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에 들어보는 ‘헐버트 선교사의 기쁜 소식’은?

장창일 2023. 12. 2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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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을 이틀 앞둔 오는 23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호머 헐버트(1863~1949) 선교사의 가슴 찡한 이야기가 공중파를 통해 전해진다.

남다른 한글 사랑으로도 유명한 헐버트 선교사는 1890년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저술하기도 했다.

2년 뒤 헐버트 선교사는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파견된 이준·이상설·이위종의 활동도 도왔다.

일제에 의해 추방됐던 헐버트 선교사는 42년 뒤인 1949년 이승만 대통령 초청으로 다시 한국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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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한 미국인의 가슴 찡한 이야기
23일 밤 10시 25분, KBS1TV ‘다큐온’ 통해 방송
호머 헐버트 선교사.

성탄절을 이틀 앞둔 오는 23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호머 헐버트(1863~1949) 선교사의 가슴 찡한 이야기가 공중파를 통해 전해진다.

KBS 1TV 다큐온은 이날 오후 10시 25분 ‘성탄특집, 헐버트가 전하는 기쁜 소식’을 전국에 방영한다.

헐버트 선교사는 1886년 7월 5일 우리나라에 입국해 복음을 심는 동시에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항일운동을 도왔다. 남다른 한글 사랑으로도 유명한 헐버트 선교사는 1890년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저술하기도 했다.

1905년 고종 특사로 미국에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연 것도 그였다.

2년 뒤 헐버트 선교사는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파견된 이준·이상설·이위종의 활동도 도왔다. 일제는 이를 핑계로 고종을 퇴위시켰다. 일제에 의해 추방됐던 헐버트 선교사는 42년 뒤인 1949년 이승만 대통령 초청으로 다시 한국에 왔다. 광복절 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해서였지만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먼 여행을 한 헐버트 선교사는 여독으로 인해 입국 7일만인 8월 5일 별세했다.

그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잠들었다. 평소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바랐던 그의 묘비에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쓰여 있다.

선교사로 이 땅에 온 그는 고종의 외교 자문이자 독립운동가, 언어학자이면서 역사학사였고 언론인이었다.

방송에는 전통 민요 아리랑에 시를 붙여 미국과 캐나다에서 부르는 찬송가도 등장한다. 헐버트 선교사가 구전으로 떠돌던 아리랑을 서양식 악보로 정리해 미국에 소개한 영향이다. 그는 전국적으로 지역마다 다르게 불리던 아리랑 수백 곡을 채집해 ‘조선의 성악’이라는 제목의 논문도 썼다.

헐버트 선교사는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오른쪽 사진은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는 헐버트 선교사 묘비 모습.

헐버트 선교사는 1950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을 추서했다. 2014년 한글날에는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도 추서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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