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동안 해고자로 살 줄 누가 알았겠어요?"
[문세경 기자]
▲ 2023년 11월, 전태일기념관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한용문 |
ⓒ 문세경 |
"당직 하면 당직수당 5천 원을 받았어요."
한용문(63)은 1986년 강남성모병원 방사선사로 입사해 2020년 10월에 퇴직했다. 2002년에 해고되어 2017년에 복직했다. 해고 기간인 15년을 포함해 34년을 일했다.
그가 입사했을 때는 노동조합이 없었다. 그 당시 근무 상황을 떠올리면서 한용문이 한 말이다. 1986년은 87년 민주화대투쟁이 일어나기 전이다. 회사는 위계질서가 꽉 잡혀 있는 수직적인 분위기였다. 퇴근시간이 되어도 선배들이 퇴근하기 전까지는 절대 먼저 갈 수 없었다. 한용문은 그때의 분위기를 "군대 같다"고 했다.
입사한 지 1년이 안 된 지난 87년 9월, 드디어 병원에도 노동조합이 생겼다. 한용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초대 조사통계부장을 맡는다.
조사통계부장은 다른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그쪽 급여는 얼마인지 물어보고 우리 병원 급여를 알려주고 정보를 얻어오는 일을 했다. 소위 임금 비교다. 임금 비교를 하는 이유는 같은 계열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임금이 얼마인지 알아야 임금 적게 받는 곳에 임금을 올려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직을 하면 5천 원의 수당을 받았어요. 말이 안 되는 일이죠. 간호사들도 마찬가지였어요. 나이트 근무를 해도 제대로 된 수당을 못 받았어요. 다들 그렇게 사니까 당연한 건 줄 알았어요. 노조가 생기자 교섭을 하고 노사 협의를 통해 하나씩 바뀌었어요. 법정 수당을 받게 되었고, 근로기준법 이하로는 근무를 하지 않게 되었어요."
▲ 2013 보건의료노조 부위원장으로 활동할 때 |
ⓒ 한용문 |
"당시에는 병원에 입사 할 때 가톨릭 신자가 많았어요. 신부의 추천서가 있으면 유리했죠. 그런데 막상 입사해서 일하다 보면 '가톨릭이 왜 이정도 밖에 못하지?' 하는 생각이 많았어요. 왜냐하면 일반 회사랑 똑같으니까. 노조에서 일하는 간부도 가톨릭 신자가 많았어요. 교섭을 하면 사측에서는 신부나 수녀가 나왔어요. 그러면 얘기를 잘 못해요. 저는 그런 게 없었어요.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눈치도 안 봤어요. 노동조합 간부들이 저를 견제했어요. 그래서 노조 생긴지 10년 만에 위원장이 되었어요."
▲ 2023년 4월, 이음나눔 첫 수련회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고 있는 한용문. |
ⓒ 문세경 |
신청곡은 옛날 노래가 많았다.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옛날 노래를 부를 때는 나도 따라 불렀다. 사람들은 더욱 흥이 났고, 분위기는 뜨거웠다. 신청곡이 민중가요로 바뀌어도 막힘없이 불렀다. 대학 시절 MT가서 술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불렀던 노래들이다. 철없던 이십 대가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취미는 친구들과 어울려서 신나게 노래 부르는 거예요. 따로 건강관리는 안 해요. 친구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 모교에 가서 축구해요. 그래서 아직 고교를 졸업하지 못했다고 농담삼아 말해요(웃음)."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반성을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나 혼자 상상했던 이미지는 버렸다.
파업, 구속, 그리고 복직
"2002년 5월, 강남성모병원 노조는 임금인상과 단체협약 갱신을 위해 파업을 했어요. 그해 9월 11일은 파업한 지 100일이 조금 넘은 날이었어요. 새벽에 병원 로비에서 농성하고 있는 병원노동자들을 1000여 명의 경찰이 들이닥쳐 연행했어요. 그날이 미국 9.11 테러난 지 1주년 되는 날이었어요. 연행된 조합원들과 함께 서울대교구(명동성당 옆)로 농성장소를 옮겨 2차 투쟁을 했어요.
2002년은 월드컵을 하고 있을 때라서 우리가 파업하고 있다는 기사가 한 줄도 안 나갔어요. 외로운 투쟁을 했어요. 217일 동안의 파업을 마치고 조합원들은 복귀를 했어요. 저는 2003년에 1차 구속이 되었다가 집행유예로 나와서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어요. 갑자기 법정 구속이 되었어요. 2차 구속이었죠. 2002년 파업 중에 해고되었고요.
2017년 1월, 15년 동안의 해고자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복직을 했어요. 복직의 조건으로는 경력과 호봉은 인정해 주고 나머지는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병원 밖에서는 뭘 해도 좋지만 절대 병원 안으로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요. 더 가슴 아픈 것은 (사실상) 노조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말고, 직원들 꼬시지 말라는 조건이었요. 제가 고분고분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죠(웃음). 저는 해고자가 되었어도 노조 활동은 멈추지 않았어요. 어차피 해고자니까 더 자유롭게 노조 활동을 할 수 있었어요."
▲ 2010 민주노총 통일선봉대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
ⓒ 한용문 |
"우리나라의 분단 문제는 모든 사회 문제의 실마리가 돼요. 여차하면 '빨갱이'라면서 국가보안법 적용하고. 분단문제를 해결해야 다른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통일 위원회는 각 산별 노조와 지역본부에도 있어요.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이 앞장서서 분단 문제를 극복할 것이냐 하는 문제의식으로 만든 거죠. 개인적으로는 아버지 어머니가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이에요. 북한에 있는 친척들을 한 번도 못 봤어요. 그분들에 대한 그리움도 마음속에 있고, 통일 운동과 사회 사업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통일 위원회를 주로 맡았어요. 2011년부터는 민주노총의 간부 출신들과 이주노동희망센터를 만들어서 활동했어요."
2002년에 해고되어 2017년에 복직해 15년 동안 해고 노동자로 산 한용문. 말이 15년이지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5년이 더 흐른 세월이다. 그 긴 해고생활을 한용문은 어떻게 견뎠을까.
"해고자로 15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견디기 힘들었을거에요. 세상 일이 다 그렇듯이 살다보니 15년이 흘렀어요. 무슨 힘으로 버텼냐고요? 살다가 힘들면 뒤를 돌아봐요. 지나온 길 속에서 아쉬움도 있고, 보람도 느끼고. 특히 변화된 조직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아주 작은 힘이라도 보탰으니 또 힘내서 살아보자'고 다짐했어요.
해고자의 애환이라면 당연하게도 경제적 문제죠. 조직에서 나만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도 받아요. 가족 내에서의 문제도 심각하죠. 해고를 경험한 분들은 대부분 심각한 스트레스로 인해 많이 아파요. 몸과 마음이 엄청나게 힘든거죠. 예민해지고 쉽게 좌절하고 인간관계를 피하게 돼요.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말은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에요."
해고자의 생활을 당사자에게 직접 듣고도 100% 공감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겪어보지 않은 삶이니까. 겪어본 삶과 겪어보지 않은 삶의 간격은 크다. 청력이 좋은 사람들은 청력이 좋지 않은 사람의 애환을 잘 모르듯이 말이다.
"예전의 나하고 지금의 나는 달라졌어요"
2017년 1월, 반갑지 않은 조건이지만 복직을 했다. 그리고 약 1년 후인 2018년 12월 말, 건강검진에서 이상징후를 발견한다. 식도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아직까지 재발은 없었어요. 내년 1월 8일이면 암이 발견된 지 5년째예요. 완치된 거라고 볼 수 있죠. 제가 방사선사였잖아요. 암을 좀 알아요. 그냥 사진만 찍는 게 아니라, 특수한 기구로 암환자를 낫게 하는 집중치료를 했어요. 건강관리는 따로 안 했어요. 친구들이랑 매주 축구를 한 게 다예요."
해고자로 15년 산 것도 모자라 암 진단을 받고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은 한용문. 요리조리 뜯어봐도 시련을 겪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담담하게 뚜벅뚜벅 인생 2 막을 걸어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2023년 12월 21일 전태일재단교육센터 주최로 노동인권활동가양성교육 프로그램 중, 마석모란공원을 방문해 열사 해설을 하고 있는 한용문. |
ⓒ 문세경 |
"다들 열심히 활동하고 계셔서 고맙게 생각해요. 아직은 초기라서 내가 무엇을 맡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이음나눔유니온의 활동 영역이 넓어질 거에요. 그때는 나도 할 일이 있겠죠.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게으름을 좀 피웠던 것 같아요.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었어요. 읽으면서 반성했죠. 자기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세상을 바꾸려고 한 사람도 있는데 나는 겨우 이정도로 힘들어하나, 하면서요.
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예전의 나하고 지금의 내가 다르다는 걸 느낄 거예요. 예전에 저는 되게 친화력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술 한 잔 마시면 형, 아우 하면서 관계 설정을 했어요. 지금은 안 해요. 왜냐면, 우리나라는 (연)줄을 많이 만들어요. '어느 학교 나왔어? 군대는 언제 어디로 갔다 왔어? 고향은 어디야?' 그러면서 서열을 정리하죠. 위, 아래 따지고. 좋아보이지 않더라고요.
이주노동희망센터를 운영하고 이주노동자를 만나면서 다른 나라는 우리나라처럼 호구조사 안 한다는 걸 알았어요. 지내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은 꼭 취조하듯이 물어보거든요. 그게 큰 실례라는 것을 알았어요. 문화적 차이인데, 한국의 문화가 꼭 옳은 건 아니라는 거죠. 이제는 실수하기 싫어서 가급적이면 이름만 물어보고 다른 건 안 물어봐요. 나이가 어린 친구들한테도 반드시 존댓말을 써요. 요즘엔 사람들이 저를 보면 살짝 결이 달라졌다고 해요."
벼는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다. 무르익을수록, 경험이 많을수록 겸손해진다는 말일게다. 실제로 그렇게 살기란 쉽지 않다. 나이 먹었다고, 아는 거 많다고, 경험 많다고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을 많이 봤다. 한용문 선배는 속된 말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가을에 이음나눔 수련회 갔을 때도 느꼈지만 나이 먹을수록 표현하는 게 서툴러지는 것 같아요. 젊을 때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면서 확실하게 표현했는데 이제는 그게 잘 안 돼요. 좋으면 그냥 웃고 말아요. 이음나눔유니온에서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비슷한 점도 많고, 동질감이 있어요. 서로 만나면 기운을 북돋아주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면서 더 많이 표현하는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어요.
아, 참.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2015년에 민주노총에서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 하러 이북에 갔을 때예요. 남과 북이 축구를 하면 평양시민은 반으로 나뉘어 응원을 해요. 우리 팀이 지고 있었어요. 그랬더니 평양시민이 다 우리 팀을 응원했어요. 정말 감동이었어요. 평생 잊지 못하죠."
나는 몰랐다. 남쪽 노동자와 북쪽 노동자가 만나서 축구를 할 때도 있었다는 것을. 그 일이 10년도 안 된 일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얼어붙은 남북 관계가 풀리고 한용문의 꿈인 '통일'이 오면 이음나눔유니온의 조합원이 더 많아지겠지. 나는 조합원 인터뷰 하느라 정신없을 테고.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에도 싣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서울 빼고 거의 다 죽였다...이게 '인종청소'랑 뭐가 다른가
- '투기 판도라 상자' 건드리는 윤 대통령, 치명적 문제들
- 내 보호자는 할머니, 할아버지입니다
- 산타는 원래 맥주 소속이었다... 크리스마스 빛낼 맥주들
- [사진으로 보는 일주일] 한동훈이 '윤석열 아바타' 오명 벗는 방법
- 일본의 '믿는 구석' 됐나... 윤 정부의 '반국민적 태도'
- 김기현 전 대표 울산 남구을서 '광폭 행보'... 출마 굳혔나?
- "궤변, 파렴치" 이태원 특별법 거부 국힘에 쏟아진 비판
- 서울 유명학교, 교사채용 '점수 바꿔치기' 의혹... 교육청 감사
- 신도 성폭행 혐의 JMS 정명석, 징역 23년 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