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년 기업 머뭇대다 망했다…삼성이 기술 배우던 도시바 몰락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기업은.
일본의 대표 전자기업 도시바가 20일 도쿄 증시에서 사라지며, 이 같은 메시지를 재확인했다. 한때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의 혁신을 이끌며 삼성전자가 ‘따라잡고 싶은’ 기업이었던 도시바가 74년 만에 상장 폐지됐다. 경영 위기에 빠진 도시바를 사모펀드 일본산업파트너스(JIP) 컨소시엄이 지난달 22일 인수하며 비상장사로 전환한 것이다.
마지막 거래일인 19일 도시바 주가는 전날 대비 5엔 떨어진 4590엔(약 4만1420원)으로 마감됐다. 도시바는 20일 자사 홈페이지에 “새 미래를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딛게 됐다”라며 “미래에 대한 헌신이라는 약속을 바탕으로 회사의 기업가치를 더욱 높이겠다”라고 밝혔다.
일본의 대표선수, 삼성과 엇갈린 운명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 1875년 설립된 도시바는 198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던 일본 반도체 산업의 핵심 기업이었다. 당시 도시바를 비롯한 후지쯔·NEC 등 일본기업들은 글로벌 D램 메모리 시장의 90%를 차지하며 미국 인텔을 메모리 사업에서 철수시켰다.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은 1989년 한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도시바·히타치가 4메가비트(Mb) D램에서 제일 앞서가는 회사인데 삼성은 그보다 6개월 뒤처져 가고 있다”라며 “반도체에서 6개월은 6년보다 더 길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양사의 길은 크게 달라졌다. 혁신의 속도에 주력한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 칩 개발에서 셀을 고층으로 쌓아 집적도를 높이는 ‘스택’ 기술을 과감하게 채택하며 도시바를 앞질렀다. 도시바가 기존의 트렌치(밑으로 파내려가는 기술) 방식만 고집하는 사이 신기술로 경쟁력을 높인 삼성전자는 1992년 D램 메모리 시장 1위에 올랐다.
삼성과 도시바의 운명은 낸드플래시 전략에서 다시 갈라졌다. 도시바는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를 저장하는 낸드플래시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지만, 이 기술력을 발판으로 반도체 시장을 석권한 건 삼성전자였다. 1992년 도시바가 인텔과 경쟁하기 위해 삼성에 손을 내밀어 낸드플래시 개발 기술을 이전한 이후, 삼성은 투자를 망설이는 도시바와 달리 낸드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생산설비 투자를 시작해 글로벌 1위에 올라섰다. 그 결과 1990년 글로벌 반도체 2위이던 도시바는 32년이 지난 2022년 세계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IC인사이츠).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변화하는 시대에 도시바는 혁신을 하지 못하면서 적응에 뒤처졌다”라며 “한국 반도체 산업도 지금은 메모리 시장에서 앞서 가지만, 변화하고 혁신하지 못하면 대만·중국에 금세 밀릴 수 있다는 걸 도시바가 보여준다”라고 지적했다. 김용석 성균관대 반도체융합공학과 교수는 “혁신을 게을리하면 경쟁자라고 여기지 않는 기업에도 바로 뒤처질 수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며 “삼성전자 역시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 SK하이닉스에게 1위를 내주는 걸 보면 AI 등 새로운 기술변화가 생길때 방심하면 도시바처럼 선두자리를 뺏길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외에도 도시바는 잇따른 투자 실패로 고전을 거듭했다. 미국 원전 설계 회사인 웨스팅하우스를 시장 예상가 2배에 인수하다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유출 사태 후 큰 손실을 본다. 2015년에는 회계 부정까지 발각됐다. 도시바는 메모리 사업부를 SK하이닉스등이 참여한 한·미·일 연합(2017년)에, 의료기기 부문은 캐논(2017년)에, PC 사업부는 2018년 샤프에 매각하며 사실상 산산조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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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바 체질개선 성공할까
일본 전자산업을 상징하는 기업의 몰락에 일본 산업계의 관심도 크다. 일본 니혼게이자신문에 따르면 도시바는 ▶발전소·원전 등 에너지 ▶철도 등 인프라 ▶파워 반도체 디바이스 ▶IT 시스템 4개 자회사를 본사에 흡수합병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할 예정이다. 도시바의 새 주인인 사모펀드 JIP는 첨단 기술사업 중심으로 도시바의 체질을 개선하고 5년 내 재상장하겠다는 목표다. 일본 정부는 도시바의 파워반도체 사업에 1200억엔(약 1조1000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할 계획이다. 그 외에도 도시바는 양자암호 관련 특허(104건)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등 기술 경쟁력이 여전히 있다.
와타나베 아키히로 JIP 이사회 의장은 향후 인공지능(AI) 기업들과 제휴를 확대할 것을 시사했다. 그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시마다 타로 최고경영자(CEO)는 도시바를 디지털 플랫폼으로 변화시키려 하고, 여기엔 많은 비용이 들 것”이라며 “변화에 필요한 인재 확보를 위해서는 소프트웨어·인공지능(AI) 기업과의 제휴나 인수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도시바는 오는 22일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이사 7명을 선임해 새 경영체제를 발족한다.
박해리 기자 park.hae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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