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나의 영웅" 한 기업가의 위대한 유산
[이준목 기자]
유일한(柳一韓, 1895-1971) 유한양행 초대 회장은 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 사회사업가로 활동하며 국민훈장까지 수 차례 수상한 인물이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격동 근현대사를 거쳐오면서도 애국심과 희생, 공정과 신뢰, 부의 사회 환원등,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도리와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살아왔던 유일한의 인생은 후대에도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12월 21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는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Only one - 요원 A의 비밀'이라는 부제로 유일한 회장의 인생사를 조명했다.
"할아버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슈퍼 히어로'였다. 할아버지가 가족과 떨어져 지낸 적인 많았던 것은, 그 '프로젝트'에 합류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왜 그걸 하셨을까 묻는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목숨은 별로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오히려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기회로 보셨다고 생각한다." 손녀 유일링씨의 회상이다.
그녀가 언급한 할아버지의 비밀스러운 '프로젝트'는 1945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의 산타 카탈리나섬 일대에서는 의문의 외지인들이 날마다 사격 연습을 하고 잠수정을 타고 나가는 등 군사훈련을 진행했다. 그들은 소속을 증명하는 부대 마크나 계급장도 없었고 심지어 서양인이 아닌 전원 검은 머리의 동양인이었다.
이들의 정체는 무려 50년 후 미국 정부의 기밀 문서가 공개되며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섬에 모여있던 대원들은 전원이 '조선인'이었고, 이들은 이름대신 알파벳 암호명으로 불렸다.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미국은 일본에 반격할 계획을 세우면서 사망률이 70% 이상으로 추정되는 위험한 한반도 극비 침투작전에 조선인 공작원들을 투입하는 '냅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대원들은 전원 태평양 전쟁중 강제동원되었던 조선인 포로들과 재미 한인 출신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그 중 반일감정이 높은 인물들로 선발됐다. 이들은 OSS(미국 첩보국)사상 최초의 한인요원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중에는 바로 유일링의 할아버지 유일한도 포함되어 있었다.
▲ SBS <꼬리에 꼬리는 무는 그날 이야기> 한 장면. |
ⓒ SBS |
유일한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던 인물일까. 청일 전쟁 당시 사업가 아버지의 아들로 자란 그는 나라에 보탬이 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9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며 재미 한인으로 정착했다. 25살이 되던 해에는 에디슨이 설립한 글로벌 기업에 최초의 동양인 회계사로 입사하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이후 그는 자신의 사업체를 꾸리기 위하여 퇴사 후 독립하여 다양한 사업을 했다.
유일한은 자신의 회사를 설립한 지 6년 만에 자산이 당시 2백만불(현재 한화 약 250억 원)의 수익을 벌어들일만큼 사업이 번창했다. 성공한 사업가가 된 유일한은 1926년에 약 21년만에 정든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하지만 유일한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의 열악하고 피폐한 삶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다.
당시 20세기 최악의 재앙이라 불리는 '스페인 독감'이 한반도를 덮치며 4달 만에 760만 명이 감염되고 14만 명이 사망했다. 여기에 기생충, 결핵, 피부병, 성병 등 제때 약만 먹으면 고칠 수 있는 병인데도 죽는 사람이 허다했다.
이에 유일한은 "미국의 값싸고 좋은 약을 우리나라로 가져오자"고 결심했다. 잘 나가는 미국 회사를 접고 조선에서 의약품 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것. 동료들은 만류했지만 유일한은 "건강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어린 나이에 조선을 떠났지만, 유일한은 한시도 조국을 잊은 적이 없었다. 유일한은 자신의 모든 지분을 정리하고, 조선에 시급한 의약품을 구입하는데 전부 투자했다. 그렇게 귀국길에 오른 유일한에게 응원을 보낸 한 사람이 독립운동가 서재필이었다.
유일한이 미국에 있는 동안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줬던 서재필은, 떠나는 그를 위하여 버드나무 그림 하나를 선물한다. 유일한의 유씨는 한자로 '버들 유(柳)'자였다. 서재필은 유일한이 조선사람들에게 버드나무 그늘 같은 존재가 되라는 의미를 담은 것. 유일한은 이 그림을 회사의 상징으로 삼고, 종로에 사무실을 개업한다. 이 회사가 바로 지금의 '유한양행'이다.
초기에는 의약품 사업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식 언어와 문화에 익숙해진 유일한은 조국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검은 머리 이방인'취급을 받는 현실에 적응해야 했다. 당시 한반도는 일제강점기 시절로 일본 제약회사들이 국내 의약품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유일한은 포기하지 않았다. 유일한은 직접 차를 몰며 전국을 돌며 먼저 조선 내 외국인을 공략하자는 전략이 통하면서 돌파구를 마련했다. 또한 유일한은 일반 소비자들을 공략하기 위하여 과대광고를 일삼던 일본 의약품과 차별화하여, 광고에 버드나무 그림만 달랑 그려 넣고 제품이 아닌 브랜드를 홍보하는 전략에 나선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기업 이미지를 강조한 광고 덕분에 회사 이미지도 수직상승했다.
유일한은 그 후 자체 공장을 설립하고 다양한 의약 제품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유일한은 당시 일본식 자양강장제에 아편, 모르핀 등의 마약 성분을 넣던 관행을 금지시키고 건강한 자양강장제 '네오톤토닉'을 출시했다. 마약성분 없는 자양강장제라는 입소문이 퍼지며, 해외까지 주문이 빗발치고 시장에는 유사품이 넘쳐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미국에서 온 천재 장사꾼이 마침내 일본 제약사를 누르고, 업계 1인자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당시 유일한의 회사는 한창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아내와 어린 자녀들까지 행복한 가정도 있었다. 그런데 해외수출계약을 위하여 미국을 방문했던 유일한은 돌연 OSS로부터 냅코 프로젝트 합류 제안을 받게 된다. 그동안 이뤄놓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심지어 목숨까지 걸어야하는 임무였지만, 놀랍게도 유일한은 오직 조국을 위해 기꺼이 프로젝트에 참여를 결정했다.
유일한은 '에이전트 A'라는 암호명을 부여받았다. 냅코 프로젝트 참가당시 이미 그의 나이는 무려 50세였다. 또한 자신의 사업체 직원과 시설을 비밀리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해주기도 했다.
모든 대원들은 가족에게도 철저히 사실을 숨기고 참여야 했던 극비 프로젝트였다.그렇게 총 19명의 요원들이 카탈리나섬에 도착해 단 3개월 안에 인간 병기가 되기 위한 훈련을 진행했다. 하지만 문제는 대원들중 20대는 단 3명에 불과했고 대부분이 군사훈련 경험이 없는 민간인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초 실전이 아닌 고문 역할만 맡기로 했던 유일한이 직접 훈련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이미 10대에 네브라스카 군사학교에 입학했고 한인 민병대 맹호군까지 조직했던 군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유일한은 50대의 나이가 무색하게 프로젝트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고 대원들의 리더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하지만 냅코 프로젝트는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1945년 8월, 작전 개시가 임박하면서 유일한과 대원들은 모두 출정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8월 15일 돌연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다. 그렇게 태평양 전쟁은 종결되었고 프로젝트는 폐기되며 대원들이 싸워야 할 대상과 임무도 사라졌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유일한 회장도 귀국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으로 초대 상공부 장관 제의를 거절한 일이 빌미가 되어 미운 털이 박히며 돌연 한국 정부로부터 입국 금지를 당했다. 그로부터 유일한은 무려 7년이 지나서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렵게 귀국한 이후에도 유일한의 고초는 끝나지 않았다. 한국 전쟁과 휴전으로 이북 쪽 회사 재산을 전부 잃어 기업 자산의 80%를 손해 봐야했다. 또한 3.15 부정선거 당시 이승만 정권,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연이어 정치 자금 요구를 거절했다가 여러 차례 탄압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권의 노골적인 보복성 세무조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깨끗하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유일한 회장은 업계 최초로 동탑산업훈장까지 수상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다. 유일한은 항상 "회사의 주인은 개인이 아니다. 그 회사를 키워준 사회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에게 세금은 기업이 마땅히 사회에 돌려줘야 할 돈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백발의 노인이 된 유일한 회장에게 경영권 세습을 제안한 주변인들이 있었다.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는 당연한 관행처럼 여겨지던 일이었다. 또한 그의 아들도 국내 최초 화장지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인재였다.
유일한 회장의 파격 행보
하지만 유일한 회장은 아들이 아닌 당시 전무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며 당시 기업가들과는 또다른 행보의 파격을 보여줬다. 국내 최초로 세습 경영이 아닌 전문 경영인 제도를 도입한 인물이 바로 유일한 회장이다. 또한 그는 최고 경영자 임기도 제한하며 한 번에 3년씩 최대 한 번만 연임 가능하도록 하여 본인이 사망한 후에도 회사가 누군가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세심한 조치를 덧붙였다.
은퇴 후에도 한국에 남아 여생을 보낸 유일한은 자신이 세운 유한 공업 고등학교를 가끔식 몰래 찾아가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유한공고의 학생들은 유일한 회장의 의지에 따라 전액 장학금이 지원으로 돈 걱정 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정작 유일한은 해당 학교의 운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학교를 방문한 것도 딱 한 번뿐이었다고. 대부분 멀리서 학생들 공부하는 것만 지켜보고 돌아갔다. 그럼에도 그는 많은 졸업생들에게 그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유일한은 1971년 3월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내 묘소와 주변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며주길 바란다. 단 유한동산에는 절대 울타리를 치지 말고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해 다오. 어린 학생들의 티 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느끼고 싶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유일한이 남긴 재산은 당시 최소 50억 원, 현재 가치로는 1070억 원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유일한은 손녀에게 대학 졸업까지 필요한 학자금 1만 달러를 제외하고 본인 소유 주식을 전부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했다. 그리고 딸에게는 아내의 노후를 잘 돌보아 달라는 부탁과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라는 말을 남겼다. 손녀의 대학 자금을 제외하고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그럼에도 가족 누구도 유일한의 결정에 놀라거나 반대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살았던 유일한 회장의 발자취는 한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 안에서 '시대를 이겨낸 위대한 사업가'로 이름을 남겼다. 유일한 손녀 일링씨는 '유일한 정신'을 이어갈 연구재단을 설립했다. 그녀의 마지막 고백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할아버지가 여전히 우리 안에 조금씩 살아계신다. 할아버지의 정신이 가족들에게 영감이 되기 때문이다. 확실히 할아버지는 나의 영웅이었다. 지금도 나의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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