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벅지 맞으며 외운 한문, 일본여행에 요긴할 줄이야

홍성식 2023. 12. 21.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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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결정해 짤막하게 다녀온 일본 오사카, 두 번째 이야기

[홍성식 기자]

 오사카 인근 교토의 대표적 관광지 중 하나인 청수사의 밤 풍경.
ⓒ 홍성식
 
먼저 20세기 후반 이야기 하나. 소위 X세대인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던 1984년.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없던 생소한 교과들을 만나게 됐다. 대표적인 게 '영어'와 '한문'.

요즘이야 각종 선행학습이 있어 초등학교 저학년도 영어를 곧잘 하고, 고학년이 되면 중학교 수학을 미리 예습 한다지만, 그땐 그런 경우가 드물었다. 그림 같은 글자의 획수를 외우고, 그걸 어떻게 읽는지 알아내야 하는 '한문'은 여러 중학생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의 한문 교사는 시험을 봐서 틀리는 문제의 숫자대로 매를 때렸던 사람이었다. 겨우 열서너 살 아이들의 허벅지에 멍이 들도록 매질을 했으니, 지금이라면 난리가 날 일이지만 그땐 그런 교사도 있었다. 어쨌건 그 '무서운 교사' 덕분(?)에 어거지로 한문을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폭력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진 못하지만 쉽게 굴복시키곤 했으니까.

맞으며 배운 한자가 도움이 될 줄이야

세월은 흘렀고, 이제 내 나이는 중학교 그 시절 한문 교사보다도 많아졌다. 그 짧지 않은 시간 속에서 일본을 여러 차례 여행했다. 오키나와, 홋카이도, 후쿠오카, 오사카…. 이 도시들을 돌아다닐 때 한자를 읽을 줄 안다는 게 큰 도움이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지하철이나 전철을 이용하며 역 표지판을 볼 때 그랬고, 식당에서 일본어로 적힌 메뉴판을 앞에 놓고도 그랬으며, 심지어 오키나와의 한 극장에서 상영되는 할리우드 영화의 일본어 자막을 살필 때도 그랬다. 맞아가면서 배운 한자의 도움을 중년이 돼서 받았으니 이걸 '스승의 은혜'라고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하다. 서설은 이제 그만하고.

지난 11월 17일. 오사카에서의 두 번째 날이 밝았다. X세대와 MZ세대를 불문, 오사카를 찾는 관광객 열에 예닐곱은 인근 도시 교토(京都)를 찾는다고 한다.

교토는 한국에 비유하자면 경주와 같은 위상을 가진 도시다. 고풍스러운 동시에 거리마다 역사의 흔적이 스며있다고 했다. 호기심과 흥미가 생겼으니 가볼 수밖에.

오사카에서 지하철과 전철을 이용해 1시간 정도면 교토에 도착할 수 있고, 거기서 버스로 20여 분을 더 가면 청수사(淸水寺)가 있다고 했다.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이 사찰이 어떤 곳인지 여행안내서 <저스트 고 관광지>가 알려준다.

"교토 기요미즈데라(청수사)는 오토와산(音羽山) 중턱의 절벽 위에 위치한 사원으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위태로워 보이지만 막상 들어서면 탁 트인 전망에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본당에서 바라보이는 모습이 절경이다. 사찰 안에는 사랑을 이뤄준다는 지슈진자(地主神社)와 마시면 건강·학업·연애에 효험이 있다는 오토와 폭포가 있다. 8세기에 오토와 폭포를 발견한 엔친 대사가 관음상을 모신 것이 이곳에 절이 생긴 시초다. 기요미즈(淸水·맑고 깨끗한 물)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사계절 모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지만 11월부터 12월 초에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더 많은 관광객이 찾아든다."

교토, 京都, Kyoto... 어떤 게 더 익숙한가요
 
 교토 청수사로 올라가는 길은 고풍스럽고 매혹적이다.
ⓒ 홍성식
교토가 지척인 오사카를 여행한 건 11월 중순. 때마침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철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오사카 외곽에서 교토로 향하는 전철을 타는 역엔 여행자 차림을 한 이들이 많았다. 물론 거기엔 한국인도 적지 않았다.

일본 전철은 한국의 지하철처럼 이용하는 거리에 따라 요금이 정해진다. 정확한 전철 이용 요금을 알기 위해선 먼저 역에 걸린 노선도에서 자신의 목적지를 찾아야 한다. 거기에 지불해야 할 요금이 적혀 있으니까.

어렵지 않게 '京都(경도)'란 한자를 찾을 수 있었다. 승차권 판매기 앞에서 발권을 하고 있는데,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국인 커플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노선도를 올려다보며 "교토가 어디 있지?"라고 서로에게 묻는다.

하기야, 오사카 교외 전철노선도는 서울 지하철노선도 만큼이나 복잡하니 찾기가 어려울 수 있다. X세대의 친절함을 발휘해 MZ세대를 돕기로 했다.

"저기 노선도 왼편 위쪽에 경도가 있잖아요."
"경도요? 교토가 아니고요?"
"한자로 경도면 그게 교토잖아요."
"아, 그래요? 우린 한자를 잘 읽지 못해서."

MZ세대 여행자들에겐 한자 표기보다 영어 표기가 익숙한 듯했다. 기억에 의하면 그 노선도엔 영어 표기가 없었던 것도 같다. 이런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 하기는 어렵겠지만.

같은 학교 선후배라는 둘은 하루 만에 청수사는 물론, 교토의 또 다른 명소인 금각사(金閣寺)와 은각사(銀閣寺)까지 돌아볼 계획이라고 했다. 오가는 게 만만치 않은 거리다. 그런 일정을 가볍게 소화해낼 수 있는 MZ세대의 에너지가 부러웠다.

쉰 살을 넘긴 이후의 여행에선 마음보다 몸이 먼저 지치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가능하면 하루에 한두 군데 이상의 관광지는 찾지 않는 패턴이 고착화되고 있다. 이제는 무리한 일정을 짜면 다음날 힘들어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환한 웃음을 남긴 채 손을 잡고 사라지는 MZ세대 커플의 뒷모습을 보면서,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인도 남부 베나울림 해변길을 슬리퍼 신고 6~7km나 걸어도 멀쩡했던 나의 청년시절이 떠올랐다. 그 순간, 잠시 서글퍼졌다.

그렇다. 유행가 노랫말처럼 누구에게나 빛나는 젊음의 시간이 있지만, 그 시간은 너무나 짧고 올 때처럼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게 세상사 불변의 이치다.

그 유명한 사찰보다 더 좋았던 건 

지하철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다시 버스로 환승한 후 그 버스에서 내려 30여 분 가까이 걸어서 어렵사리 도착한 청수사는 솔직히 말하면 예상했던 기대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이런 말을 하면 괜한 자국 우월주의자로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사찰의 미학적 완성도는 경주 불국사에 미치지 못했고, 청수사 인근 산의 단풍 또한 설악산 단풍의 휘황함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외려 매력적이었던 건 청수사를 오르내리는 '길'과 그 길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골목'이었다. 고아(高雅)한 일본풍의 목조주택이 늘어선 길과 골목엔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점과 카페, 선술집이 여러 개 있어 자꾸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일본 전통과자의 달콤함을 맛본 것도 좋았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한 시기라 인테리어가 독특한 작은 선술집에서 따끈한 청주 한 잔을 청해 마셨다. 옆자리에 앉은 노부부가 조그만 접시에 담긴 완두콩을 맛있게 먹고 있길래, "나도 주세요"라고 했는데, 나중에 계산서를 보니 삶은 완두콩 10여 알까지 돈을 받고 파는 안주였다.

한국에선 팝콘과 통조림 옥수수 따위의 '공짜 안주'에 익숙했었기에 놀라움 끝에 쓴웃음이 나왔던 기억도 청수사 아래 골목길과 함께 남았다.
 
 도톤보리 리버 크루즈에서 오사카의 초저녁 풍경을 즐기는 여행자들.
ⓒ 홍성식
 
교토를 짤막하게 돌아보고 오사카로 돌아오니 해가 저물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숙소에서 멀지 않은 도톤보리(道頓堀)로 향했다. 오사카의 야경을 보며 '도톤보리 리버 크루즈'를 즐기기 위해 배에 오르는 일본과 한국의 MZ세대가 숱했다.
나 역시 타볼까 했으나 일단 다음날로 미루고, 몰려오는 시장기부터 끄기로 했다. 오사카를 10여 차례 이상 여행했던 어느 선배가 추천한, '한국 사람 입에 잘 맞는다'고 소문난 일본 라면을 '금룡'이란 옥호의 식당에서 먹었다.
 
 오사카 도톤보리의 맛집 중 하나로 알려진 금룡.
ⓒ 홍성식
   
 금룡에서 맛본 일본 라면.
ⓒ 홍성식
 
식당 입구에 한자로 '金龍(금룡)'이라 적혀 있어 찾기 어렵지 않았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 했던가? 부산과 경남 밀양에서 맛본 돼지국밥 스타일의 국물이 썩 좋았다.

야식으론 간장과 향신료에 절인 닭고기를 은근한 불에 오래 끓여낸 요리를 먹었는데, 그것도 감칠맛이 그만이었다. 일본 음식은 장식이 정갈하고 맛도 있다. 이건 내 생각만은 아닐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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