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용접의 미학- 전통기술인가, 명품예술인가 [이동주의 신해양시대-5]
스케일이 아니라 정밀성
4차 산업혁명 기술 접목해
용접로봇 첨단화에도 박차
영화 ‘타이타닉’은 20세기 명화 중 하나로 꼽힌다. 1912년 초호화 크루즈선의 침몰사고라는 드라마틱한 소재를 그냥 놔둘 리 없는 할리우드 이야기꾼들의 솜씨로 역대 최고 흥행작 반열에도 올랐다. 첫 출항을 비극으로 마감한 실제 사건과 소설적 허구를 달달하게 버무려놓은 러브 스토리, 드넓은 바다에서 펼쳐지는 블록버스터 스케일, 디카프리오와 윈슬렛의 맛깔 나는 연기, 셀린 디옹의 가녀린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 선율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역작이다.
영상의 압권은 떠돌이 빙산에 부딪힌 269m짜리 타이타닉호가 뱃머리부터 물이 차오르며 침몰해가는 장면이다. 차갑고 어두운 북대서양 밤하늘을 배경으로 꼬리 쪽이 높이 치솟았다가 자기 체중을 이기지 못해 허리가 두 동강 나며 가라앉는 모습은 관객들의 안타까운 탄성을 자아낸다. 이 숨 막히는 순간을 한화오션의 일류 용접기사가 가장 먼저 봤다면 이렇게 독백하지 않았을까 싶다. “쯧쯧, 배 만드는 기술이 저래서야….”
타이타닉호의 철판 두께는 무려 350mm로 요즘 만드는 초대형 컨테이너선 최대 두께인 95mm의 서너 배에 이른다. 그런데 어떻게 빙산 충돌 정도로 그처럼 무기력하게 침몰했을까. 답은 두 가지다. 첫째는 당연히 철판 재질의 문제다. 두껍기만 했을 뿐 불순물을 잔뜩 머금은 철판의 강도는 당시 바닷물 온도였던 영하 2도에도 허약해지는 수준이었다. 영하 163도 액화천연가스(LNG)를 별 탈 없이 싣고 다니는 최신 선박들과 비교하긴 민망하다. 둘째는 철판을 이어 붙이는 기술부족이다. 두 개의 철판을 겹쳐 놓고 못처럼 생긴 리벳(rivet)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라 충격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쉽게도 선박건조에 용접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건 그 이후였다. 1941년 2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한 미국은 무려 2710척의 수송선을 4년 만에 만들어내는 압도적 생산력을 과시한다, ‘리버티선’으로 불리는 이 배들은 연합국 승리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데 이때 사용된 방식이 대형선박을 블록 단위로 쪼개 제작한 뒤 용접으로 이어 붙이는 대량생산 기술이었다. 이는 지금까지도 그대로 쓰이는 블록조립 방식이다.
조선업과 용접기술을 단순한 ‘철판 이어 붙이기’ 차원에서 본다면 산업혁명이 일으킨 전통업종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오늘날 광활한 야드에서 이뤄지는 선박건조 과정을 잠시라도 둘러본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온갖 고난도 기술의 집합체임을 금방 깨닫게 된다. 가령 초대형 선박 하나를 건조하려면 외형도 외형이지만 그 안에 무수하게 연결된 배관과 첨단설비를 설계하는 것 자체가 거의 예술에 가깝다. 인체에 비유하면 몸속의 뼈와 근육, 힘줄, 혈관, 장기들은 물론 뇌 구조까지 촘촘하게 연결된 해부도를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세부적인 내용들이 정확하게 연결되는 그림이 완성되어야 비로소 블록 단위 제작에 들어간다. 소 블록들은 중 블록으로, 중 블록들은 대 블록으로 점점 커지게 되고 이 과정에서 모두 용접기술이 동원된다. 그리고 한 개당 수백 톤에 이르는 대 블록을 30~50개쯤 이어 붙이면 마침내 거대선박이 완성된다. 용접은 종류가 다양하지만 선박건조에선 아크용접이 주로 사용된다. 태양 표면온도와 비슷한 6000℃의 고온을 활용해 원자 단위의 화학적 결합이 이뤄지게 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예술의 만남’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사실 선박건조 과정에서 경이로운 점은 규모보다 정밀도에 있다. 한 개당 수 백 톤에 이르는 대 블록들은 당연히 거대한 크레인으로 이동하지만 블록 간 용접을 위해 오차범위는 10mm 이내로 제한된다. 잠수함 같은 특수선에선 훨씬 더 정밀한 기준이 적용된다. 가령 잠수함에 탑재되는 수직 발사관의 오차 허용치는 1mm도 안 된다. 만약 그 오차범위를 손목시계 크기에 비례해서 줄여놓는다면 초정밀을 자랑하는 스위스 시계 기술자들도 조용히 입을 다물 것이다.
더구나 현장 용접단계에서는 단순히 기술만 필요한 게 아니다. 고수들의 바둑처럼 수순의 묘가 아주 중요하다. 수상함처럼 윗부분이 개방된 형태의 선박이라면 조금이나마 융통성이 있지만, 잠수함 같은 밀폐형 구조의 용접작업은 정확한 수읽기 없이 손댔다간 낭패당하기 십상이다. 마치 외과의사가 개복수술을 다 끝내고 나서 뒤늦게 뭔가 빠뜨렸음을 깨닫는 상황과 비슷해지기 때문이다. 한화오션이 특히 잠수함 분야에서 독보적 입지를 굳혀온 배경에는 이런 현장 고수들의 노련함도 큰 몫을 해왔다.
용접은 전통기술인 동시에 첨단 4차 산업혁명 기술이 접목되는 첨단 분야이기도 하다. 여전히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부분은 있지만 최근엔 웬만한 작업은 로봇이 대체해가고 있다. 옥포조선소에서는 20년 전부터 대 블록 용접로봇 ‘단디’에서부터 밀폐형 공간에서 작업하는 ‘인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동화가 진행돼왔다. 아주 비좁은 곳에서 작업을 하는 16kg짜리 초소형 로봇 ‘캐디’도 있다. 예컨대 극지방에서 2미터 이상의 얼음을 깨며 운항하는 쇄빙LNG운반선처럼 고강도 선체가 필요한 경우 선체 내부에 40cm 간격으로 보강재를 설치하는 작업을 하기에 적합하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로봇을 현장에 옮겨놓고 지시하는 방식이지만 머지않아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는 휴먼용접로봇도 등장하게 될 전망이다.
혹시 조선소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100층 빌딩 크기의 선박을 매일 만지는 예술가들 앞에서 시계, 가방, 의류 같은 패션용품을 ‘명품’이라 부르는 건 약간 결례가 될 수 있다. “그런 게 명품이면 내가 만드는 이 초일류 선박은 대체 뭐냐”고 웃으며 반문할지 모른다. 그들의 자부심이 대한민국을 명품선박의 산실이자 신해양시대의 주역으로 이끌어온 원동력이다.
글/ 이동주 한화오션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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