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이 말하는 '엄마의 자격'과 '타협할 용기' #여자읽는여자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육아와 일은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엄마가 손발이 되어줘야 했던 핏덩이는 이제 아침마다 책가방을 메고 홀로 씩씩하게 학교로 향한다. 엄마보다 친구와 노는 것을 더 좋아하고, 혼자 방에서 책 읽으며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며칠 전 아이는 도마뱀을 키우고 싶다고 했다. 내가 도마뱀은 무서워서 싫다고 하자 아이는 타이르는 듯 말했다. “그럼 엄마, 도마뱀 카페에 몇 번 가서 적응을 좀 해봐. 엄마도 하기 싫은 것도 할 줄 알아야지.”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나면서 나는 프리랜서로 일을 조금씩 늘려가고 있다. 아이라는 변수가 수시로 치고 들어와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이전과 달리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됐다. 출산 이후 엄두도 못 냈던 취재를 다시 시작했고 전국을 다니며 인터뷰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고유한 서사를 발굴하고 정리하는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노트북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설 때 이제야 아이의 삶과 나의 삶이 나란히 공존하는 기분이 든다. 엄마가 된 지 7년 만에.
아이만 자란 것이 아니다. 일과 육아를 대하는 나의 태도도 달라졌다. 최근 몇 달간 평일 저녁과 주말까지도 일을 해야 하는 큰 프로젝트가 있었다. 휴일도 없이 눈떠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아이와 시간을 충분히 보내지 못하는 것도, 남편의 육아 부담이 과중해지는 것도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내가 엄마로서 자격이 없는 걸까'라거나 ‘나만 일을 포기하면 모두가 편해질 텐데'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황을 완벽히 통제하려는 욕구가 강한 나는 일과 육아가 서로를 침범하는 상황을 유독 견디기 어려워했다. 아이 때문에 일 관련 일정을 급히 바꿔야 할 때는 무책임한 사람이 된 것 같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다 일 때문에 노트북을 펼쳐야 할 때는 나쁜 엄마가 된 것 같았다. 나라는 사람을 둘로 쪼개서 일하는 나, 육아하는 나를 철저히 구분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쪼개는 것도, 일과 육아를 온전히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특히 집중 양육기 아이에게는 예측할 수 없는 일, 어쩔 수 없는 일이 매일 일어났다.
〈돌봄과 작업〉은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번역가 등 여성 양육자들의 글을 통해 아이를 키우는 ‘돌봄’과 내 것을 만드는 ‘작업’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과학기술학 연구자이자 일곱 살 딸을 양육하고 있는 임소연은 아이를 낳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다른 엄마들과 다를 거라 생각했다고 말한다. 아이를 낳고서도 “쿨하고 멋지게" 일과 육아를 하며 살아갈 줄 알았다고. 책에서 임소연이 자신을 “성취감에 미친 여자"라고 소개한 대목을 보고 피식 웃었다. 나도 그런 여자였기 때문이다. 뭐든지 열심히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여자.
임소연은 아이를 낳고서야 한 아이를 키워내기 위해 얼마나 많고 자잘한 돌봄 노동이 필요한지 알게 된다. 수 세기에 걸쳐 수많은 여성들이 해온 이 엄청난 노동이 그동안 얼마나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무시당해왔는지도. ‘나는 다른 여자들과 달라야 한다'라고 생각했던 임소연은 더 많은 여성들이 잘 살아야 나 또한 잘 살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임소연은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로서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여성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임소연이 양육을 통해 얻게 된 중요한 삶의 태도가 있다. 바로 ‘타협만이 살 길'이라는 것.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하기 위해 임소연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을 내려놓는다.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싶어 결혼했지만 부모님에게 아이를 맡겨야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의존하기를 택한다. ‘이러다가 아이와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일주일의 대부분을 아이와 떨어져 지내며 연구를 이어간다. 그러면서도 타협하는 삶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돌봄과 작업〉 중에서
임소연은 여성들에게 말한다. 완벽주의를 버리라고. 오염돼도 괜찮다고. 타협해도 된다고. 나 역시 아이를 낳기 전에는 타협을 곧 패배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은 후에도 일과 육아를 완벽히 병행할 수 있는 치트키를 찾아 헤맸다. 지금은 안다. 치트키가 존재하리라는 환상이 여자들을 더욱 외롭고 지치게 만든다는 것을. 치트키는 없다.
일도 육아도 완전히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구질구질하고 아슬아슬하게 일과 육아를 계속 해나가는 방법밖에 없다. 어떨 때는 아이에게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급한 일을 처리해야 하고, 어떨 때는 결과물이 성에 차지 않더라도 마감을 해야 한다. 때로는 일이, 때로는 육아가 엉망이 되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못 하겠다', ‘도와달라'는 말에 익숙해져야 한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과 싸우면서.
다행스러운 것은 일은 지나가며 아이는 자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엄마인 나도 자라고 있다. 싫은 일도 할 줄 알게 되는 어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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