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것들로 가득한 귀한 밥상, 한술 뜨기 황송했다
남도 맛 일번지 강진 ③ 식도락 여행
유배 선비가 가져온 궁중음식
강진에 왔다면 수라상에 버금가는 한정식 한 끼는 먹어봐야 한다. 강진 한정식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과거부터 물산이 풍부했고 교역·군사 요충지로, 고급 음식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조선 시대 강진으로 유배 온 선비들 덕에 궁중 음식 문화가 도입됐다는 설도 있다. 쟁쟁한 한정식집이 강진읍에 많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오는 ‘해태식당’, 그윽한 분위기의 한옥 ‘청자골종가집’, 4대째 이어온 ‘예향’ 등이 유명하다. 이번엔 예향을 가봤다. 메뉴는 예정식(14만원), 향정식(16만원), 수라상(18만원) 3가지다. 모두 4인 기준이다.
예정식만 해도 한상 가득 음식이 차려진다. 생선회·보리굴비·떡갈비·홍어삼합을 비롯해 20가지 넘는 반찬이 나온다. 음식 간은 세지 않다. 남도 음식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정갈한 모던 한식 같다. 육전이 특히 고소했고, 적당히 곰삭은 홍어가 묵은지와 궁합이 좋았다. 예향은 흥미롭게도 모계가 가업을 잇고 있다. 정혜영(46) 사장의 외증조모가 1930년 개업한 여인숙 겸 식당 ‘호남관’이 뿌리라니, 한 세기 가까운 역사다. 정 사장은 “젓갈·나물 등 주요 식재료는 강진산을 고집한다”며 “바지락 무침이나 백합처럼 갯것들로 만든 음식이 진짜 귀한 강진의 맛”이라고 말했다.
강진 명물 토하젓을 반찬으로
강진군 병영면은 조선 시대 전라병영성이 있던 곳이다. 군 주둔지이니 주변에 많은 주민이 거주했고 당연히 시장도 발달했다. “북엔 개성상인 남엔 병영상인”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음식 문화가 덩달아 발달했고, 그 문화가 병영불고기를 통해 내려온다. 연탄불에 구운 양념 돼지고기 요리다.
병영오일장 주변에 불고기 전문 식당 6곳이 모여 있다. 여러 식당 중 약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수인관’을 가봤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욱한 연기 속에서 고기를 굽고 있는 신정일(73) 사장이 보였다. 수인관 메뉴는 사실 한 종류다. 인원수에 따라 불고기 백반을 주문하면 즉시 한상차림을 내준다. 불고기를 비롯해 20가지 반찬이 청자 그릇에 담긴 모습이 한정식 같다. 강진 명물 토하젓도 나온다. 불고기 생김새는 흔한 제육볶음 같지만, 맛이 다르다. 불향이 강하면서도 질기지 않고 육즙이 가득하다. 신 사장은 “불 조절을 잘하는 게 불고기 맛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수인관 불고기는 2011년 특허 출원했다.
한정식집이나 음식 좀 한다는 강진 식당에서 내주는 토하젓은 귀한 반찬이다. 토하는 1급수에만 사는 민물새우로, 옴천면 토하젓은 조선 수라상에도 올랐다. 남도 음식 맛 아는 사람은 삼합·보리굴비·육전보다 토하젓 맛에 열광한다. 개미의 결정판이라고 할까.
갯벌서 바로 잡아올린 짱뚱어
강진만은 풍요로운 갯벌을 품고 있다. 갯벌에서 가장 생명력 넘치는 존재가 짱뚱어다.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갯벌을 헤집고 다니며 부지런히 몸집을 키운다. 간조에 맞춰 강진만 생태공원 갈대숲 탐방로를 걸으면, 짱뚱어의 앙증맞은 몸짓을 볼 수 있다. 겨울잠에 들어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밥상 위에서만큼은 존재감이 확실하다.
강진 일대에 짱뚱어 전문 식당이 몇 있는데, ‘강진만 갯벌탕’처럼 전국구 맛집으로 통하는 식당도 있다. ‘짱뚱어 달인’으로 통하는 이순임(72) 대표가 주방을 지킨다. 그는 강진만 갯벌에서 60년 넘도록 짱뚱어를 잡은 달인 중의 달인이다. 짱뚱어를 잡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워낙 예민하고 몸놀림이 빨라 맨손으로는 잡을 길이 없다. 이 대표는 이른바 ‘뻘배’를 밀고 갯벌 한복판으로 들어가 노련하게 짱뚱어를 잡아들인다. 미끼 없이 빈 바늘을 여러 개 엮은 도구로 물고기를 낚아채는 ‘훌치기’ 방식이다.
된장과 시래기를 넣어 푹 끓인 짱뚱어탕은 강진 사람의 소울푸드다. 이맘때 추위를 달래기 좋고, 속풀이에도 그만이다. 맛은 어떨까. 짱뚱어를 통째로 갈아서 끓이는데 국물이 걸쭉한 것이 얼핏 추어탕을 닮았다. 잡내는 전혀 없고 고소한 감칠맛이 강하다. 음식 이름처럼 갯벌이 통째로 뚝배기 안에 담긴 듯하다.
실한 해산물 듬뿍, 젊음을 되찾는 맛
강진에는 ‘회춘탕(回春湯)’이란 보양식이 있다. 어떤 음식이길래 ‘다시 젊어진다’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걸까. 강진읍 ‘하나로식당’에서 회춘탕을 주문하니 세숫대야만 한 냄비에 문어·전복·토종닭 등이 한데 담겨 나왔다. 정혜정 사장이 “수삼·헛개나무 등 열두 가지 한약재가 들어가는데, 이만한 보약이 없다”고 말했다. 국물 맛이 참 깊었다. 정 사장은 “좋은 해산물을 듬뿍 넣어 소금 간을 안 해도 깊은 국물 맛이 난다”고 설명했다.
너무 푸짐하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다. 넷이서 먹었는데도 건더기를 다 건져 먹지 못할 정도였다. 남은 국물에 녹두죽까지 해 먹고 나니 포만감이 엄청났다. 많이 먹어서인지, 기운이 끓어서인지 땀이 뻘뻘 났다.
강진 사람은 먼 옛날 강진군 마량면에 있던 수군진영 ‘마도진 만호성’에서 회춘탕이 유래했다고 믿는다. 무려 600년 전이다. 성안의 높으신 양반을 위해 갖은 해산물과 닭고기, 한약재를 넣은 음식을 만들어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강진군청이 옛이야기를 토대로, 2013년 회춘탕 레시피를 개발해 지역 식당에 전파했다. 현재 10개 식당이 회춘탕을 판다. 재료 준비 시간이 긴 만큼 일찌감치 예약하는 게 좋다.
오후 2시면 동나는 휘낭시에까지
강진에 푸짐하고 무거운 음식만 있는 건 아니다. 젊은 감성의 디저트집, 그윽한 분위기의 찻집도 있다. 강진읍시장 안에 자리한 ‘쨈과 크림’은 청과상과 쌀집·옷가게가 옹기종기 모인 시장 안에서 유일하게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가게다. 스콘·휘낭시에·머핀 등 서양식 구움과자를 전문으로 하는데, 2019년 문을 연 뒤 시장의 명물이 됐다.
쨈과 크림은 시장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연다. 10시부터 손님을 받지만, 문진영(34) 사장이 새벽 5시부터 나와 30가지 이상의 과자를 구워낸다. 당일 제조, 당일 판매가 원칙인데 오후 2시면 대부분 동난다. 문 사장은 “무화과 크림치즈를 얹은 휘낭시에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식감 덕에 동네 어르신도 즐겨 드신다”고 자랑했다.
월출산 남쪽의 월남마을에는 ‘이한영 차 문화원’이라는 한옥 찻집이 있다. 월출산 대숲의 야생 찻잎을 덖어 만든 여러 차를 선보인다. 특히 1920년대 생산돼 국내 최초의 시판 차로 통하는 ‘백운옥판차’를 복원해 내놓고 있다. 차 사랑이 유별났던 다산 정약용 선생도 강진 유배 시절 이 지역에서 생산한 차를 즐겼다고 한다. 차의 맛과 향도 깊지만, 그윽한 풍경 덕에 인기가 높은 집이다. 처마 밑에서 월출산을 바라보면 인생 사진 구도가 완성된다.
강진=글·사진 최승표·백종현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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