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교주 최시형의 항일투쟁은 왜 인정받지 못 하나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1979년 12월 27일에 발생한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침공'으로 불리기에 다소 애매한 측면이 있다. 다음날 발행된 <동아일보> 3면 우상단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바브라크 카르말 아프가니스탄 전 부수상이 27일 악화일로의 회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소군(蘇軍)의 직접 개입하에 쿠데타를 일으켜 하피줄라 아민 대통령을 축출하고 전권을 장악한 후"
군사행동을 일으킨 주체는 아프가니스탄 쿠데타군이고 소련은 조력자였다. 소련의 행동은 정부군이 볼 때는 침공이지만, 반군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런 애매한 상황을 설명할 때에는 '침공'보다는 '개입'이란 용어를 쓰는 게 바람직하다.
침공이라 불리기 애매한 면이 있는데도 그냥 침공으로 불리는 이 사례와 정반대로, 침공으로 불려야 하는데도 그렇게 불리지 않은 사건이 한국 역사에 있다. 한국이 침공을 당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도 그동안 침공이란 표현이 기피되어 온 것이다.
▲ 해월 최시형 |
ⓒ 위키미디어 공용 |
1875년 강화도에서 군사 도발을 일으키고(운요호 사건) 이를 발판으로 조선 경제를 예속시킨 일본은 1894년에 반봉건을 기치로 하는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자국민과 공사관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동원했다. 조선 정부는 이 군대를 거부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고종시대사> 제3집에 따르면, 음력으로 고종 31년 5월 5일(양력 1894년 6월 8일) 외교부장관인 조병직 독판교섭통상사무는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일본임시대리공사에게 "파병을 정지시킬 것"을 요구하는 조회문을 보냈다.
반군인 동학군 역시 일본군의 상륙을 반대했다. 전주성을 점령하고 승기를 잡은 동학군이 이 성을 비워주면서까지 정부군과 휴전한 것은 반봉건보다 반외세가 더 시급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처럼 동학군과 정부군 어느 쪽도 일본군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위 조회문 발송 다음 날에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이들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를 제압한 뒤 이 땅에서 청일전쟁을 일으켜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했다. 그런 다음, 동학군을 진압해 조선 민중의 항일 에너지를 짓눌렀다.
일본군은 동학군과 정부군 양측이 다 거부하는데도 조선에 들어왔다. 그래서 개입이니 파병이니 출병이니 하는 용어가 개입될 여지가 희박하다. 결국 이때의 침공이 을사늑약과 국권침탈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 침공에 맞선 사람들은 항일투사 혹은 독립투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인물 중 하나가 제2대 동학교주인 최시형이다. 그는 스승인 최제우를 뒤이어 동학 교세를 확장시키는 데만 기여한 게 아니었다. 일본군이 침공한 뒤에는 동학 교단이 항일투쟁에 나서도록 만드는 데도 이바지한 인물이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동학 조직은 남접으로 불린다. 이들은 정치적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다. 반면, 최시형을 중심으로 하는 교단 주류세력은 북접으로 불린다. 이들은 정치보다는 종교적 입장을 우선시했다.
최시형은 반봉건 성격을 띠는 전봉준의 제1차 거병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했다. 초대 교주 최제우가 정부의 탄압으로 처형된 일을 가까이서 경험한 그는 교단을 위태롭게 하는 일은 가급적 기피했다.
그는 반외세 봉기인 제2차 거병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한양 조정이 항일 봉기에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뒤에는 태도를 달리했다. 그를 비롯한 북접 지도부는 그해 음력 9월 11일자(양력 10월 9일자) 통문을 통해 교인들의 항일 거병을 촉구했다.
2000년에 <동학연구> 제6집에 실린 역사학자 이희근의 논문 '1894년 동학 지도부의 제2차 기병(起兵) 추진과 그 성격'은 "최시형 등 북접 지도부도 대원군의 계획, 즉 국왕의 뜻을 파악하고 지금까지 관망적인 자세에서 탈피"했다며 위 '9·11 통문'의 내용을 소개한다. 논문에 따르면 이 통문은 "지금 일본군이 크게 소란을 일으켜 조선이 다칠 우려가" 있다며 "머리가 당기고 마음이 찢어지며 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고 한 뒤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가 보국안민의 의리로 보아 어찌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겠는가. 다만 원컨대 우리 도(道) 제군자(諸君子)는 북이 한번 울리며 일어날 것을 약속하고 대무(大務)에 뜻을 같이하며 제반 군용(軍用)을 잘 갖추어서 충성을 다하고 나라에 보답하는 자리로 향할 뿐이다."
우리 교의 모든 군자님들은 북이 울리면 군사 무기를 갖춰 일본에 맞서라고 명령했다. 최시형의 이 지시는 실제로 동학교도들을 움직였다. 위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최시형의 지시에 따라 충청도에서뿐만 아니라 북접 통제하에 있던 경상도 및 황해도에서도 봉기하였다. 실제 최시형의 지시에 따라 11월 12·13일(양력)에 충청도 청산에서는 농민군 2만여 명이 전봉준 부대와 연합해서 2차 기병을 추진하기 위하여 모였다. 이때 충청도뿐만 아니라 멀리 진주·안성 등 경상·경기도 지역의 농민군까지도 참가하였다."
▲ 1973년 박정희 정권이 세운 동학혁명군위령탑. 공주 우금치에 위치해있다. |
ⓒ 김종훈 |
교주의 지시에 따라 황해도 동학교도들도 움직였다. 이때 황해도에는 '애기접주'로 불리는 18세의 김창수가 있었다. 훗날 백범 김구로 불리게 될 청년 동학 간부였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이 시기에 최시형을 면담한 일을 회고하면서 "호랑이가 물러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우자"라는 최시형의 말을 소개했다.
1947년에 출간된 <백범일지>는 1894년 전후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사건 발생 시점을 부정확하게 기술했다. 그러나 최시형의 발언과 그와의 만남만큼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그러면서 최시형의 항일 발언을 소개했다. 일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교주를 만난 자리에서 그런 발언을 들었다면, 발언의 취지에 대해선 오래도록 기억날 것이다.
김구는 최시형의 항일 의지를 설명한 뒤 자신도 반(反)서양·반일본의 기치를 들었다고 밝혔다. "표어로는 척양척왜 넉 자를 써서 높이 걸었다"라고 회고했다. 최시형이 교인들의 항일의식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 이처럼 김구의 기억에서도 나타난다.
"충청도 청산에서는 농민군 2만여 명이"라는 위 논문의 표현에서 느낄 수 있듯이, 동학의 항일전쟁에 참여한 규모는 일제강점기의 독립군 규모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평화적인 항일투쟁 중에서는 3·1운동이 최대 규모라면, 군사적인 항일투쟁에서는 동학군 제2차 봉기가 최대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전봉준과 함께 그런 일을 지휘한 인물이 최시형이다. 그런데 그는 전봉준과 마찬가지로 독립유공자로 지정돼 있지 않다. 국가보훈부 내규는 1894년에 항일한 동학군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을 계기로 일어난 을미의병부터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한다. 1894년의 일본군 침공이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로 이어진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한 방침이 아닐 수 없다.
보훈부의 방침대로라면, 일본의 침략이 명성황후 시해와 함께 시작했다는 말이 된다. 일본이 남의 나라 중전을 함부로 시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직전에 남의 나라 민중과 정부를 군사적으로 제압해 뒀기 때문이다. 보훈부 내규는 일본이 아무런 맥락도 없이 다짜고짜 명성황후부터 해치면서 조선을 침략했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처럼 합리적 근거 없는 정부 방침으로 인해 최시형이 항일 인사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독립운동이 우리 사회에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야 할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역사 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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