BBQ에선 내가 못한 것 때문에 자원을 못 몰아 먹은 것도 있고…앞서 얘기했듯이 안 되는 팀의 부진 이유는 복합적이다. BBQ에선 게임을 하다가 데스를 당하면 시야가 뿌예졌다. 화장실 가는 길에 팬분들을 마주칠까 봐 무서웠다. 나중에 샌드박스에서 이준용 코치님이 ‘처음 테스트를 보러 왔을 때 넌 사람과 눈을 못 마주쳤다’고 하더라. ‘성적이 나오기 시작하니까 상대방의 눈을 쳐다봤다’고. 난 몰랐다.”
-커리어 내내 똑똑한 원거리 딜러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프로게이머라면 누구나 똑똑하게 게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똑똑함은 프로가 당연히 갖춰야 할 덕목 아닐까. 더 들어가면 나는 LoL에 ‘피지컬’은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신체 반응이 유달리 빠르거나 느린 경우가 아니라면. 프로는 플레이를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고 설계해야 한다. 스킬을 맞히고 피하는 것도 두뇌 싸움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나는 게임을 처음부터 잘하는 재능이 남들보다 부족하다는 걸 BBQ 때 알았다. 그 대신 타인의 플레이를 흡수하고, 습득하고, 나만의 것으로 적용하는 능력이 다른 선수들보다 좋다는 것도 알았다. 게임을 처음 접했을 때는 솔로 랭크 점수가 높지 않았지만 다른 선수들의 플레이를 찾아본 뒤론 점수를 금방금방 올렸다.
내 강점을 깨달은 뒤부터는 훌륭한 선수들의 플레이를 찾아보고, 공부하고, 선수·코칭스태프와 토론도 많이 했다. 샌드박스에서는 원거리 딜러의 게임 방식을 배웠다. 게임을 이기는 방법이 보이기 시작했다. 담원에서 뛰어난 팀원들과 양대인 코치님을 만난 뒤로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을 완벽하게 정립하고, 실전에 적용할 수 있게 됐다.”
-슬럼프 때는 정글러로 포지션 변경도 고민했다고.
“BBQ 시절에 정글러로만 솔로 랭크 챌린저를 찍었다. 당시에 워낙 성적이 좋지 않았으니까 정글러나 서포터로의 포지션 변경도 고민은 해봤다. 서포터는 지금도 잘할 자신 있다. 실제로 농심에서 서포터로 출전하기도 했고. 바텀은 둘이 하나로 묶이다 보니 곁에서 보고 배운 것들이 많다.
BBQ 시절 정글러, 서포터 모두 포지션 변경을 고민해봤지만 원거리 딜러로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원거리 딜러로 나를 증명하고 싶었다. 새 포지션으로 팀을 구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결국 내 판단이 맞았던 것 같다. 아닌가? 서포터로 월즈 3회 우승을 하는 세계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웃음).”
-담원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담원이 리그를 지배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담원은 게임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당시 다른 팀들은 턴을 크게 쓰는 게임을 했다. 예를 들면 턴을 용 타이밍마다 쪼갰다. 반면 담원은 점멸이나 궁극기 쿨타임마다 턴을 쪼갰다. 남들보다 턴을 잘게 썼던 셈이다. 그 플레이를 완성하기 위해 정말 많이 연구하고 연습했다. 당시에는 다른 팀들이 우리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지금은 모든 팀이 다 그렇게 플레이한다. 프로게이머들이 워낙 재능이 넘치지 않나. 금방금방 따라오더라.”
-당시 무관중으로 리그가 진행돼 선수들의 콜을 들을 수 있었다. 장 선수가 바루스를 골랐는데, 밴픽 단계에서부터 전령 전투가 시작되면 어느 위치에서 궁극기를 쓸 것인지까지 미리 정해두는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감독·코치가 먼저 가르쳐주면 선수들은 디테일을 갈고 닦았다. 코치진이 밴픽을 마친 뒤 퇴장하기 전에 반드시 ‘이 판은 전령 주고 이렇게 하자’하고 게임의 방향성을 제시해줬다. 사소한 사고가 나도 미리 세워둔 게임의 큰 틀이 무너지지만 않는다면 다 이길 수 있었다. 기자님이 보신 전령 한타 설계도 그 큰 틀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밖에 바텀 먼저 밀고 전령 뛰기, 서포터 미드 로밍으로 6렙 찍기 등도 우리가 연구해낸 산물들이다. 그걸 플레이로 실행한 선수들 외에도 전에 없던 걸 연구해온 코칭스태프의 공로도 조명받아야 한다.”
-특히 양 감독에게 고마운 점이 많은 듯하다.
“양 감독님이 게임의 방향성 못잖게 인생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조언을 많이 해주셨다. ‘주위를 둘러보면 감사할 일이 많다’는 것도 양 감독님의 말이었다. 게임도, 생각도 양 감독님 덕분에 변화가 생겨서 은인 중 한 명으로 생각한다.”
-1대2 버티기에 능했다. 팀도 서포터 로밍 메타의 선구자였다.
“1대2 상황인데 당장 상대는 2대2인지 1대2인지 모르게 하는 게 중요했다. 이젠 얘기해도 될 것 같다. 당시에 다른 팀은 하지 않았던 플레이가 있었다. 강가를 제어와드로 별자리처럼 연결하는 플레이였다. 미드부터 점부시를 거쳐 바텀까지 제어와드로 연결했고 ‘베릴’ (조)건희 형이 그 경로를 빠르게 왔다갔다 했다.
물론 이 플레이의 전제는 바텀 라인전 승리였다. 프로 단계에서 라인전을 지는데 서포터가 로밍을 간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상대방을 포탑 쪽으로 밀어넣어야 이런 플레이가 가능해진다. 나와 건희 형이 많이 연구했지만 코치진의 지분도 적지 않았다. 담원 구성원 모두가 어우러져 만든 플레이였다.”
-세나의 달인으로 남았다. 챔피언 출시 당시부터 궁합이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나.
“사실 처음 세나가 출시됐을 땐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세나와 다양한 챔피언을 조합하는 밴픽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건희 형의 챔피언 풀이 워낙 넓다. 담원은 세나+@의 종류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상대가 까다롭게 여겼다.
나는 일자형 스킬을 잘 맞힌다. 루시안의 ‘꿰뚫는 빛(Q)’이나 바루스의 ‘꿰뚫는 화살(Q)’ 등이 자신 있다. 세나의 ‘꿰뚫는 어둠(Q)’도 그런 스킬 중 하나다. 또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서포터 플레이도 자신 있어서 단식 세나를 하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프로게이머 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을 꼽는다면.
“한 명을 꼽기는 어렵다. 프로게이머 인생의 시작부터 끝까지 응원을 보내주고 힘이 되어준 가족들, 특히 어머니. 너무 고맙고 사랑한다. 지금까지 함께한 팀원과 프런트 구성원들, 코칭스태프에게도 감사하다. 그 외에도 내가 프로게이머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 변치 않고 응원을 보내주신 팬분들께 감사드린다.”
-프로게이머 ‘고스트’의 삶은 여기서 끝나지만 인간 장용준의 삶은 이제 시작이다.
“10년 동안 ‘어떻게 하면 롤을 잘할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연습생 신분이었을 때부터 롤을 더 잘해야 한다는 목표 하나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 더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복잡미묘한 기분이다. 프로게이머 ‘고스트’로만 살다가 다시 인간 장용준으로 돌아간다니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과정 아닐까.
향후 진로를 결정해두지 않았다. 당분간은 여유롭게, 천천히 시간을 갖고서 생각해보려 한다. 나는 롤을, LCK를, e스포츠를 지금도 사랑한다. 앞으로도 팬분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아갈 것으로 예상한다.”
-은퇴를 앞두고, 커리어에서 가장 아쉬웠던 장면을 꼽는다면.
“기간을 뽑으라면 2022년 농심에서의 1년이다. 결정적인 순간 한 가지를 뽑으라면 2021년 월즈 결승전이다. 당시 방관 자야, 콩콩이 자야가 처음으로 유행을 탔다. 루나미 조합 상대로 좋다고 해서 실험도 많이 했다. 그런데 막상 결승전에서는 너무 실험적이다 싶어서 다른 픽을 골랐다. 지금은 콩콩이 자야가 전략 픽으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에는 아니었다.
사실 후회는 없다. 당시 내가 ‘자야를 하지 않는 게 더 승률이 높겠다’고 생각했고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최선의 판단을 했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다만 ‘나를 믿고 조금 더 자신 있게 배팅해볼걸’하는 아쉬움만 조금 남는다.”
-반대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면.
“월즈에서 우승했을 때 가장 행복했다. 우승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제발 어떤 종류든 사고만 나지 않았으면…’하고 기도했다. 어떻게 우승했는데, 지금 죽으면 너무 억울할 거 같더라. 그런데 다른 선수들한테 얘기를 들어보니 다들 같은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웃음).”
-어떤 선수로 팬들의 기억에 남고 싶은지.
“커리어 초장기에는 ‘잘했던 선수’ ‘최고의 원거리 딜러’로 팬들 기억에 남고 싶었다. 지금은 아니다. 팬분들한테 ‘고스트 선수 덕분에 동기부여를 얻었다’ 또는 ‘큰 힘을 받았다’는 메시지를 받을 때 가장 기분이 좋고 뿌듯하다. 팬분들에게 ‘힘이 되어준 선수’로 기억에 남는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을 것이다.”
-끝으로 인터뷰를 통해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예상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은퇴를 결정했다. 복귀를 응원해주신 팬분들이 많으신데 죄송한 마음도, 아쉬운 마음도 든다. 25살이란 나이에는 접하기 어려운 크고 소중한 경험을 많이 했다. 평생 받을 수 없는 정도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니 축복받은 삶이다.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을 평생 곱씹으며 살아가겠다. 저의 긴 프로 생활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하다. 팬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동안 저의 긴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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