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용광로’ 韓 조선소… 한국식 상명하복 등 첩첩산중
내년엔 전체 용접공 절반쯤 차지
상명하복식 韓 문화 적응 못하고
노조 가입 눈치·임금 불만도 생겨
경남 거제시 한화오션 거제사업장 화장실 내에 있는 ‘핸드 타올을 변기에 넣지 마세요’라는 한글 아래에는 네팔, 베트남, 미얀마 등 7종류의 외국어로 된 안내 문구가 적혀 있다. 작업장 곳곳에선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노동자를 쉽게 볼 수 있다. 용접봉을 잡고 있는 상당수가 외국인이었고, 점심시간 식당가에는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이 보일 정도다. 울산 동구 HD현대중공업 사업장도 사정은 비슷하다. 여러 국적의 외국인이 용접 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 조선소를 빠르게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 2010년대 조선업 불황기에 조선소를 떠난 한국인 노동자의 빈자리를 최근 3~4년 새 외국 인력이 메웠다. 한 조선업 관계자는 20일 “3~4년 전 수주호황으로 인력난을 겪을 때 3D업종인 조선업에 일하려는 사람이 없었다”면서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게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고 말했다.
실제 대형 조선사 5곳(HD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 한화오션, 삼성중공업)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만 1만4100여명에 달한다. 회사별로 보면 HD현대중공업이 3500명으로 가장 많고 현대삼호중공업(3000명), 한화오션(3000명), 삼성중공업(2400명), 현대미포조선(2200명) 순이다. 각 조선소 사내협력사(하청업체) 직원의 약 30%를 차지한다. 이들은 주로 생산 현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한다.
내년에 5000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추가로 들어올 예정이라 조선소 용접공의 절반 가까이가 외국인으로 채워질 전망이다. 외국인 노동자는 만성적인 인력난을 겪고 있는 조선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블록 용접이라는 단순 작업에 치중하고 있지만, 3~4년 이상 쌓여 있는 처리 물량을 소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조선소에 외국인이 넘쳐나면서 갈등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우선 문화 차이가 심각하다. 한국인 노동자의 상명하복식 문화에 외국인이 적응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생각과 식습관 등에서도 차이가 난다. 또 평균나이 30대인 외국인과 대부분 40대 이상인 한국인의 ‘세대 차이’도 크다. 외국인끼리도 언어와 문화가 달라 서로 배타적인 경향이 짙다.
더 큰 문제는 용접 등 기본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 조선소에 들어오다 보니 미숙련 외국인들이 용접봉을 잡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이다. 한 조선소 관계자는 “정부가 이들에게 E-7 비자(숙련기능인력)를 주면서 현지 6개월 사전 교육 면제 조치를 취한 뒤부터 조선소 자체 교육 후 바로 투입되기 때문에 용접 실력이 좋을 수 없다”고 말했다.
처우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기존 고용허가제에서는 최장 3년 단위로 계약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E-7 비자는 1년 또는 길어야 2년 단위 재계약을 하는 게 대부분이다. 따라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내협력사나 원청(조선사)에 밉보이는 행동을 하면 재계약이 불발돼 본국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생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노동조합 가입은 꿈도 못 꾼다. 조선소 외국인 노동자 중 노조에 가입한 사례는 아직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하청노조 관계자는 “최장 9년 동안 1년 단위로 재계약하는 외국인들이 협력사 사장들 눈치를 보기 때문에 노조에 가입하는 걸 꺼린다”고 말했다.
임금에 대한 시각차도 크다. 조선업계 한 임원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처음에는 본국 대비 높은 급여 수준에 만족하지만 1~2년 일하다보면 ‘왜 우리는 한국인만큼 받지 못하냐’는 불만을 내비치곤 한다”고 말했다. 실제 금속노조가 지난 5월부터 9월까지 조선소에서 일하는 10개국 출신 외국인 노동자 410명을 대상으로 ‘조선업 이주노동자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64%가 조선소를 떠나고 싶다고 답했다. 이들의 가장 큰 이유는 ‘노동강도에 비해 임금이 낮아서’였다. 현재 외국인 임금은 최저임금 수준으로 묶여 있다. 추가 근무나 특근 수당을 받아도 식비와 숙소비 등 명목으로 공제돼 올해 기준 ‘통상임금 월 270만원’을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다. 사업장변경도 제한돼 회사(사내협력사)를 옮기기도 까다롭다.
조선사들은 외국 인력을 포용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지만, 역부족한 형편이다. 외국인용 생활 가이드북을 제작해 나눠주거나 통역, 외국인 코디네이터(도우미)를 국가별로 1명씩 채용한 정도다. 업계 관계자는 “생산 현장에서 외국인에 대한 의존도가 올라가고 있고 언젠가는 외국인 노동자 노조도 생겨날 것”이라며 “내국인과 외국인, 외국인 간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김민영 기자 m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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