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후반인 내가 '20대의 나'를 만날 때

권태현 2023. 12. 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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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자퇴 후 알바만 십여 개... 그 경험은 자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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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현 기자]

어릴 때부터 장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대학교를 자퇴하면서 그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여러 일을 하다 보면 길이 보일 거라 생각해 업종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20대 때 해 본 아르바이트만 해도 고깃집, 호프집, 전단지 배포, 인형탈 쓰고 홍보, 소주 제조 공장, 피자 배달, 가방 판매, 구두 판매, 착즙기 조립, 주차관리, 세차장, 컴퓨터 부품 검사, 호텔 연회식 등 10여 개 이상이다. 그간의 알바 경험이 내게는 자산이 되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음으로써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살, 고깃집에서의 첫 아르바이트

나의 첫 알바는 고깃집 서빙이었다. 골목에 있는 작은 식당이었다. 먼저 일하고 있는 동갑내기 알바생 A가 있었다. 그 친구에게 일을 배웠다. 크게 힘든 건 없었다. 양잿물의 역한 냄새를 참아가며 불판을 닦는 일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손님이 늘어나면서 알바생을 1명 더 뽑았다. 새 알바생 B도 우리와 동갑이었다. 우리 셋은 서로 도와 가며 재밌게 일했다. 일이 한산할 땐 잡담을 하기도 하고 가끔은 사장 몰래 음료수를 꺼내 마시며 키득키득거리기도 했다. 

사장은 그런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우리 중 특히 B를 싫어했다. 하루는 B가 일을 그릇쳤는지 사장이 엄청 혼을 냈다. 사장은 이때다 싶었는지 그 자리에서 B를 잘랐다. B와는 그렇게 헤어졌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 타자는 나였다.

50대 중후반의 손님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파재래기를 더 달라고 해서 파재래기가 담긴 그릇을 들고 테이블로 갔다. 집게로 집어서 담아줘야 하는데 그릇에 양이 얼마 없어 그릇 채로 손님 앞접시에 부어줬다. 내 행동을 보던 아저씨는 술에 취했는지 눈을 꿈뻑꿈뻑 하며 나를 올려 봤다. 그러곤 갑자기 고함을 쳤다.

"이걸 지금 내보고 쳐 먹으란 말이가? 어!?"

억울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났다. 사장이 와서 상황을 정리했다. 나는 눈물 범벅이 된 채로 테이블을 정리했다. 

다음날이었다. 사장이 어제 있었던 일을 꺼냈다. 파재래기를 그렇게 부어주는 건 쳐 먹으라는 말이랑 다름 없는 행동이라면서 이제 출근하지 말라고 했다. 일한 지 3달 만에 첫 일자리를 그렇게 잘렸다.

피자 배달

특히 재밌었던 일은 배달 알바였다. 어렸을 때부터 타보고 싶었던 오토바이를 마음껏 탈 수 있어 좋았다. 재밌긴 했지만 오토바이 특성상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6개월 정도 일하면서 두 번의 사고가 있었는데 어이없게도 그 두 번이 하루에 다 일어났다. 

비 오는 날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중 맨홀 뚜껑 위에서 미끄러져 그대로 넘어졌다. 다리를 절뚝이며 일어나 오토바이를 갓길에 세웠다. 정신을 차린 후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오토바이도 내 몸뚱아리도 아닌 피자였다. 상자를 열어 상태를 확인했다. 완전히 고꾸라져 있었다. 이걸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배달하기로 했다. 반갑게 맞이하는 손님에게 말했다.

"제가 금방 오토바이 타고 오다가 넘어져서 피자가 엉망이 됐는데요. 보시고 상태가 너무 안 좋다 하시면 새걸로 갖다 드릴게요."  

손님은 피자는 쳐다도 보지 않고 내 몸 상태부터 살피며 말했다.

"아니에요. 피자는 괜찮아요. 많이 다치신 거 아니에요? 무릎에 피나는데..."

괜찮다는 손님에게 그래도 피자를 확인해 보라며 굳이 상자를 열어 확인시켜줬다. 손님은 피자를 대충 보고는 정말 괜찮다고 했다. 피자를 새로 갖다 달라고 하면 가게 들어가서 혼날까 봐 걱정했는데 괜찮다고 해서 고마웠다. 손님은 밴드라고 붙이고 가라며 휴지와 밴드를 건넸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가게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또 넘어졌다. 앞에서 달리던 차가 급정거를 했고 나도 급브레이크를 밟다가 미끄러지고 만 것이다. 연이어 두 번이나 넘어지니 온몸이 더 쑤시고 아팠다. 그래도 앞차와의 충돌은 피해서 다행이었다. 내 몸도 몸이지만 오토바이 여기저기가 많이 깨져 있었다. 사장에게 한 소리 들어야 했다. 
 
 피자배달 아르바이트
ⓒ 픽사베이 Vanh_Photography
 
피자 배달할 때 겪었던,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하나 있다. 늦은 밤 마지막 배달을 갔을 때였다. 한 성인오락실이었다. 자욱한 담배연기를 헤치고 안쪽 카운터로 갔다. 사장 아들로 보이는 사람에게 피자를 주고 결제를 했다.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피자 이거 와 이래 작노?" 하고 말했다. 못 들은 척하고 오락실을 나왔다. 

시동 걸고 출발하려는데 사장 아들이 뒤따라 나와서는 담배를 끼우고 있는 손가락을 까딱까딱거리며 자기한테 오라는 시늉을 했다. 다가갔더니 다짜고짜 나한테 상욕을 했다.

"아, 씨x  피자가 작으면 작다고 미리 말해야지. 누구 쳐묵으라고 이래 x만한 걸 보냈습니까? 예?!"

너무 놀랐다. 당황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뭐라 반격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세히 보니 아버지가 조폭이라는 소문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얼굴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나보다 한 살 동생이었지만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큰일날 것 같아 아무 말도 못했다. 한참을 욕하더니 "배달 다 했으면 빨리 가야지, 안 가고 뭐합니까?!" 하며 나를 조롱했다. 

너무 분하고 서러운 마음에 가슴이 울렁울렁거렸다. 집에 들어가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형도 아니고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말대꾸 한번 못하고 욕 먹은 내 자신이 초라했다.

불 꺼진 방에서 혼자 엉엉 울었다. 지금이야 길 가다가 누가 꼬나보든 욕을 하든 크게 개의치 않겠지만 그때는 아직 중2병 때가 다 빠지지 않은 23살 언저리의 나였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 일에 왜 그렇게 혼자 분개하며 눈물 쏟았나 싶다. 철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호텔 연회식 알바

내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은 일도 있다. 호텔 연회식장에서 알바할 때의 일이다. 테이블을 치우는 일을 했다. 하객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면 테이블을 닦고 쓰레기, 수저, 음식물, 접시 등은 주방으로 가지고 들어가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음식물은 음식물 쓰레기통에, 수저와 접시는 한쪽에 쌓아뒀다. 

처음엔 순조롭게 진행되더니 하객들이 많아지면서 치워야 할 자리도 늘어났고 나중에는 열댓 명의 알바생 전원이 주방 앞에 줄지어 서있는 형국이 되었다. '빨리 정리하고 나오면 되지, 왜 이렇게 오래 걸린담?' 하고 생각하던 나는 주방에 들어가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치운 접시 위에는 음식물뿐만 아니라 휴지, 물티슈, 포장지 등도 같이 있었는데 음식물 사이에 뒤섞여 있는 쓰레기를 젓가락으로 골라내서 버리다 보니 시간이 지체됐던 것이다. 이러다간 주방 정리도 안 되고 테이블도 엉망이 된 채로 방치될 것 같았다.

주방 안에서 나는 두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곤 다른 알바생들이 들고 들어온 접시를 받아 들어 손으로 음식물 속 쓰레기를 집어내 버린 다음 맨손으로 음식물을 버리기 시작했다. 접시에 들러붙은 음식물도 손으로 싹싹 긁어냈다.

줄 서 있던 알바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하나같이 '저거 완전 미친놈 아냐?'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랑곳하지 않고 재빠르게 정리했다. 막힌 고속도로가 뚫린 듯 주방 안 알바생들의 대열도 금세 뚫렸다. 속이 시원했다.

결과적으로 돈을 더 받은 것도 아니고 칭찬 한 마디 들은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다. 일에 사명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다른 여러 일터에서도 그랬고 지금의 직장에서도 그럴 때가 있다. 주인의식, 사장마인드 같은 거라고나 할까? 포장해서 말하면 그렇다. 누군가에겐 오지랖일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한 자세라 생각한다. 누군가 그랬다. 언젠가 할일이면 지금 하고 누군가 할일이면 내가 하라고 말이다. 

어느덧 30대 중반의 문턱을 넘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가끔씩 20대 때의 내가 떠오른다. 그땐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일을 시도해볼 수 있었는지 스스로가 신기하다. 밖에서 종종 과거의 나를 만나곤 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는 사람을 봐도, 식당에서 서빙하는 사람을 봐도, 추운 날 공사장에서 무거운 자재를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을 볼 때도 어린 20대의 내가 떠오른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그래,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고생한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 최초로 송고하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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