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만의 사자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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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경 기자]
딸이 '엄마노트'를 선물했다는 B의 말에 내용이 궁금해서 물었다. 노트에는 엄마의 소개로 시작해서 엄마가 가장 친한 친구, 좋아하는 노래, 취미 등 엄마를 알아가는 수십 개의 질문지가 담겨 있었다. B가 노트에 담긴 질문을 읽으며 답을 써내려 가는데 답을 못 쓴 질문이 많더란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질문에 답을 채워가야겠다고 했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고 한다.
23년의 마지막 달이다. 시작과 끝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나지만 올해는 여러 가지로 새로운 일들이 있었다. 나는 매년 나만의 한자성어를 정하는데 지난해에는 진성무염이었다. 올해의 한자성어는 교학상장.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한다는 뜻이다. 올해의 타임라인으로 교학상장의 의미를 새기며 나만의 노트를 써본다.
올 봄, 나는 무릎관절 때문에 수중 걷기를 시작했다. 노인들과 같이 수중 걷기를 하면서 노년의 삶을 배웠다. 그리고 물속에서의 걷기는 지상과 다름을 알았다. 수중 걷기를 할 때 잘못된 방법인 건지 무릎이 더 아파 매일 병원으로 향했다. 어떤 날은 하루 세 곳을 투어 하기도 했다. 치료를 위해 시작한 수중 걷기는 어쩐지 내겐 힘들기만 했다. 수중 걷기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지인들은 정말 효과가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이 운동 한 달해서 효과 봤다' 이런 글들을 믿지 못하니 내게 솔직한 후기를 부탁했을 터다. 결론 부터말하자면 내겐 효과가 없었다. 수중 걷기를 하는 넉 달 동안 정말 거짓말 안 하고 매일 물리치료실로 향했다. 새로운 통증이 생겨 수중 걷기를 하기 이전보다 더 자주 물리치료실을 가야 했다. 의사 선생님께 물리치료사님께 여쭤도 답은 없었다. 수중 걷기하고 물리치료실로 향하는 루틴이 반복되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싶던 차에 시골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선 수중 걷기를 할 수 없으니 자연스레 그만두게 되었다. 그 후론 물리치료실을 간 적이 없다. 아무리 좋은 운동도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독이 되듯 각자 맞는 운동이 따로 있으니 '몸에 맞는 운동을 해라'는 교훈을 새겨본다.
여름은 시골에서 보냈다. 시골에서의 여름은 낭만보다 현실이었다. 모기에 뜯기고 벌에 쏘여 온몸에 피부 발진이 생겼지만 근처 병원이 없어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벌레 뜯긴 양팔 전체에 난 알러지성 두드러기는 빨갛게 부어올라 훈장이 되었다. 가려움도 있었지만 다행히 견딜 만했다.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레 사라졌다. 도시에서라면 금방 병원에 달려갔을 테지만 환경이 주는 시골에서의 처방은 자연 치유였다. 시골에서의 삶은 무더웠지만 마음만은 쾌적한 맑음이었다. 서두르지 않는 자연의 질서는 지혜롭기까지 하니 배울 것이 많다.
유난히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이었다. 모두들 단풍놀이에 들떠 산으로 향할 때 시골의 삶은 단풍놀이가 아닌 송이 채취였다. 허투루 노는 삶이 없는 시골의 생존 놀이법이다. 문화 혜택을 벗 삼는 도시와는 다른 시골의 문화는 자연이 주는 위대함이다.
산허리를 감싸 안은 아침 운무를 볼 때면 누구라도 시인이 된다. 육백마지기 가는 길을 묻는 관광객과 거리에 서서 "저기요" 하고 손을 가리킬 때면 뿌듯하다. 하늘과 맞닿은 곳에 바로 보이는 육백마지기의 아름다운 능선은 캠핑장으로부터 온 마을이 지켜낸 자연의 걸작이다. 올해의 진통을 이겨내고 내년엔 더 좋은 모습으로 선 보인다 하니 빨리 가보고 싶다.
준비가 많아지는 겨울에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생각도 해본 적 없는 공부방이지만 내게 주어진 기회였다. 오십 살이 넘으면 가슴 뛰고 설레는 일이 별로 없는데 공부방이 된 작은방을 보면 두근두근 거린다. 책상에 앉아 초등학교 수학 문제를 풀기 위해 공부한다. 가르치기 위해 또 배운다. 시시해 보이는 사칙연산 셈속에 어쩌면 삶의 모든 방식이 함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내 나이가 오십이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나이테에는 계절이 주는 가르침과 배움이 있다. 그리고 성장이 있다. 겨울에 휴식. 가을의 수확. 여름의 성장. 봄의 씨앗.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씨앗을 뿌려야 열매를 얻는 것은 진리다. 다가오는 새해 각자 나만의 씨앗을 준비해 2024년이라는 빈 노트를 꽉 채우길 바란다. 나는 '오늘도 맑음'이라는 씨앗으로 성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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