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금지시켰다가 정권 몰락했다…"임신 공포" 덮친 이 나라
8년간 집권했던 폴란드의 민족주의 우파 성향 법과정의당(PiS)이 최근 정권을 잃은 주된 원인은 저출산 대책 일환으로 추진하던 낙태금지 정책 탓이란 외신들의 분석이 나왔다. 강력한 낙태금지 정책이 되레 출산을 기피하는 분위기를 조장해 인구 위기가 가속화됐을 뿐 아니라, 집권 여당이 총선에서 몰락한 결정적인 원인이었단 설명이다. 일각에선 낙태 이슈가 정권의 향방을 결정했던 폴란드의 상황이, 미국의 내년 대선 경선 과정에도 재현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폴란드는 지난 13일(현지시간) 진보 성향의 시민플랫폼 대표 도날트 프란치셰크 투스크 전 총리가 신임 총리로 취임하면서 정권교체를 마무리했다. 앞서 지난 10월 하원 총선에서 투스크가 이끄는 시민연합과 제3의 길, 신좌파 당 등 3당 연합은 70%가 넘는 지지율을 얻으면서 집권당 PiS를 누르고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폴란드의 정권 교체를 두고 워싱턴포스트(WP)와 폴리티코 등은 2015년부터 집권했던 PiS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야심차게 시행했던 낙태금지법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지난 10월 폴란드통계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0월부터 올 9월까지 12개월 동안 폴란드의 출생아 수는 28만 명으로 전년 대비 3만4800명 줄었다. 연간 출생아 감소율은 11%로, 출산율 감소 폭이 두자릿 수로 확대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통계를 분석한 경제학자 라팔 문드리는 폴란드 TVN24와에 “지난 6년 간 출생아 수가 30% 감소했다”면서 “이는 ‘국가 붕괴’ 수준”이라고 전했다.
출산율이 급락한 시기는 PiS의 집권기와 맞물린다. PiS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다양한 정책을 내놨다. '500+'이란 프로그램이 대표적인데, 둘째 아이를 낳은 가정에 자녀가 18세 될 때까지 매달 500즈워티(약 16만원)씩 지급한다.
아울러 엄격한 낙태금지법을 제정하고 단속을 강화했다. 이 법이 발효된 2021년 이후 폴란드에선 강간·근친상간에 의한 임신과 임산부가 위독한 경우만 낙태가 가능하다. 태아에게 치명적인 기형이 진단돼도 낙태가 불가능하다.
'유럽에서 가장 엄격한 낙태금지국'이 된 폴란드는 낙태를 원하는 임산부를 지원하는 단체와 활동가도 처벌했다. 지난 3월 낙태 지원 단체 '낙태드림팀(ADT)'의 공동 설립자 유스티나 비진스카는 가정폭력 피해 임산부에게 우편으로 낙태약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법원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았다.
낙태 단속 강화하자 "임신 공포"
하지만 낙태금지법 시행 이후 저출산 상황은 한층 심각해졌다. PiS의 집권 초기인 2016년 1.36명이던 폴란드 합계 출산율은 낙태금지법 시행 첫해(2021년) 1.3명으로 줄어든 이후 지속적인 감소세를 보인다. 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는 폴란드를 몰타(1.13명)·스페인(1.19명)·이탈리아(1.25명)와 함께 유럽에서 저출산이 가장 심각한 국가로 분류했다.
폴란드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출산율은 세계 2차 대전 이후 최저치였다고 전했다. WP는 “낙태 금지가 산부인과 병동을 더 비참한 상황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게 폴란드가 주는 경고”라고 강조했다.
출산율 급락 원인으로 현지 매체 NFP는 "낙태 금지법이 여성의 임신 의지를 꺾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올 초 여론조사 결과 18~45세 여성 중 임신 계획이 있다고 밝힌 경우는 32%로, 2017년 41%에서 크게 줄었다. 실제로 장애가 있는 두 자녀를 키우는 작가인 아그니에스카 스필라는 "장애 아동을 둔 엄마는 삶의 전부를 아이들에게 쏟아부어야 한다"며 "임신을 앞둔 여성들은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까 봐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고 유로뉴스에 전했다.
법 도입 이후 양수가 터지는 등 위급한 상황에서조차 낙태 시술을 받지 못한 산모들이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일도 속출했다. 관련 단체 활동가들은 "치료 시기를 놓쳐 목숨을 잃은 산모가 최소 5명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낙태가 실제 줄었는지도 의문이다. 법 시행 전 연간 1000여 건이던 합법적 낙태 시술은 법 시행 첫해 90% 감소했다. 하지만 외신은 실제 낙태 건수는 줄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불법 시술을 받거나 주변 나라로 가서 나가 낙태를 하는 여성의 숫자가 상당할 것”(WP)으로 보기 때문이다.
PiS 소속 정치인들의 발언도 문제가 됐다. 지난해 야로슬라프 카친스키 PiS 대표는 “생존불가능한 태아라도 (일단 태어나서) 세례를 받고 이름을 정한 뒤 땅에 묻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젊은 여성이 또래 남성들과 술을 마시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아이는 없을 것”이라며 저출산의 원인을 여성의 음주로 돌려 공분을 샀다.
결국 폴란드에선 낙태금지법 폐지 여론이 높아졌다. 선거 7개월 전인 지난 3월, 여론조사업체 이브리스의 조사에서 응답자 83.7%가 낙태금지법 폐지에 찬성했다. 최근 발표된 또 다른 사에선 응답자 70% 이상이 낙태금지법이 여성의 건강과 목숨을 위태롭게 한다고 답했다.
폴란드의 정치 분석가 보이치에흐 자키는 WP에 “낙태 문제는 수백만 명의 유권자에게 매우 중요한 이슈였고, PiS의 정권을 몰락시킬 충분한 이유가 됐다”고 말했다. PiS의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전 총리도 총선 패배를 인정하면서 "낙태금지법이 패인"이라고 말했다.
진보에 표 주는 낙태 이슈…美대선 이슈?
일부 외신들은 낙태권 문제가 선거 이슈로 떠올라 정권의 향방을 결정했던 폴란드와 유사한 상황이 내년 미국 대선 레이스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관측하고 있다.
실제 미국 정치에서 낙태권 이슈의 위력은 지난달 버지니아 주(州)의회 선거와 오하이오 주민투표, 켄터키 주지사 선거에서 일부 확인됐다. 현재 미국에선 지난해 6월 연방대법원이 임신 6개월까지 낙태를 합법화했던 1972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하고 낙태권 존폐에 대한 결정권을 각 주로 넘긴 뒤 주별로 낙태권을 둘러싼 입법 전쟁이 진행 중이다.
버지니아는 남부 주 가운데 유일하게 낙태 금지를 법제화하지 않은 곳으로, 글렌 영킨(공화당) 버지니아 주지사는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이 이길 경우 낙태금지법을 강하게 밀어붙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투표함을 열자 예상을 깨고 상·하원 모두 민주당이 다수당이 됐다.
최근 두 번의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각각 8%포인트 차로 앞섰던 오하이오주에서도 낙태권을 보장하는 주법 개정안이 통과했다. 보수 성향인 켄터키주에서는 민주당 소속 현직 주지사가 재선에 성공했다.
이를 두고 로이터통신 등은 "낙태권의 승리"라는 평가를 내놨다. 앞서 지난해 11월 중간선거 때도 당초 '공화당 압승'이 예상됐지만 낙태 문제가 부각되면서 민주당이 예상 밖 선전을 펼친 바 있다.
앞으로도 낙태권 논란은 이어질 전망이다. 지난 13일엔 우파 성향의 대법관이 다수인 미 연방대법원이 먹는 낙태약인 미페프리스톤의 판매 규제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 대법원 심리 결과는 미국 대선 캠페인이 한창인 내년 6월께 나올 전망이다. CNN은 "낙태 문제가 대선판을 뒤흔들 가능성이 커졌다"고 전했다.
한편 유럽에선 낙태권이 첨예한 정치 이슈로 비화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오스트리아 녹색당 의원 메리 디소스키는 “낙태 금지는 출산율 제고와 무관하며, 여성의 건강과 생명을 위험에 몰아넣을 뿐”이라면서 “낙태를 단속하려는 정치인들의 관심사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명이 아니라 인종·성별에 대한 차별적인 세계관의 강화일 뿐”이라고 폴리티코에 전했다.
캐서리나 리들마이어 오스트리아 가족계획협회 고문도 매체에 "낙태는 정치 이슈가 아닌 그저 여성의 생식 건강 서비스로 인정돼야 한다"면서 "그것이 이렇게 힘든 싸움"이라고 말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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