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금융사]풍요의 시대, 美경제에 드리운 대공황의 그림자
자동차 성장엔진으로 급속 발전
뉴욕증권거래소 세계 최정상 지위
1929년9월3일 다우지수 381.17
이후 기록 25년간 깨지지 않아
1918년 11월11일 마침내 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존 피어폰트 모건 2세는 1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 영국, 러시아 대출을 융통했다. 2200개 은행으로부터 협조융자단을 구성해서 영국과 프랑스에 5억달러의 차관을 주선했다. 전후 금융에도 참여해서 독일의 전쟁배상금 17억달러를 조달했다. 뉴욕증권거래소는 세계 최정상의 지위에 올랐다. 1920년대까지 40여년 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한 미국 경제는 유럽에 돈을 빌려주는 자본국으로 우뚝 섰고, 전쟁을 통해 기술도 급속하게 발전했다. 1차 세계대전의 승리 후 갑작스러운 종전은 미국 기업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 전쟁 특수에 맞추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산업 설비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수요 감소는 실제 1920년대 초반 짧지만 심각한 불황을 유발했다.
그렇지만 미국 경제는 곧 빠르게 회복해 1921년에서 1929년까지도 국민소득이 연평균 약 3.7% 성장했다. 19세기 철도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초반 미국 경제의 성장 엔진은 자동차였다. 1914년 미국의 자동차 대수는 대략 126만대였다. 1929년 미국자동차 업계는 560만대를 생산했다. 연관 산업인 정유, 철강, 고무 산업도 발전했다.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자동차 수리 등 관련 업종도 빠르게 성장했다. 전기가 보급되고 세탁기와 자동차, 라디오가 대중화되었다. 제조업의 비중이 높아졌고 노동생산성이 빠르게 상승했다. 주가도 덩달아 올랐다. 한마디로 풍요의 시대였다. 그렇지만 미국 농촌은 호황의 분위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농촌 인구의 3분의 1은 당시 중요한 운송수단이었던 말의 먹이인 마초를 재배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동차 출현으로 말의 숫자가 줄어들자 그들의 소득이 급감했다. 농민들은 밀 생산으로 업종을 바꾸어 1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 밀수출을 할 수 있었다. 1918년 전쟁이 끝나자 수출량이 급감해 농가는 오히려 소득이 줄어들었다. 그러자 농촌지역의 은행과 상점들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중앙은행 설립에 반대했던 제퍼슨 때문에 미국에는 다른 나라들보다 군소은행들이 난립했다.
1921년 미국 전역에 있던 대략 3000개의 은행 가운데 매년 500개의 은행이 줄줄이 파산하는 도미노 현상이 발생했다. 이런 농촌 경제의 속병을 ‘산업화된 미국’만을 상대했던 월스트리트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1920년대 미국 경제와 증시는 초호황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미래 소득을 저당잡히는 신용구매, 특히 할부 구매가 일상화되면서 대중소비가 늘어났다. 1차 세계대전 중 발행한 미국 정부 채권에 투자한 경험이 있는 미국민은 자본주의 금융의 맛을 알고 있었다. 이들 중산층은 증권투자에 몰입했고, 차입 투자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지만 1928년이 되자 미국 경제도 서서히 둔화되고 있었다. 월스트리트 증시는 실물경제와 괴리되며 아직도 홀로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1870년 이후 다양한 개혁조치들이 만들어졌지만 뉴욕거래소만큼 내부자들의 이익을 최우선시했던 사례는 드물다. 투기꾼들이 담합해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주가를 인위적으로 조작했다. 작전세력은 허수주문이 금지되었음에도 미리 약속한 대로 교묘하게 매매타이밍을 맞추어 주가를 조작했다. 이들은 주가의 흐름을 왜곡한 뒤 공매도나 집중매도를 이용해 일반 투자자들을 함정에 끌어들여 자신들의 물량을 매도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주식투기가 과열되자 연방제도 이사회는 재할인율을 인상하고 통화팽창을 억제했다. 곧바로 월스트리트뿐만 아니라 실물경제영역에서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1929년 초 경기가 냉각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경우 경기의 냉각은 증시의 하락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월스트리트는 실물경제와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연방정부이사회가 신속한 조치를 내놓아야 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처럼 당시 연방준비은행 총재인 스트롱은 결핵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뒤 숨을 거두었다. 방향타를 상실한 연방정부이사회는 급박한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일반 투자자들의 욕망으로 월스트리트의 주가는 다시 급상승했다. 1929년 9월3일 다우존스 지수는 381.17을 기록했다. 이후 25년 동안 미국 증시는 이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데 1929년 9월 노동절 휴가 뒤 열린 증시에서 갑자기 주가가 폭락했다. 이후 주가는 때로 급락했고, 때론 소폭 하락하며 지속적인 하향세를 보였다. 월스트리트는 ‘기술적 조정’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미래의 주가하락가능성을 예상했다.
10월22일에는 거래소에서 가장 안정 종목인 AT&T 주가마저도 급락했다. 1929년 10월24일 드디어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운명의 날이 왔다. 밤 사이 월스트리트의 각 증권사에는 매도주문이 쌓여 있었다. 주가가 하락한 뉴욕의 증시공황은 1930년 6월쯤에야 끝이 났다. 6월 이후 미국은 더 심각한 경제공황으로 추락한다. 후버 대통령에게 경제공황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후버는 선거유세에서 ‘농산물 수입관세를 올려 미국 농가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고, 농산물과 공산품에 대한 관세가 급격하게 인상된다. 미국이 관세를 올리자 다른 나라들도 관세를 올리기 시작해 미국의 수출도, 세계 교역의 규모도 축소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제불황에 직면해 연방제도이사회는 이자율 인상과 통화긴축을 고집했다. 이런 정책은 최악의 경제공황을 맞아 미국 경제를 파멸시키고 있었다. 9800여개에 이르는 은행이 문을 닫았고, 수백만 명의 예금주들이 파산해야만 했다. 연방준비은행들은 담보대출을 금지하고 있어 건전한 은행조차 파산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와중에 후버 대통령은 1932년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세율인상안을 의회에 통과시켰다.
1929년을 기준으로 미국의 총생산은 반으로 줄어들었고, 실업률은 25%를 넘나들었다. 재정균형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던 후버는 재정균형을 목표로 했다. 1932년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세율 인상안을 의회에 제출해 통과시켰다. 1929년 고점을 기준으로 1932년 미국의 국민 총생산은 반으로 줄었다. 실업률은 25%를 넘었다. 미국 재무부 채권 수익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미국 경제는 끝없는 나락으로 빠지고 있었다. 뉴욕증권거래소 회원권 시세도 50만달러에서 단 돈 7만달러로 추락했다. 대공황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영란 역사저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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