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장동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Q : 선한 인상이라는 말, 많이 듣죠?
A : 그 덕을 많이 봤죠.(웃음) 이미지 캐스팅도 많이 되고요.
Q : 최근 작품들을 보면 자신의 곱상한 이미지를 뒤집는 역할에 줄곧 도전해온 것 같아요. 〈써치〉의 군인, 〈늑대사냥〉의 이능력자, 〈악마들〉의 사이코패스, 〈오아시스〉의 ‘두학’까지.
A : 부러 외적인 이미지를 뒤집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단지 했던 걸 또 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해요. 그리고 이미지 때문에 배역이 한정되진 않는다고 생각해요. 착하게 생긴 사람이 사이코패스일 때 오는, 한 번 뒤튼 이야기가 더 흥미롭지 않나요?
Q : 실제론 어때요? 보이는 것처럼 선한 사람인가요?
A : 선과 악에 대해선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저는 저만의 고집과 올곧음이 있는데, 그게 저를 편협하게 하거나 갇혀 있게 하지는 않을까 생각하죠.
Q : 하지만 옳고 그름에 기준을 세운다는 건, 결국 선해지기 위함이 아닌가요?
A : 결국 제가 행복하기 위한 것이죠. 나쁜 짓을 하면 제가 행복하지 않아요. 이를테면 저는 술, 담배, 게임 같은 중독적인 것들을 멀리 하는데, 제가 중독에 취약한 사람이란 걸 알거든요. 전 이 순간의 쾌락보다는 미래의 행복을 생각해요.
Q : 신작 드라마 〈모래에도 꽃이 핀다〉에서 씨름 선수를 연기해요. 도전적인 배역이었을 것 같은데, 이 작품을 하기로 한 까닭은 뭔가요?
A : 재미있고 인간적인 이야기예요. 아빠도 형도 씨름 장사 출신인데, 자신은 한 번도 장사를 못 해본 안 풀리는 씨름 선수의 이야기. 정과 휴머니즘이 녹아 있죠. 15kg을 증량해 태어나 처음으로 80kg을 돌파했고, 용인대 체대에서 씨름 교육을 받았어요. 복싱 같은 스포츠는 때리는 척, 맞는 척 연기를 할 수가 있는데, 씨름은 실제로 들어 올려야 하고, 발을 걸어야 하고, 메쳐야 해요. 대역을 쓸 수도 없죠. 그래서 정말 열심히 배웠어요. 그렇게 연습하고 집에 가면 털어도 털어도 모래가 나와요.(웃음)
Q :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뭔가요?
A : 시나리오의 재미. 제게 재미있는 작품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것이에요.
Q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받은 단편 〈내 귀가 되어줘〉로 감독 데뷔도 했죠.
A : 어릴 때부터 시나리오도 쓰고 시도 썼죠. 시는 초등학생 때부터 끄적이다가 쓰게 됐고, 시나리오는 중학교 때부터 독립 영화를 많이 보면서 쓰게 됐어요. 지금은 시와는 멀어졌지만 영화감독이라는 일과는 조금 더 가까워졌죠. 주변에 든든한 동료들이 생겨서 연출에 도전해봤어요.
Q : 농인 미혼부에 대한 이야기예요. 10대 때 문학상을 수상했던 시들도 노숙자, 붕어빵 장수 등 사회 안전망 밖에 있는 이들에 대한 작품이었고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에게 관심이 많은 편인가요?
A : 원래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해요. 시를 쓸 때도, 시나리오를 쓸 때도 제가 관찰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곤 하죠. 〈내 귀가 되어줘〉도 제가 봤던 한 농인과 청인 가족의 모습을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그런데 쓰는 도중 배리어프리 영화 홍보대사가 된 거예요. 활동을 하며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어요.
Q : 학창 시절엔 ‘정세청세’라는 토론 동아리에서 활동했죠. 조영래 인권 변호사가 맡았던 여공 성추행 사건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고요.
A : 인간과 사회, 정의와 불의에 대해 관심이 뜨겁던 시절이에요. 때 타기 전의 일이죠.(웃음)
Q : 애니메이션 〈태일이〉 목소리 연기를 하기도 했어요. 제안을 받자마자 수락했다고.
A :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전태일은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인물이지만, 저도 평전을 그때 처음 읽어봤어요. 대구에서 자랐고, 글 쓰는 걸 좋아하고, 어머니가 독실한 신자인, 여러 부분이 저와 공통점이 많았고 자기 고집이 있는 성정도 통하는 구석이 있어 이입이 많이 되더라고요. 푹 빠져서 연기했어요. 인권에 관심을 가진 건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닌 영향도 있었을 것 같아요. 교회를 다니는 청소년들은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사역 활동도 하거든요. 대학생 때 다니던 교회에서 노숙인들에게 검정고시 공부를 가르쳐주는 봉사 활동을 신청한 적 있어요. 제가 담당한 노숙인이 행방이 묘연해져 제대로 하지는 못했지만요. 그때 알게 된 게 정말 많은 노숙인분들이 길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거예요.
Q : 살아온 길이 대쪽 같아요. 하숙집 앞에서 담배 피우던 10대들을 단속해서 왕십리 장 형사로 불렸고, 자살 시도하려던 여성을 말린 적도 있고, 대학생 때 편의점 흉기 강도를 제압해 경찰 표창을 받은 뒤 TV 뉴스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다가 배우 캐스팅이 됐어요.
A : 제가 겁이 없어요.(웃음) 의협심도 있고 패기도 있고 오지랖도 있고요. 잘 싸돌아 다니고 사람들한테 관심이 많아서 여기저기 기웃기웃하다 보니 그런 일들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Q : 정의로운 행동으로 인해 내가 피해를 볼까 봐 두려운 적은 없었어요?
A : 두려운 적은 없었지만 힘들었던 적은 있어요. 저는 항상 어딜 가든 ‘인싸’였고 반장이나 회장, 리더를 맡는 성격이거든요. 그런데 대학생 때 제가 회장으로 있던 한 단체에서 문제가 생겼어요. 정말 화가 나는 일이었죠. 이 사건의 가해자를 지목하고 공론화했는데, 다들 “일을 왜 크게 만드냐”고 등을 돌리더라고요. 그때 정말 ‘현타’가 왔죠. 징계를 받게 하고 싶었는데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진흙탕 싸움이 돼버려요. 가해자는 그 뒤로도 반성은커녕 자기 과 학우에게 똑같이 하다가 대자보가 붙었죠. 속 시원한 결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 행동에 후회는 없습니다.
Q : 멋있네요. 젊은 세대일수록 점점 더 자기 잇속만 차리는 세상인데 말이죠.
A : 세상이 더 다양해졌고 다양한 가치를 존중한다고들 하는데, 저는 더 편협해지는 것 같아요. 다들 보여지는 것에만 관심이 많죠. 보이지 않는 것은 점점 더 소외되고요. 돈, 비트코인, 부동산 투기, 인기, 명예, 인스타그램 피드, 물질적인 것들에만 목을 매고 한탕주의에 빠지고, 보이지 않는 삶과 사랑, 인격 같은 건 가치가 없어져요. 외모 지상주의도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 것 같아요. 잘나고 예쁘고 멋있고 성공하고 돈 잘 버는 이들에 대한 우상화도 심해지고요. 요즘엔 외모가 뛰어나거나 돈이 많거나 성공한 사람에게 ‘갓’, ‘~느님’이라고 신격화하는 게 하나의 문화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뭐 하나 오점을 잡아 거꾸러트리는 캔슬 컬처도 심해지죠. 배우는 보여지는 직업이기 때문에 더 깊게 체감해요.
Q : 디즈니처럼 콘텐츠 생산자들이 다양한 인종, 다양한 사람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일도 많아졌잖아요. 저는 지금이 과도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A : 저는 사람들이 그런 다양성을 지향하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동시에, 외모 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게 맹점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다양한 가치를 존중해, 어떤 몸도 아름다워”라고 하지만 정작 대중이 열광하는 연예인들은 점점 더 말라가고 있죠. 이게 대중 매체의 현실이에요.
Q : 이쯤 되니 궁금해지네요. 정말 전형적이지 않아서요. 성실히 대학을 다니고 취업 준비도 열심히 하던 장동윤은 편의점 강도를 잡다가 세상에 불려 나왔죠. 그때 배우를 해보란 제안을 받고, 어떤 마음으로 이 일을 하기로 한 거예요?
A : 모험이었죠. 전 평범하게 살아왔고, 그런 기회가 없었다면 배우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직업이니까. 저는 재수도 안 하고 휴학도 안 해서 남들보다는 시간을 벌어둔 상태였기 때문에 한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재능이 있고 재미를 느끼는지, 그리고 이걸로 밥벌이는 될지 확인해보자. 비전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중간에 그만뒀겠지만, 연기가 적성에 맞고 재미있더라고요? 지금은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일 안 할 때는 뭘 해야 될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어요.(웃음) 촬영장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Q : 장동윤에게 행복이란 어떤 거예요?
A : 건강한 것. 저는 행복해질 수 있는 법을 알아요. 전 인체가 잘 설계된 기계라고 생각하거든요. 행복을 느끼는 건 호르몬 작용이고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자연광을 많이 쬐고, 자기 전에는 인위적인 조명을 가능한 한 접하지 않도록 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 사회적인 교류 활동을 하고, 도파민 중독을 피하고…. 잠시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콧방귀 뀌더라고요!(웃음) 뻔한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얘기한다고. 근데 이게 정말 행복해지는 길이에요. 저는 술도 조절하고 유튜브 쇼츠도 너무 많이 보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인기 많고 돈 잘 버는 것 다 좋지만, 저한테 그게 곧 행복은 아니거든요. 배우로서는 이런 성격이 좀 이상하고 마이너스일 때도 있는데, 저에게 행복은 부와 명예보단 건강한 삶입니다.
Q : 어릴 때는 어떤 애였어요?
A : 장난기 많고 나가 놀기 좋아하는 애였어요. 소위 말하는 ‘인싸’여서 반장, 학생회장, 동아리 회장, 이런 건 빼지 않고 하는 스타일이었고요. 중학교 때까지는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 고등학교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했죠. 당시에 제가 좋아했던 봉준호·박찬욱 감독님께서 연세대, 서강대를 나오셨더라고요? 저도 좋은 학교를 가서 선택의 폭을 넓히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Q : 잘생기고 똑똑하고 친화력도 좋아서 어딜 가나 환영받는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A : 하하하.
Q : 이런 사람들은 약자의 위치에 서본 적이 없어서 정의라거나 옳고 그름, 소수자의 입장 같은 것엔 무뎌지기 쉬운데, 그런 감수성은 어떻게 발달한 것 같아요?
A : 고등학교 때 동대구역에서 KTX 타고 서울에 있는 논술학원에 다녔거든요. 역에 있는 노숙인들을 보고 청소년소월문학상을 받은 시 ‘발바닥을 보다’를 썼고, 독서실 앞에 있는 포장마차를 보고 현대시문학 청소년문학상을 받은 시 ‘삼대째 내려온 카누는 지상으로 간다’를 썼죠. 제가 시를 배울 때 시인 선생님들이 그러시더라고요. “시를 쓴다는 건 타고난 거다.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고. 저는 사람에 대한 애정도 그런 것 같아요.
Q : 어떤 시를 좋아해요?
A : 문태준 시인의 시처럼 담백하고 억지로 꾸며내지 않은 시가 좋아요.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많이 꾸며내거나 추상적이거나 가짜 같거나 느끼한 건 싫어요. 테크니컬한 성취를 이루는 장르물도 그만의 미덕이 있지만, 제 취향은 그래요.
Q : 켄 로치 감독을 좋아할 것 같은데요?
A : 사랑하죠. 그리고 에드워드 양과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를 정말 좋아해요. 인위적인 조명도 세팅도 없고 억지로 꾸며낸 느낌이 하나도 없죠. 에드워드 양은 광각을 좋아하고, 어떤 중요한 대사를 한다고 해서 그 장면을 타이트하게 잡는 법도 없어요.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명료해요. 영화 〈녹색 광선〉에 달린 리뷰 중 제가 좋아하는 댓글이 있는데요, “언니, 나 언니 마음 이해해요”라는 댓글이에요.(웃음)
Q : 주변에선 장동윤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나요?
A : 솔직하고, 독특하고, 올곧고, 누군가에겐 이상한 사람.
Q : 타협하고 싶지 않은 게 있다면 어떤 거예요?
A :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사람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 요즘엔 이걸 ‘꼰대’라고 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자기만 생각하는 건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우는 특히 그런 직업이에요.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을 더 생각하고, 그들의 고충과 힘듦을 헤아리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Q : 자주 받는 오해가 있나요?
A : 마음 여린 순둥이일 것이다. 오늘 말씀 나눠보면서 아셨겠지만 저 고집 있잖아요.(웃음)
Q : 그러면 장동윤이 생각하는 장동윤은 어떤 사람인가요?
A : 세상을 조금 피곤하게 사는 사람.
Q :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있어요?
A : 저는 제 영화나 예술로 뭔가를 가르치려 들고 싶진 않아요. 그런 건 오만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영향력을 잘 활용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거든요. 단지 저는 제가 사랑하는 것을 열심히 할 거고, 사람들이 사랑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사랑하고 나누고, 주변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요.
Q : 연애는 관심 없나요?
A : 있죠. 한번 만나면 오래 사귀는 스타일이다 보니 점점 만남에 신중해지는데… 늦지 않게 결혼하고 싶고 아빠가 되고 싶어요. 제가 서른둘인데, 주변에 결혼한 사람이 많거든요. 배우들은 결혼을 늦게 하는 편 아니냐고요? 에이, 생물학적 나이가 같은데요? MZ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더 빨리 늙는다고 해요. 단것 많이 먹고 SNS 많이 하면서 도파민 중독으로 노화가 빨라져서. 저는 건강한 아빠가 되고 싶어요.(웃음)
Q : 좋은 아빠가 될 것 같아요. 가장 자신 있는 요리는?
A : 된장찌개 잘 끓여요. 갈비찜도 파스타도 잘하죠.
Q : 장동윤은 어떤 사람들과 친구가 되나요?
A :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물론 이런 이야기가 통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 똑똑한 사람이 많아요. 하지만 저랑 깊게 가까워지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것의 의미를 아는 사람, 그 가치가 뭔지 아는 사람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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