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군사 고문을 해보려 했으나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김선흥 기자]
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당시 조선은 군비증강과 군대개혁만이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방책이었습니다. 나의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는 미국이 하루 속히 그 일을 주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다른 주변국들의 군사개입은 점령으로 귀결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우리 미국은 조선을 점령할 생각도, 이유도, 이익도 없었습니다. 한미 수교후 고종이 미국에 군사훈련을 집요하게 요청한 까닭이 그러하였죠.
군사교관 파견을 간절히 원했던 나는 1885년 조선 군대의 현황을 본국에 상세히 보고한 바 있었습니다.
요지인 즉, 조선 군대는 Remington 과 Peabody-Martini 와 같은 rifle을 갖추고 있음. 아울러 여섯 정의 가틀링Gatling 건과 탄약 재장전 장비를 주문해 놓은 상태임. 그러나 군대를 구식 군인들이 지휘하고 있음. 4개의 수도 경비 부대는 현대 소총 발사 훈련을 오랫동안 받고 있음. 제복을 입고 있는 그들은 충직하나 무기 매뉴얼, 전투 전술에 대한 훈련이 안 되어 있음. 장교들은 옛 문명의 조선인으로서 근대적인 군사지식이 없음..... 등등.
한미 수호조약의 주역이자 조선에서 신망이 높은 슈펠트 제독(퇴역)이 조선에 와서 외교 고문 혹은 군사훈련을 맡아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습니다. 고종은 일찍이 1884년에 미측에 그런 제안을 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2년 여 동안 아무런 회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차에 1886년 10월 어느날 슈펠트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일본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슈펠트는 고종의 초청을 받고 입양한 딸 몰리MOLLY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한양에 나타났습니다. 그로서는 수교협정문에 서명한 지 근 5년 만의 재방문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공인이 아니라 개인 신분이었죠.
고종은 슈펠트 제독을 아주 정중히 맞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고종으로부터 조선을 위해 일해 줄 것을 요청받은 슈펠트는 정중히 사양하면서 한 가지 조언을 했습니다. 조지 포크를 왕의 군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삼아달라는 것. 고종은 반겼지만 나로서는 망설여졌습니다. 슈펠트의 조언은 단지 사견일 뿐인 데다 나는 당장 좀 쉬고 싶었습니다. 또 청나라가 어떤 푹거를 일으킬지도 알 수 없었구요.
슈펠트 제독은 조선에 석 달 가량 머물렀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서로 만났습니다. 흉금을 털어 놓고 대화하고 식사도 했지요. 2년 전에 외교 채널을 통해 보낸 고종의 초청장에 대해 그는 뜻밖의 말을 하더군요. 그런 메시지를 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죠. 제독은 내 조선살이의 실상을 알고 진심으로 동정하고 위로해 주더군요. 오랫만에 사람을 느꼈지요. 어느날 귀가 솔깃해지는 말을 그로부터 들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슈펠트 제독은 저에게 조선의 군대 통솔을 맡으라고 강력하게 권하고 있답니다. 그 건에 대하여 슈펠트와 이야기 하던 중에 그가 말하기를, 만일 본국 정부가 허락한다면 자신이 잠정적으로 공사관 책임을 받아들이겠다, 대리 공사로서가 아니라 단지 상황을 챙기기 위해 그렇게 할 용의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기뻐서 펄쩍 뛰었지요. 그리고 추수 감사절에 Byard 국무 장관에게 전보를 쳤답니다. '1년 간 휴가를 요청함. 슈펠트 제독에게 잠정적인 책임부여를 허가하시겠습니까?'
-1886.12.3 편지
본국의 답을 애타게 기다리던 중에 11월 28일 북경 주재 공사로부터 짤막한 전보를 받았습니다: '북경 공사의 비서 Rockhill씨가 조선 주재 대리 공사로 발령이 났음' 슈펠트 제독은 정부가 자신에게 공사관을 맡겨주지 않은 것에 속이 좀 상한 것 같더군요. 그러나 나는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 공사관을 떠날 수 있겠구나 싶어서였죠.
고종과 많은 관리들은 날더러 군대 지휘를 맡아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나는 높은 자리보다는 군사 고문 역할을 맡아 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휴가 신청에 아무런 소식을 주지 않고 있는 정부를 이제 더 이상 바라보지 않고 갈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였죠. 기분이 날 듯하고 건강도 좋아졌지요.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새삼스레 지난 날을 돌아 보았답니다.
"조선의 전망은 제가 처음 이곳에 발을 들여 놓은 이래로 어느 때 보다도 좋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변란(갑신정변)이 일어났던 지난 1884년 12월부터 요 지금에 이르기까지 저는 단신短身의 왕과 그의 백성들을 옹호하느라 고군분투했지요. 만난을 무릅쓰고 최악의 상황을 벗어났답니다. 저는 이제 공사관을 떠나도 무방할 겁니다.
12월의 사변으로 인해 조선이 빠졌던 수렁에서 빠져 나오도록 저는 다리 역할을 했답니다. 이제 간극이 매꾸어져서 다리가 필요 없어졌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좀 허풍스럽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진실이랍니다. 아마도 몇 년 후에 진실을 아시게 될 거로 확신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일 뿐입니다. 그걸 일찍이 깨닫지 못했지요. 그동안 제 어려움에 대하여 그토록 불평불만을 많이 했던 자신이 부끄럽군요. 하지만 당시엔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어려움과 근심을 안고 있었지요." - 1886. 12.3 편지
총독 행세를 하는 원세개는 자신의 갖은 위협과 음모에도 불구하고 내가 병원 건립을 성사시키고, 의료 전문학교를 세우고, 귀족 학교와 일반인을 위한 보통 학교를 도입하고 화약 제조 공장을 돌아가게 하고(수력 화약 제조 공장은 Walter Townsend에 의해 한양 북서문 밖에 지어져 1886년 2월에 가동 되었으나 1888년 소실), 조선 국기를 단 조운선이 성공적으로 오가고, 통신시설과 신작로가 건설 되는 것 등등을 지켜보아야 했지요. 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의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에게 먹잇감을 던져 준 것은 바로 미국 정부였으니....
"아버님, 어머님....
여기서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답니다. 제가 정부에 보냈던 비밀 보고서가 우리 정부에 의해 <Foreign Relations for 1885(1885 외교 관계 백서)에 발표되었다고 예전에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상하이 신문과 일본 신문들이 그 보고서를 보도하였고 여러 논평도 뒤따랐답니다. 포크씨가 어리석게도 나약한 조선의 국왕을 그토록 신뢰한다느니, 또 김옥균과 한 편이라느니.... 구구했습니다. 저는 곧 난처한 일이 생기겠구나 하고 직감하였었지요.
근 20일 전에 보고서 내용이 조선인들의 귀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답니다. 이제 사람들은 입만 열면 제 이야기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민씨 세력과 수구파들은 엄청 당혹해 하고 있지요. 자신들의 실상이 세상에 까발려졌으니까요. 청나라 사람들도 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야료를 부렸습니다.
조선인들에게 제가 아주 나쁜 놈으로 보이도록 상하이 신문에 보도된 영문 내용을 왜곡 번역하여 유포한 것입니다. 어제는 조선의 외교 수장이 공사관에 항의 공한을 보내 왔습니다. 이 건으로 조선 왕국의 명예가 심하게 손상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저는 마음을 비웠습니다."
- 1886.12.31 편지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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