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내가 사랑했다는 뜻… 루이즈 글릭 시집 전권 만나다
노벨상 작가… 지난 10월 세상 떠나
가족·죽음·삶 향한 인내 시선 돋보여
미국 외 최초로 13권 오롯이 펴내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이즈 글릭의 시집 13권 전권이 번역, 출간됐다. 글릭 시집 전권 출간은 시인이 속한 미국을 제외하면 한국이 유일하다.
글릭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두 번째 여성 시인이다. 앞서 1996년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여성 시인으로 처음 수상했다. 1943년생인 글릭은 1968년 첫 시집 ‘맏이’를 시작으로 50여년에 걸쳐 시집 13권과 산문집 2권을 발표했다. 시공사는 2021년 초 글릭 시집에 대한 전권 출간 계약을 한 후 2022년 ‘야생 붓꽃’을 시작으로 글릭의 시집들을 소개해 왔다. 이번에 시집 6권을 한꺼번에 내놓으며 전권 출간을 완료했다.
새로 번역된 6권 중에는 글릭의 중요한 시집들이 여러 권 포함돼 있다.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은 그의 마지막 시집이다. 글릭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다음 해 이 시집을 출간했으며, 올해 10월 세상을 떠났다.
‘아라라트 산’은 1990년 출간된 다섯 번째 시집으로 글릭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이 시집에 실린 시 ‘최초의 기억’에는 “어린 시절, 나는, / 고통이란 내가 사랑받지 / 못했다는 뜻이라 생각했다. / 그건 내가 사랑했다는 뜻이었다”라는 잊을 수 없는 문구가 나온다.
1985년작 ‘아킬레우스의 승리’는 전미비평가상을 받은 시집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서서히 사그라지는 모습과 그걸 바라보는 가족의 시선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글릭의 시에는 가족 이야기가 많이 드러나는데 ‘일곱 시절’ 역시 그렇다.
글릭의 주제로 죽음을 빼놓을 수 없다. ‘내려오는 모습’은 죽음에 대한 사유와 고찰로 가득한 시집이다. ‘시골 생활’은 시골 생활을 묘사한 시집으로 평온을 가장하고 숨어 있다가 갑자기 민낯을 드러내는, 평범한 것의 가면을 벗기는, 글릭 특유의 ‘잔혹 동화’를 보여준다.
한국외국어대에서 영미문학을 가르치는 정은귀 교수가 글릭 시집 전권을 번역했다. 정 교수는 국내에서 드문 글릭 연구자이기도 하다. 글릭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국에서 나올 자기 시집의 표지색 채도까지 고민하며 정 교수와 이야기를 이어왔다고 한다. 국내 출간된 글릭 시집에는 각권마다 정 교수가 쓴 ‘옮긴이의 말’이 별책으로 들어 있어 시인과 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정 교수에 따르면 글릭은 “이토록 무서운 진실을 이처럼 아무렇잖게 평온한 언어로 표정 없이 들려주는” 시인이고, “죽음과 삶이 함께하는 이 세계에서 죽음 이후를 이야기하는 방식에 있어서 정말이지 거침없고 담대한 시인”이다.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에 실린 ‘아이들 이야기’라는 시를 보자. “누가 미래를 말할 수 있나? 미래를 아는 사람은 없다 / 심지어 행성들도 알지 못한다 / 하지만 공주님들은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 그 하루가 얼마나 슬픈 날이 될 것인지 / 차창 밖으로, 암소들과 목초지가 떠내려가고 있다 / 그들은 평온해 보인다, 하지만 평온이 진실은 아니다 / 절망이 진실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걸 / 알고 있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 우리가 희망을 다시 찾고 싶다면 / 우리는 희망이 사라진 곳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글릭은 어떤 글에서 시와 현실의 관계를 얘기하면서 “왜 시가 내 인생을 모방하면 안 되지?”하고 물었다. 정 교수는 이 질문에 시에 대한 글릭의 생각이 요약돼 있다고 본다. “그의 시가 열정적인 것도, 차갑고 냉정한 것도, 어떤 섣부른 희망을 말하지 않는 것도, 겉보기에는 평범한 시간 속에 물리적인 이 세계의 현실을 넘어서는 어떤 진실의 실체를 파고드는 것도, 그가 살다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가 경험한 감정을 날 것으로 잡아채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글릭의 시집 전부를 읽을 수 있게 됐다. 어렵지 않고 단정한 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글릭이 평생을 인내하며 다듬어온 엄정하고 명료한 진실이 담겨 있다. 정 교수는 “어느 시집이 제일 좋은가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며 “그럴 때 나는 맨 첫 시집 ‘맏이’부터 먼저 읽어 보시라고 말씀드린다”고 얘기했다. 또 “13권의 시집 중에 글릭의 대표작을 고르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아라라트 산’이야말로 시인으로서 글릭을 있게 한 크나큰 방주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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