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완 논설위원이 간다] 전자서명도, 온라인 홍보도 안돼…“법 개정 시급”
올해로 시행 17년째 주민소환제 현주소
주민소환은 선거로 뽑힌 공직자가 주민의 뜻에 어긋나게 행동했을 때 주민들이 투표로 해당 공직자를 물러나게 할 수 있는 제도다. 현재는 국회의원을 제외하고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만 주민소환이 가능하다. 광역 시·도지사는 지역 유권자 10% 이상, 시장·군수·구청장은 유권자 15% 이상 서명을 받아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하면 주민소환 투표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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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이후 120여 건 추진에
최종 성사는 단 2건 ‘바늘구멍’
서명인·투표율 요건 ‘높은 문턱’
비대면 접촉 불가, 제도적 한계
소환 요건 완화안, 행안위 통과
법사위 막혀 본회의 상정 못해
」
충북에선 지난 8월 14일부터 이달 12일까지 120일간 김영환 지사의 주민소환을 청구하는 서명을 받았다. 배상철 주민소환 운동본부 사무국장은 “전체 서명인 수는 13만1759명으로 충북 유권자의 10%(13만5438명)를 충족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서명인 요건에서 3679명이 부족한 결과였다. 결국 김 지사에 대한 주민소환 투표는 성사되지 않았다. 충북 안에서도 도시와 농촌 등 지역별 편차가 컸다. 배 국장은 “청주에선 10만7586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만약 청주 시장이 주민소환 대상이었다면 충분히 투표까지 가능한 숫자(유권자의 15% 이상)였다”고 덧붙였다.
이현웅 주민소환 운동본부 대표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이 대표는 “현행 주민소환법이 갖는 한계가 컸다. 주민소환에 대해 어떠한 홍보도 할 수 없었고 서명을 받는 장소를 주민들에게 알릴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여건 속에서도 13만 명 넘게 서명에 참여했으니 지역 정치인에겐 충분한 경고가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지사는 지난 13일 기자간담회에서 “저를 비판하거나 (주민소환 청구에) 서명한 도민들의 의사도 도정에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소환 추진 90% 이상은 서명인 미달
주민소환은 대의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직접 민주주의 제도의 하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의 도편 추방제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현재 미국·독일·일본 등 주요 선진국에선 주민소환 제도를 활발하게 운용하고 있다. 미국에선 2003년 영화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한 사례가 유명하다. 막대한 재정 적자와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신뢰를 잃은 전임 주지사가 주민소환 투표로 물러난 게 슈워제네거에겐 기회가 됐다.
국내에선 실제로 주민소환이 성공한 사례가 매우 드물다. 제도적으로 두 개의 높은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은 투표에 필요한 서명인 수를 채우는 게 쉽지 않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07년 제도 도입 이후 지난해까지 16년간 125건의 주민소환이 추진됐다. 이 중 주민소환 투표에 필요한 서명인 수를 채웠던 사례는 11건(8.8%)에 그쳤다. 나머지 114건(91.2%)은 대부분 서명인 수 미달로 무산됐다.
어렵게 서명인 수를 채워 투표까지 갔다고 해도 또 하나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 최소 투표율 기준(33.3%)이다. 이 기준을 채우지 못하면 선관위가 아예 투표함을 열어보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투표율 기준까지 충족한 사례는 단 두 건(1.6%)이었다. 2007년 12월 화장장 추진 관련 갈등으로 주민소환이 이뤄진 경기도 하남시 시의원 두 명이다. 이들은 주민소환 투표 가결로 시의원직을 잃었다. 당시 김황식 하남시장에 대한 주민소환도 투표에 부쳐졌지만, 투표율 미달로 무산됐다.
‘재난 부실 대응’ 충북지사 소환 무산
올해 들어선 충북 지사와 경북 상주 시장, 전북 남원 시장 등에 대한 주민소환이 추진됐다. 주민소환법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은 임기 1년이 지나야 주민소환이 가능하다. 이들은 지난해 7월 취임했기 때문에 올해 하반기부터 주민소환 활동이 허용됐다.
각 지역에서 도지사나 시장의 주민소환을 추진하는 사유는 다양하다. 김영환 충북 지사는 지난 7월 청주 흥덕구 오송읍의 지하차도 침수로 14명이 숨진 사건에 대한 부실 대응, 강영석 상주 시장은 시청 청사 신축을 둘러싼 갈등, 최경식 남원 시장은 허위 학력 기재 등에 대한 주민 반발이 배경이다. 현재 상주와 남원에선 선관위가 주민소환 청구 서명부를 검증하는 절차를 진행 중이다. 선관위에 제출한 서명부가 법적 기준을 넘었더라도 부적격 서명이 많으면 주민소환 투표를 하지 않는다.
충북에선 835명이 주민소환 서명을 받는 수임인으로 선관위에 등록했다. 청주에서 10년 간 커피숍을 운영한 박재홍 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150명 정도 서명을 받았다는 박 씨는 “가게를 찾은 고객들은 대부분 도지사에게 문제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혹시 불이익을 받을까 봐 주민소환 서명을 망설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홍보가 너무 어려웠다. 단지 서명을 부탁한다고 말하는 것도 법에 걸린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현웅 주민소환 운동본부 대표는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의사소통과 전자서명이 일상화했는데 모든 걸 오프라인으로만 해야 했다. 주민소환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전자서명과 온라인 홍보를 허용하는 법 개정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전자서명 등 도입해 실효성 높여야”
이 대표가 언급한 부분은 이미 국회에서 법 개정 절차를 진행 중이다. 지난해 12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한 주민소환법 개정안이다. 전자서명을 도입하고, 온라인 홍보와 문자 메시지 발송 등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 인구가 많은 지역에선 주민소환 청구에 필요한 서명인 수 요건을 완화하고, 주민소환 투표함을 여는 데 필요한 투표율도 현행(33.3%)보다 낮은 기준(25%)을 적용하는 방안을 포함했다. 다만 전체 유권자의 최소한 16.7%가 찬성해야 주민소환이 성사된다는 단서 조항을 붙였다. 이 법안이 진작에 국회를 통과했다면 충북 등에서 주민소환 청구 활동의 결과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주민소환법 개정안에 여야 간 의견 차이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당시 행안위에선 여야 의원들의 만장일치로 법안을 가결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주민이 주인이 되는 지방자치 구현을 위한 법률”이라며 법안 통과에 감사의 뜻을 밝혔다. 애초에 법안을 제출한 건 문재인 정부였지만 윤석열 정부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하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법안 처리를 미루고 있다. 법사위 일부 의원이 외국인 영주권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조항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 조항은 법 개정안과 별개로 현행법에도 똑같이 있는 내용이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지난 7월 보고서에서 주민소환 제도의 합리적 운영을 위해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하혜영 입법조사처 행정안전팀장은 “주민소환 청구에 필요한 서명인 수는 지역별 인구 규모를 고려해 차등화하고, 주민소환 투표의 개표 요건을 완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현실적으로 주민소환을 어렵게 하는 장벽을 낮춰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자는 얘기다. 이런 내용은 국회 행안위를 통과한 법안에도 그대로 담겨 있다. 다만 법사위에 막혀 있어 21대 국회 임기(내년 5월 말) 안에 본회의에 상정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 불법 없어도 주민소환 가능…헌재 “합헌”
「 국내에서 주민소환법을 처음 만든 건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이었다. 야당(한나라당)이 사학법 개정안에 대한 반발로 국회 일정을 전면 거부(보이콧)한 가운데 여당(열린우리당) 단독으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처음 시도하는 제도의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그는 “주민소환 사유를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하고 주민소환 요건도 엄격하게 할 필요가 있다”며 법 개정을 요구했다. 선출직 공직자의 불법 행위나 중대한 실책이 없어도 주민소환을 추진할 수 있는 건 부당하다는 주장이었다.
주민소환법에는 어떠한 사유에서든 법적 서명인 수만 충족하면 선관위가 주민소환 투표를 부치도록 했다. 열린우리당은 “야당의 발목잡기”라며 법 개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주민소환제는 법안 통과 1년 뒤인 2007년 5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주민소환 사유를 명시하지 않은 법 조항에 대해선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이 제기되기도 했다. 헌재는 2009년 재판관 5(합헌) 대 4(위헌)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주민소환제는 기본적으로 재선거와 속성이 같기 때문에 그 사유를 묻지 않는 게 취지에 맞다. 비민주적, 독선적 정책 추진 등을 광범위하게 통제하려면 청구 사유를 제한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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