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는 교과서도 읽을 수 없다, 심각한 교실
[이정희 기자]
20살 대학생 주희씨 방에는 책이 쌓여있다. 표지가 예뻐서, 제목이 그럴듯해서 사놓았던 책들이다. 하지만 정작 책은 들춰본 흔적도 없이 먼지가 쌓여간다. '왜 사기만 하고 안 읽어?'라고 스스로 힐난해보기도 하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는 게 어렵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1년 국민 독서실태'에 따르면 성인들 중 52.5%가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현실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집집마다 전집 몇 질씩이 보통이었건만, SNS 핑계만 대기에는 너무도 '격세지감'(긴 세월이 흘러 다른 세상으로 바뀐 느낌)이다. 오죽하면 '책맹인류'라고 말할까.
▲ EBS <다큐프라임> '책맹인류' 5부, 문해력 교과서 편의 한 장면 |
ⓒ EBS |
교과서조차 못읽는 아이들
예전에 책이 귀하던 시절, 교과서 한 권만 제대로 읽어도 공부 잘할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어린 시절 학기가 지나고 나서 교과서를 중고로 팔았다고 회초리를 맞은 적이 있었다. 어른들은 소중한 교과서를 팔아먹었다며 혼냈다. 그런데 오늘날 현실은 어떨까?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교과서는 뒷전이다. 3일 동안 교과서가 어디 있는지 못찾은 적도 있단다. 그래도 집에 가지고 오는 건 그나마 낫다고 해야 할까.
요즘 초등학생 방을 보면 참고서는 즐비하게 채워져 있는데, 교과서가 없다. 교과서가 어디 있냐 했더니,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니 학교에 있단다. 수업 시간에 잠깐 배우고, 사물함에 고이 잠재우는 교과서. 교과서를 뒤적이며 숙제를 하던 건 옛말이다. 교과서가 어쩌다 이런 대우를 받게 되었을까.
▲ EBS <다큐프라임> '책맹인류' 5부, 문해력 교과서 편의 한 장면 |
ⓒ EBS |
경기도 하남시의 남한 고등학교 역사 수업,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 하는 시간이다. 교과서에 나온 단어를 아는지 선생님과 함께 체크해 보았다. "'사발통문', 네 개의 발인가요? 보가 뭐죠? 지주? 힌트를 주세요." 수탈이란 단어에 학생들은 '남자 닭'이냐고 묻는다. 역사 수업이 마치 넌센스 퀴즈 맞추기처럼 돼버렸다. 선생님은 단어를 설명하느라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
초등학교 사정은 어떨까? 전라남도 곡성군의 중앙 초등학교 4학년 사회 시간, 선생님은 글을 못 읽는 아이들이 있을 지도 몰라 교과서를 함께 소리내어 읽는다. 그런데 여기서도 아이들이 교과서에 나온 단어의 절반 정도를 모른다. '몸살', '미화원', '타협', '과정' 등. 이러니 사회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다. 주목할 만한 건 곡성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게는 도시 생활을 전제로 쓰인 사회 교과서의 '육교'란 말도 낯설었다. 아이들은 태어나 육교를 본 적이 없다.
이런 교과서에 대해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교과서가 이해가 안 된다는 아이들은 한 문장도 스스로 읽어낼 수 없는 자신에 대해 자조적으로 '앞날이 걱정된다'고 말한다. 솔직하게 어려우니 더 보기 싫다고도 한다. 심지어 '어른들이 골탕먹이려고 만든 거 아니냐'고 되묻는다. 말이 교과서지 자신들 것이 아니라고 한다.
4학년 학생들 문해력을 테스트해 보았다. 초등 4학년 교과서의 문해력 수준은 870, 중학교 2학년 평균 문해력 수준이다. 그렇다면 870 수준의 교과서를 배워야 하는 아이들의 문해력은 어떨까? 509점이었다. 교과서보다 366점이 낮은 점수였다.
▲ EBS <다큐프라임> '책맹인류' 5부, 문해력 교과서 편의 한 장면 |
ⓒ EBS |
불친절한 교과서, 그 해결 방법은?
그런데 우리 교과서는 불친절하다. 아이들이 모르는, 혹은 모를 만한 단어에 대한 설명이 없다. 한정된 지면에 축약된 내용을 다루려다 보니, 추상적인 개념어들만이 난무하고, 탐구 활동 과제는 많다. 아이러니한 건, 초등학생 사회 교과서에 '자유권'에 대한 설명이 단 3줄인 반면, 중학교에 가면 한 단락으로 늘어난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가면 반 페이지 남짓이 된다. 가장 친절하게 설명해줘야 할 아이들에게 가장 불친절한 교과서인 셈이다.
그러니 고등학교에 가서도 기본적인 사회 용어조차 학생들이 엉뚱한 답을 하게 된다. 게다가 교과서를 개정하면 할 수록 깊이도, 친절함도 점점 더 약해져 간다고 전문가는 개탄한다. 교과서조차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점점 더 한글은 외계어처럼 느껴진다.
아이들의 독서와 문해력이 떨어지는 건 전 세계적인 추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세계 각국은 저마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나가고 있다. <다큐프라임>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네이플스 스쿨을 주목한다. 학업 성취도가 3학년 평균 84%로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하는 이 학교, 그 비결은 바로 '문해력'에 집중한 교과서에 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교과서를 읽는다. 그리고 교과서에서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칠판에 적는다. 여기까지는 앞서 남한 고등학교 수업 시간과 비슷하다. 그런데 우리 수업에서는 이런 과정이 정규 과정이 아니라, 아이들이 너무 단어를 모르니 어쩔 수 없이 진행되는 반면, 네이플스 스쿨은 정상적인 수업 과정으로 이를 진행한다.
교과서에는 아이들이 모르는 단어의 뜻이 옆에 상세하게 나와있다. 선생님과 함께 모르는 단어를 짚어가며 이해한 아이들은, 이어 반 아이 중 한 명에게 선생님이 제시한 단어의 뜻을 설명하여 맞추게 한다. 단어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게임처럼 복기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 수업은 어떤 과목일까? 바로 과학 수업이다.
498쪽의 방대한 읽기 자료를 가진 과학 교과서는 단원별 핵심 어휘 설명에, 그에 따른 복습 문제와 다양한 글쓰기 연습까지 이루어지는 '문해력'에 방점을 둔 교과서이다. 네이플스 스쿨의 리터러시 코치는 모든 과목에 있어 문해력을 강조하며 교과서를 읽지 못하면 공부를 포기하게 된다고 단언한다. 특히 '비문학'의 텍스트를 읽기 수업이 문해력에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앞서 우리 학생들이 문해력에서 어려움을 호소한 과목 역시 '비문학'이 대부분이었다.
최근 '문해력'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듯이 현실은 교과서조차 스스로 읽을 수 없는 형편이다. EBS는 우리 아이들의 문해력을 제고하기 위해 교과서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교과서, 그리고 아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만드는 교과서, 나아가 읽고 싶은 교과서가 되도록 우리의 교육 과정이 변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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