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신 마비'라더니 걸어다녔다…산재 부정수급 60억 적발
#1.병원 근로자 A씨는 집에서 넘어져 다쳤는데도 병원 관계자에게 ‘사무실에서 넘어진 것으로 산재처리를 해달라’고 부탁했고, 공단에도 거짓 진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A씨는 요양신청을 통해 5000여만원의 보험금을 취득했다. 하지만 외부 제보를 통해 업무상 재해가 아닌 것으로 확인돼 재해자와 공모자인 병원 관계자에게 보험금을 배액징수하고 형사고발 조치도 이뤄졌다.
#2.B씨는 추락에 의한 골절 등 상병을 진단받고, 최초 장해등급 및 장해등급 재판정에서 ‘척수손상으로 양하지 완전마비’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평소 혼자 걷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다는 제보를 받고 조사한 결과, 전동 휠체어에서 일어나 걷는 것이 확인돼 장해등급 재결정, 부정수급액 배액징수, 형사고발 등 조치 취하기로 했다.
고용노동부는 20일 이같은‘산재 나이롱 환자’와 관련한 산재보험 제도 특정감사 중간결과를 발표했다. 지난달 1일부터 시작된 이번 특정감사를 통해 지금까지 178건 중 117건(65.7%)의 부정수급 사례가 적발됐다. 부정수급 적발액은 60억3100만원이었다.
음주운전하다 다쳤는데 ‘배달 중 사고’ 허위신청
부정수급 유형은 다양했다. 재해 경위 자체를 조작하는 경우는 A씨 사례처럼 사업주와 공모하는 경우가 있지만, 재해자 혼자서 허위 신청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배달업무에 종사하는 C씨는 이륜자동차로 음주 운전을 하다가 넘어져 사고가 났지만, 공단에 배달 중 넘어졌다고 거짓 신청을 해 1000여만원을 수령했다. B씨처럼 장해상태를 허위 조작하는 경우도 적발됐다.
일당을 조작하거나 휴업급여 등을 허위 수령하는 경우도 있었다. 목공일을 하는 D씨는 골절 등 상병으로 요양 후 4000여만원을 수령했는데, 알고 보니 일당을 조작해 평균임금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요양 기간에 본인이 공사와 계약하고 사업을 운영했음에도 휴업급여를 청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배달업무 종사자 E씨는 오토바이를 타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져 어깨 관절 염좌 등 상병으로 요양 후 4000여만원을 수령했는데, 요양 기간에도 배달업무를 계속 하면서 타인 명의로 근무하고 타인 통장으로 급여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부정수급 적발금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장기요양 환자를 살펴본 결과, 지난해 기준 6개월 이상 입원 환자가 전체의 47.6%, 1년 이상 환자가 29.5%에 달했다. 이에 근로복지공단에 장기요양 환자 진료계획서를 재심사하도록 했고, 그 결과 1539명 중 419명(27.2%)에 대해 요양 연장을 하지 않고 치료종결을 결정했다.
다만 여당에서 지적했던 이른바 ‘산재 카르텔’ 의혹에 대해선 추가적인 조사를 진행하겠다고만 밝혔다. 고용부 감사는 이달 말까지 진행된다. 또한 감사를 마친 뒤 전문가가 참여하는 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를 통해 구조적 문제점을 개선하겠다는 방침이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병원에서 합리적 기준 없이 진료 기간을 장기로 설정하고, 승인권자인 근로복지공단이 관리를 느슨하게 했기 때문”이라며 “이와 관련해 산재 카르텔 가능성에 대해서도 추가로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빠른 보상 위한 ‘추정의 원칙’도 손 보나
일각에선 산재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에 영향을 미치는 ‘추정의 원칙’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 장관도 이날 “근골격계 등 일부 질병에 대한 추정의 원칙 적용에 있어 조사절차 생략 등 외부 문제 제기 사항을 면밀히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추정의 원칙은 작업 기간과 위험요소 노출량 등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반증이 없는 한 현장조사를 생략하고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는 제도다. 산재 환자에 대한 보상을 촉진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17년 9월 도입됐다. 하지만 특정 질병에 대해 광범위하게 인정되다 보니 산재 재정 부실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정진우 서울과기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이날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일자리연대 정책토론회에서 “특정 직종에 일정 기간 근무했다는 이유로 원인조사 없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한다면 기업과 개인의 직업성 질병 예방 노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며 “기업의 예방 활동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게 하거나 개인의 예방 노력에 대한 의지가 약화될 수 있다”고 밝혔다.
노동계 “지금도 산재 입증 힘들다”
다만 정부의 ‘산재 카르텔’ 인식이 자칫 선량한 산재 환자들에 대한 역효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나온다. 지금도 산재 환자 가운데 업무와의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어려워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인정 기준이 과도하게 높아지는 것 아니냐는 취지다. 지난달 21일 노동계에서 열린 산재환자 증언대회에 참석한 정경희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대구지부장은 “학교급식노동자로 17년째 근무하고 있는데, 지금도 개인이 산재를 입증하는 것은 너무 어렵고 힘들다. 대체인력을 구하기도 어려워 어지간하면 산재신청을 미루거나 하지 않는다”며 “‘느슨한 산재 승인과 요양관리에서 비롯된 산재 카르텔을 뿌리뽑겠다’는 정부 발표는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토로했다.
세종=나상현 기자 na.sang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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