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휴가 몰려도, 연말 씀씀이 얼어붙는다
직장인에게 12월은 ‘연차 소진’ 시즌이다. 20일 여행 플랫폼 ‘여기어때’가 이달 초 직장인 1000명을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올해 남은 연차가 평균 5.89일로 나타났다. 연말에 연차를 내겠다고 한 경우 1박 이상 여행(88.2%, 이하 중복응답), 당일치기 나들이(8.4%), 가족 모임(7.4%), 휴식(7.1%)에 쓴다고 답했다. 대기업 중에선 삼성 계열사가 연말에 연차를 몰아 쓰는 경우가 많다. LG도 주요 계열사가 26~29일 연차를 권장한다. 현대차는 창립 기념일인 29일 전사 휴무라 연말 ‘4일 휴가’를 쓸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연말 휴가와 보너스 지급이 겹치는 12월은 소비에 ‘호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올해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다. 고물가·고금리 한파에 지갑을 열기 꺼려져서다.
삼성전자에 다니는 박모(41)씨는 26일부터 연말까지 휴가를 냈다. 박씨 주위에도 연말에 연차를 낸 동료가 많다. 크리스마스와 설날까지 더하면 열흘을 쉴 수 있다. 박씨는 연차 기간 하루 스키장에 다녀오고, 가족과 송년 저녁을 하는 일정 외에는 집에서 쉴 계획이다. 박씨는 “외식은 물론 여행 물가가 너무 올랐다. 장기 휴가지만 연말 분위기가 좀처럼 안 난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들른 세종시 도담동 번화가의 한 고깃집은 한창 영업시간인 오후 8시에도 한산했다. 자리의 절반 가까이가 비어있을 정도였다. 주인 김모씨는 “한창 송년회 시즌이지만 예약 문의도 없고, 오히려 거리두기에서 벗어난 지난해 연말보다 손님이 뜸하다”고 말했다.
‘소비 상황판’도 얼어붙었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지난달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97.2를 기록했다. 전달 대비 0.9포인트 내렸다. 8월부터 4개월째 내림세다. CCSI가 100보다 작으면 소비 심리가 비관적이란 뜻이다. 국책연구원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 7일 발표한 ‘경제 동향’에서 지난 3월 이후 9개월 만에 ‘내수 둔화’를 언급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가계 실질 소득이 줄었는데 고물가 추세가 지속한 영향으로 민간 소비가 살아나기 어렵다”며 “지난해 4월 거리두기 해제, 지난 5월 코로나19의 앤데믹 선언에 따른 ‘보복 소비’ 효과도 시들해졌다”고 말했다.
전망도 싸늘하다. 한은은 지난달 경제 전망에서 내수 회복세 둔화를 반영해 내년 한국의 실질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2%에서 2.1%로 끌어내렸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생활 밀접업종(도·소매업, 숙박·음식점업)과 제조업종 등 소상공인 1000명을 대상으로 ‘소상공인 경영실태 및 정책과제’를 조사한 결과, 절대다수가 내년 경영환경이 악화(50.1%)하거나 올해와 비슷(42.4%)할 것으로 내다봤다.
수출이 부진한 올해 3분기까지 경제 성장의 버팀목이 내수(민간 소비)였다. 하지만 내수가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정도(성장기여도)가 줄었다. 한은에 따르면 전기 대비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올해 1분기 0.3%→2분기 0.6%→3분기 0.6%를 기록할 동안, 내수의 성장 기여도는 1분기 0.3%포인트→2분기 -0.1%포인트→3분기 0.1%포인트에 그쳤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GDP에서 내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가까운데 기여도가 비중에 훨씬 못 미쳤다는 건 내수가 다른 항목의 성장을 갉아먹었다는 의미”라며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 내수 성장기여도를 끌어올려야 결과적으로 경제성장률도 끌어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단기간에 소비가 나아지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한동안 3%대를 유지할 전망인 데다, 기준금리도 내년 하반기에나 내릴 전망이라서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달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리 인하 여부에 대해 “물가상승률이 목표 수준(2%)에 충분히 수렴한다는 확신이 있을 때까지 긴축 기조를 유지하겠다. 현실적으로 (6개월보다) 더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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