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가 많이 의지했다고 밝힌 인물

여경수 2023. 12. 2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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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후 석오 이동녕 기념관과 생가를 다녀왔다.

이동녕 기념관은 경부고속도로의 목천 나들목에서 나오면, 독립기념관에서 차로 5분 남짓 거리에 있다.

 이동녕 기념관에는 이동녕의 생애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소개하고 있다.

지난 1980년대 후반 지금의 독립기념관 위치를 선정할 당시에는 여러 가지가 고려되었겠지만, 지금의 의미로 살펴보면, 석오 이동녕의 생가가 가까운 곳에 독립기념관이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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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에 있는 석오 이동녕 기념관과 생가에 가다

[여경수 기자]

20일 오후 석오 이동녕 기념관과 생가를 다녀왔다. 이동녕 기념관은 경부고속도로의 목천 나들목에서 나오면, 독립기념관에서 차로 5분 남짓 거리에 있다. 이동녕은 유학자로 성장하여 과거에도 급제 하지만, 그는 공화주의자로 전향한다. 특히 백범 김구는 백범일지에 자신이 평소 이동녕을 많이 의지했다고 밝혔다. 백범이 존경할 만한 인물이니, 이동녕의 생애를 달리 평가할 의미는 없어 보인다.
 
 이동녕 기념관에 있는 <석류천석> 휘호석
ⓒ 여경수
 
이동녕 기념관에는 이동녕의 생애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소개하고 있다. 기념관에서 설명하고 있는 그의 생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1869년에 천안에서 출생한다. 그는 을사늑약 체결에 반발하여 옥고를 치른 이후,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해 최초의 항일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한다. 귀국한 이후에는 신민회의 조직에 참여한다. 경술국치 후 다시 서건도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경학사와 신흥무관 학교를 설립한다.

그는 3.1운동 후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선임되어, 임시헌장의 제정에 근거한 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다. 그는 평생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헌신한다. 그러던 중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쓰촨성의 치장에 있던 중 서거한다.
 
 석오 이동녕 장례식
ⓒ 이동녕기념관
 
이동녕은 독립운동 진영의 대동단결과 이념을 떠나 광복운동에 힘을 합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우리나라가 독립한 이후 그의 유해는 봉환되어, 그는 효창원에 안장되어 있다. 이동녕 기념관 앞에는 산류천석을 한자로 쓴 휘호석이 있다. 산류천석(山溜穿石)의 뜻은 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이다. 그의 굳은 의지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동녕 생가
ⓒ 여경수
이동녕 생가 옆에는 이동녕의 좌상이 있다. 오랜 망명생활에서 그는 분명 그의 고향집 마당 이처럼 편히 않아, 그의 오랜 동지들을 만나고 싶었을 테다. 지난 1980년대 후반 지금의 독립기념관 위치를 선정할 당시에는 여러 가지가 고려되었겠지만, 지금의 의미로 살펴보면, 석오 이동녕의 생가가 가까운 곳에 독립기념관이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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